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2화 (12/175)

12. 백파적 (1)

병주 서하군 태행산 깊숙이 자리 한 백파곡.

백파적의 본거지이자 총채주 곽태가 머무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들은 낙양에서 토벌대가 자신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첩보를 진즉 입수하고 있었다. 거대한 집단인 만큼 제도인 낙양에도 많은 끄나풀들을 심어놨고, 심지어는 황궁까지 정보통이 있는 자들이다.

황명이 내려질 때부터 토벌 사실을 안 곽태는 백파적의 13채 채주들과 핵심 인물들을 총 집합시켰다.

총채주 곽태가 앉아있는 최고 상석 좌우로 세 명의 사내가 더 있었다. 곽태의 바로 오른쪽에 앉은 자는 2채주인 양봉이다. 왼쪽에는 3채주 한섬이 있었고, 그 왼쪽에는 남흉노의 선우 어부라가 있었다. 그들 4인이 사실상 백파적의 핵심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13채주들도 모두 탁자 하나를 빙 둘러싸고 자리를 잡았다. 여기 모인 이들은 저마다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총채주 곽태가 탁자를 내려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쾅!

“자자! 다들 들었겠지만 황제의 개들이 감히 우리를 토벌하겠다며 이곳 태행산으로 오고 있다. 이에 대해 다들 의견을 말해보도록.”

곽태의 나서자 잠시 조용해졌지만, 의견을 얘기해보라는 말에 이곳은 다시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질서 없이 여기저기서 입을 열고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댄다.

“총채주! 당장 우리 식구들을 총 동원해서 그 건방진 놈들을 전부 쓸어버립시다!”

“8채주! 미친 거 아니냐? 상대는 무려 6만이나 되는 대군이다. 반면 우리 식구들은 다 끌어 모은다고 해도 5만도 채 아니 되는데 상대가 되겠냐?”

“아! 뭐 차이가 별 크게 나는 것도 아니네! 게다가 여기 산신님들이 있는데 그깟 놈들이 뭐가 두려워서 그리 벌벌 떠느냐? 하여간 11채주, 저 쫄보 자식.”

“뭐? 쫄보? 지금 말 다했냐?”

“다했다! 이 쫄보 새끼야!”

“총채주님. 지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식구들부터 총집합시켜서 대비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10채주의 말이 옳습니다. 이 탁자 위에서 갑론을박해봐야 답이 나옵니까? 일단 식구들 전부 무장부터 좀 시키고....”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떠드는 통에 급 두통이 온 곽태. 그는 이마를 싸매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에게 당장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피곤하기만 했다.

곽태 옆에 있던 2채주 양봉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대신 탁자를 크게 내리치고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아! 좀 닥쳐! 자식들이 주둥이에 벌통을 처 물었나! 하여간 누가 도둑놈들 아니랄까봐 무식하게 목소리만 커가지고는....! 한 놈씩 한 놈씩, 차근차근 말하라고!”

“저... 도둑이면 더 조용한 게 정상이 아닐지....?”

“씨발! 닥치라고!”

“....!”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한 양봉은 바로 뒤에 호위처럼 시립해 있던 사람에 물었다.

“휴우! 서 장사. 서 장사는 어찌 생각하는가?”

비범한 덩치에 거대한 대부를 들고 있는 사내. 마치 호위처럼 보이는 자였다. 양봉이 서 장사라 부른 자는 양봉의 질문에 덤덤히 입을 열었다.

“병력은 분명 황군이 더 많지만, 대신 이곳은 우리 백파적의 안방입니다. 서로 간의 강점과 약점이 있으니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허나 이 말인즉슨 쉽게 이길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 형제들의 용맹을 믿지만,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흑산의 무리들과 연합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으음....”

서 장사의 의견이 마음에 그리 들지는 않는지 곽태는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남의 손까지 빌려서 적을 상대하자는 것이니 불만일 수밖에 없으리라. 곽태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 역시 서 장사의 의견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시끄럽게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그 이유는 양봉이 조용하라고 한 것보다 이 의견을 낸 자가 바로 서 장사였기 때문이다.

서 장사는 바로 서황이다. 그는 현재 채주도 아니고, 단지 2채주 양봉의 오른팔에 불과했지만, 여기 모인 그 누구도 서황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백파적도 그를 신력으로 당해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신력으로 유명한 7채주가 서황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었다. 당시 7채주는 백파적 내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7채주가 손도 쓰지 못하고 서황에게 개처럼 처 맞았다. 이후 모든 백파적들은 무력 일인자로 서황을 떠올렸다.

백파적 최고의 맹장이자 용장. 그것이 서황의 위치다.

모두가 서황의 눈치를 살피며 눈동자를 굴린다. 그때 채주들 중 한 명이 슬금슬금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5채주 정팔이었다.

“하하하... 서 장사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자고로 공은 나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손자의 말에 비추어 봤을 때, 흑산적과 손을 잡는 것은 이 전쟁만으로 본다면 분명 이득이 될 수도....”

길어지는 정팔에 말에 곽태가 다시 성질을 부렸다.

“아! 5채주! 이 새끼, 이거 또 시작이네? 뭔 혓바닥이 그리 기냐? 핵심만 말하라니까! 핵심만!”

곽태의 성질에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팔은 난처한 듯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설명을 이었다.

“그게.... 너무 간단하게만 설명을 드리면 제 진심이 곡해될 우려가 있는 바....”

“이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떠다닐 새끼. 혀를 뽑아줄까?”

노골적인 곽태의 으르렁거림에 정팔은 그제야 요약을 해주었다.

“아. 예! 예! 우리 손만으로도 손쉽게 이길 수 있는데, 굳이 흑산적에게 빚을 질 필요가 있겠냐는 뜻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 서 장사 말로는 승리가 불확실하다는데? 너는 어찌 우리만으로 쉽게 이긴다고 생각하냐?”

“당연히 그냥 싸우면 쉽지 않죠. 허나 제게 계책이 있습니다.”

“오오! 정팔이. 그래. 네가 머리 하나는 또 잘 쓰지. 말 해봐.”

“태행산 초입에서 백파곡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길을 최대한 어지럽히면 됩니다. 더군다나 적들은 산이 익숙하지 않을 테니 화살을 쏴도 힘이 부칠 것이고, 보급품을 받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에 반해 우리 형제들은 모두 산이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제가 세운 기가 막힌 계책을 몇 가지 실행시키기만 한다면....”

“아! 설명 그만! 자세한 건 됐고. 정말 그리 하면 우리가 쉽게 이긴다는 거지? 네 말 책임질 수 있겠냐?”

“믿어주십시오. 총채주님. 우리 5채 형제들만으로도 승리를 가져올 겁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럼 5채주만 믿는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리는 정팔. 그 모습에 백파적 모두가 그에게 기대의 눈빛을 보냈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리 하나만큼은 백파적 내에서 그가 최고였다.

**

“헉헉!”

“젠장! 벌써부터 이렇게 지치면...”

병주에 위치한 태행산. 백파적이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이의민을 포함한 제후들과 군사들은 간단한 출정식을 마친 후 곧바로 태행산으로 진격했다. 흑산적이 위치한 흑산보다는 태행산이 가깝기에 먼저 백파적을 토벌하기로 황보숭이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동원된 병사들은 대부분 중원지방이나 기주, 유주등에서 동원된 군사들이다. 즉, 병주의 험한 산세는 그들에게 낯설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쓰러진 나무나 길을 막고 있는 바윗덩이들이 많았다.

‘산길에 익숙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인데, 길은 또 왜 이 모양인지... 아무래도 대책을... 응?’

벌써 지친 병사들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던 황보숭의 눈이 커졌다. 마치 평지를 걷듯,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산을 오르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보숭의 시선을 받은 이는 당연히 이의민이다. 그는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 고려에서 살았다. 태행산 정도의 산길은 이의민에게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좌장군! 저기 적들이 보입니다.”

이의민의 말에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황보숭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그의 눈에는 두 눈동자를 가득채운 도적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하핫! 겁 대가리 없이 감히 산신님들의 땅에 발을 들여놓다니!”

백파적의 13채 중 5채의 채주인 정팔은 자신이 이끌던 5채 산적들을 모조리 끌고 나왔다. 물론 다짜고짜 토벌군과 맞붙으려고 나온 건 아니었다.

백파적의 규모가 크다지만 그래도 13채 중 하나인 5채의 병력은 이리저리 다 끌어 모은다고 해도 현재 토벌군 6만여 군사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채주 중에서는 나름 머리가 좋다고 여겨지는 정팔이었다. 그런 그가 당연히 부족한 병력으로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은 없다. 곽태에게 얘기한대로 나름 계책이 있었다.

정팔은 토벌군 군사들이 산채까지 올라오는 길에 바위를 옮기고 나무를 쓰러뜨렸다. 안 그래도 좁고 불편한 길이 더 험악해졌다는 뜻이다. 토벌군 군사들은 그 험악한 산세의 길에서 자신들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치우기 바빴다.

단순 불편한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좁아터진 산길이다 보니 많은 수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이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5채 산적들은 좁은 길을 한줄로 오는 지친 적들만 상대하면 되니, 수적우위도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건 단순 시작일 뿐이다. 정팔이 세운 18단계 계책을 본격적으로 실행시킬 차례였다. 안 그래도 힘이 빠진 군사들을 상대로 18단 계략이 실행되면 5채 백파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리라.

정팔은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 움직이는 토벌군 군사들을 보면서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됐다! 한줌의 변수도 없다. 저놈들은 모두 여기서 내 손에서 죽는다. 그렇게만 되면 내가 총채주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다.’

다른 산채들을 대신에서 위험부담을 안고 선봉에 나서는 것인 만큼, 차기 총채주 등극에 유리할 터였다.

드디어 토벌군 군사들이 예상한 지점에 도착했다. 토벌군 군사들은 대부분 예상대로 몹시 헉헉 대며 지친 모습이었다.

이제 기습을 가할 때다. 이제 18단계의 계책을 쓸 때였다. 정팔은 차기 총채주가 될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크하하핫! 이 멍청한 놈들아! 네놈들이 정말 우리를 토벌할 수 있을 거라고 이리 왔느냐? 나는 백파적의 5채주 정팔이라고 한다! 네놈들의 대장은 누구냐? 저승으로 보낼 땐 보내더라도 이름은 기억해주마!”

그런데 토벌군에서 선두에 선 자 한 명이 정팔을 보자마자 뭔가를 던졌다. 정팔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화살을 쏜 것도 아니고, 거리상 이곳까지 뭘 던진다고 올만한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크하핫! 멍청한 놈! 뭘 던진 거냐? 뭘 던졌든 그게 여기까지.... 어?”

순간 정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절대 날아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만 정말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도끼 하나가 맹렬히 회전하며 정팔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이것은 정팔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보통 전쟁을 시작할 때 군을 이끄는 자들끼리 서로 통성명을 나누는 것이 기본소양 아니던가. 하지만 상대는 자기소개도 없이 대뜸 도끼를 던졌다.

문제는 절대로 이곳까지 날아올 리가 없는 도끼가 정말 날아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르고 강력한 기세를 담고.

퍼퍼퍽!!

정팔은 머릿속에 준비했던 18단 계획들 중 단 한 단계도 실행시켜 보지 못하고 그렇게 이의민의 도끼에 머리가 쪼개져 절명하고 말았다.

“으아악! 채주!”

“채주가 죽었다!”

“젠장! 그럼 우린 이제 어쩌지? 다음에 뭐 하라고 했더라....? 십팔 뭐시기였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채주가 자기 말만 들으면 된다고 했는데... 아니. 지가 제일 먼저 뒤지면 어쩌라고?”

채주를 잃고 명령할 사람이 없어지자 5채 백파적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틈을 타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맹렬히 돌진해 들어가는 한 사내가 있었다. 바로 5채 채주였던 정팔을 죽게 만든 원흉. 바로 이의민이 대부를 들고 백파적들을 향해 홀로 돌진하고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