13. 백파적 (2)
토벌군과 맞닥뜨린 5채 백파적들은 정팔의 계획 하에 토벌군을 완벽하게 궁지로 몰아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팔만 살아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정팔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정팔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 나머지 5채 백파적들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왔다. 대부 한 자루만을 의지한 채.
“저, 저 놈 미쳤나?”
처음에는 따라 들어오는 군사들 없이 홀로 오는 이의민을 보며 다들 미쳤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곧 홀로 들어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크아악!!”
“누가 저놈 좀 막아 봐!”
사선으로 휘두르는 대부 아래에 5채 도적들은 단 일합도 버티지 못했다. 간신히 무기나 방패를 들어 대부의 궤적을 막는 도적도 간간히 있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이의민이 휘두르는 대부는 앞을 막는 그 어떤 것이 전부 베어내고, 아니.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고, 그 뒤에 숨어있던 도적들을 갈라버렸다.
5채 도적들의 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럼에도 부족한지 대부는 쉴 틈 없이 새로운 목표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온 야차의 모습이었다.
“야, 야차다! 야차가 내려왔다!”
천상 이의민은 야차라고 불릴 운명인가보다.
“젠장! 다들 쫄지마! 상대는 고작 하나라고! 다들 뭐하는 거야?”
5채 도적들 중 일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이의민을 상대하려 했다. 어쨌거나 상대는 단 한 명일뿐이고 5채 도적들은 삼천이 넘는 인원이었다. 물론 이의민 뒤로 엄청난 수의 토벌군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에 있지만, 당장 이곳에서 맞서 싸울 적은 그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팔의 허무한 죽음과 그 뒤에 이의민이 펼쳐 보인 모습이 워낙 충격이 컸던 걸까? 5채 도적들은 제대로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대다가 이의민의 대부에 쓰러지고 있다.
“씨발! 부채주는 뭐하나? 채주가 없으면 지가 뭐라도 해봐야 되는 거 아냐?”
“이런 멍청한 놈! 부채주는 아까 진즉 뒤졌잖아!”
“뭐? 부채주는 또 언제 죽었어? 이런 좃됐네! 그나마 우리 5채에서 부채주가 가장 강한데...?!”
한편 토벌군은 힘들게 산을 올라가다가 갑자기 펼쳐진 광경에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처음 정팔과 5채 도적들이 나타났을 때 다들 크게 놀랐다.
특히 토벌군의 총대장인 황보숭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도적들의 함정에 제대로 빠진 건가? 여기서 크게 패할 수도 있는 건가?’
군을 이끄는 자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역시 아군의 패배, 그것도 큰 피해를 동반하는 패배였다. 그것이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었다. 싸우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고?
황보숭은 오랜 전투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적들이 등장했고,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자신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건적 토벌 때도 수없이 경험했듯이, 이런 경우에는 십중팔구 패배였다.
‘아니 되겠다. 일단 군사들을 당장 후퇴시키고 후일을 도모해야.... 허나 이 험한 산길에 어찌 빠르게 후퇴를 할 수가....’
군사들을 어떻게 퇴각시켜야 할지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쓰러졌다. 바로 이의민이 던진 도끼에 의해서.
이런 광경은 전투경험이 수없이 많은 황보숭으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이후의 상황 역시 황보숭의 사고회로를 정지시켰다.
‘뭐, 뭐지?’
그래도 황보숭은 총대장답게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던 토벌군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뭣들 하는가?! 전원 돌격하라! 원술과 포신은 좌우를 방어하라! 함정이 있을 지도 모른다. 조조와 원소는 매복지로 가서 적들을 정리하라.”
황보숭이 호통을 치며 명을 내리자 그제야 나머지 토벌군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는 명을 따랐다.
원술과 원소 등의 제후들은 황보숭의 명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의민과 5채 도적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의민과 곽봉이 단 둘이서 하진을 기습했던 십상시들과 그들과 한패였던 황궁 군사들을 처단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었다.
분명 하진과 저 둘이 어떤 계략을 통해서 처단했다고 믿고 있었다. 사실 믿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의민이나 곽봉이나 둘 다 고작 보사였던 자들이 어떻게 정예 황궁 군사들을 단 둘이서 도륙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의민이 직접 사실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그, 그럼 저놈이 십상시와 그 군사들을 처단했다던 그 개소리가 진짜라고....?’
이의민의 무력을 믿게 되자 살짝 오싹해지는 원술. 만약 처음 만났던 그 객잔에서 이의민이 자신을 죽이자고 덤볐으면 정말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황보숭의 명을 그 누구보다 빨리 받드는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곽봉이다.
“이 봐! 의민이! 아니! 후장군! 조금만 버티십시오. 제가 금방 갑니다.”
곽봉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물론 이의민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달랐다. 십상시 때야 상대할 적이 백 명도 안 됐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삼천이 넘는 적 진영에 홀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의민이 절대 무사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의욕과는 달리 벌써 지친 모습이다.
“헉! 허억! 젠장! 망할! 벌써 지치다니... 나도 벌써 늙었나? 하긴 서른이 넘었으니 훅 갈 때도 됐지. 하지만 아우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의민아. 조금만 기다려라. 이 형님이 간다.”
곽봉의 걱정과는 달리 이의민은 지금 매우 여유로웠다.
물론 아무리 이의민이라도, 그것도 젊은 전성기의 이의민이라도 홀로 삼천의 적을 상대하는 건 벅찬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냥 일 대 삼천의 싸움이 아니었다.
일단 적의 대장이었던 정팔이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서 적은 굉장한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상대는 정규군이 아닌 도적이었다. 백파적을 일반적인 도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정규군에 비해서는 무기나 장비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는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같이 싸우지 않는다 뿐이지 이의민의 뒤에는 토벌군이 있었다. 즉, 이의민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줘도 곧 같이 합류해서 싸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5채 도적들이 언제까지 혼란에 빠져있지만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점차 진영을 갖춰 이의민에게 대항을 하려했다.
“저놈에게 화살을 쏴!”
이의민을 한쪽으로 몰아넣고, 아니. 정확하게는 그를 피해 한쪽으로 도망친 후 방패를 세우고 그 뒤에서 궁병들이 활시위를 매겼다. 그냥 맞붙었을 때는 답이 없으니 화살로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오! 제법 머리를 쓰는구먼.”
현재 이의민에게는 대부 말고는 다른 무기나 장비가 없는 상황. 특히 대부는 검이나 도에 비해서는 화살을 쳐내기가 쉽지 않은 무기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여전히 여유롭기 그지없다.
피잉! 피잉!
이윽고 5채 궁병들이 화살을 쏘아댔다.
이의민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한 손으로 시체를 들어서 방패로 썼다.
물론 시체 하나로 덩치 큰 이의민 자신의 몸 전체를 방어해낼 수는 없었다. 도적들이 정확히 노리고 쏜 건 아니었지만, 시체로 가리지 못한 이의민의 신체부위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도 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들고 있는 시체를 움직여서 모든 화살을 다 막아냈다.
사람의 시체를, 그것도 건장한 사내의 시체를 드는 건 보통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도 버겁다. 그런데 이의민은 그런 시체를 한손으로 들고, 마치 종이 짝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것만 봐도 이의민이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 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5채 도적들은 그런 이의민을 보며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씨발...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리고 온 거야?”
이의민은 시체에 꼽혀 있는 화살을 하나 뽑았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5채 궁병들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5채 궁병들.
“서, 설마....?”
그 설마가 진짜 맞았다. 이의민은 화살을 들고 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화살을 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던지려는 동작이다. 화살은 일반적으로 던져서는 크게 위력을 낼 수가 없다. 활시위에 매겨야 살상력을 가지는 진정한 무기다.
하지만 이의민이 던지려고 하니 왠지 활로 쏜 듯한 위력을 낼 것 같았다. 그리고 5채 궁병들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커어억!”
이의민이 던진 화살은 정말 활로 쏜 것처럼 쏜살같이 날아와 5채 궁병 한 병의 가슴을 정확히 맞췄다. 그 화살에 맞은 궁병은 절명했다.
“으아아악! 괴, 괴물이다!”
그에 궁병들은 활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머지 도적들도 따라 도망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이어 보여주는 이의민에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5채 도적들이다.
그때 곽봉과 그가 이끄는 토벌군 군사들이 이의민의 곁에 도착했다.
“헉헉! 의민이! 후장군님! 괜찮나? 아니. 괜찮습니까?”
“흐흐! 답지 않게 뭘 또 존대시오? 그냥 편하게 하시오. 봉 형. 아무튼 여긴 대충 정리가 됐소. 저놈들을 추격해서 잡기만 하면 되오.”
이의민이 주는 공포가 너무나 컸던 것일까? 이 지형에 누구보다 익숙할 그들이 제대로 도망도 치지 못했다. 서로 도망치는 발에 얽히고설켜서 넘어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의민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도망도 치지 못하는 그들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이의민과 토벌군을 바라봤다.
“딱 오백 명. 오백 명만 살려준다. 우리도 포로를 많이 데리고 있을 수는 없어서 말이지.”
이의민의 말에 5채 백파적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끄응! 차라리 도망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포로로 잡는다고 해놓고 우리를 죽일 거야!’
전쟁이 끝났다면 여러모로 쓰일 데가 있겠지만, 끝나지도 않은 전쟁에서 포로란 보급품만 축내는 골치 아픈 존재다. 그리고 언제 뒤를 칠지도 모르는 존재기도 했다. 고대의 영웅 무안군 백기 역시 40만이 넘는 포로를 참살하지 않았던가.
결론을 내린 5채 백파적들은 다시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줄행랑쳤다. 물론 아예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의민과 가까이 있는 자들은 초식동물이 호랑이를 만난 것 마냥 극도의 공포감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탓이리라.
“좋다. 그럼 이제 숫자를 세겠다. 하나, 둘, 서이, 너이.... 에이! 귀찮다. 봉형이 좀 세시오.”
“응? 하하! 그러지.”
곽봉이 대충 오백을 추려내자 이의민이 남은 이들을 향해 다시 나지막이 말했다.
“나머지 놈들은 선택해라. 여기서 그냥 죽을지, 아니면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칠지.”
이의민의 말이 끝나자 나머지 5채 백파적들도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리고 마침내 황보숭의 본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