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1화 (11/175)

11. 황문시랑 (3)

곽봉의 집으로 향하는 세 사람. 곽봉이 중랑장으로 임명된 이후 첫 귀가였다.

지난밤에는 워낙 경황이 없기도 했고, 이른 아침 조회도 있어서 황궁 근처에 밤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곽봉의 집에 도착한 세 사람.

“그러고 보니 이름도 서로 제대로 모르는군. 나는 후장군 이의민이오. 자는 따로 없소.”

“우림중랑장 곽봉입니다.”

“공달이란 자를 쓰는 순유입니다.”

그렇다. 황문시랑은 순유였다. 삼국지 위서전에서는 그를 순욱, 가후와 같은 반열로 취급했다.

조비 시대의 사마의까지 포함한다 하더라도 능히 위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군사라는 뜻이다. 삼국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의민은 순유를 몰랐다.

곽봉이 직접 내오는 술상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차린 냥 안내하는 이의민이다.

“공달형이셨구려. 앉으시구려. 차린 건... 음... 정말 없지만 많이 드시구려.”

이의민을 향해 도끼눈을 한번 뜬 곽봉은 난처한 표정으로 초라한 술상에 대해 설명했다.

“미안하오. 황문시랑. 내가 중랑장이 됐다는 말을 듣고 마누라가 졸도를 하는 바람에 급하게 내가 차렸소. 뭐가 많이 없어도 좀 이해하시오.”

“괜찮습니다. 술만 있으면 되지 안주가 필요하겠습니까.”

이의민은 순유가 먼저 자신을 찾은 이유를 밝히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웬만큼 기다려도 순유는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술을 마실 뿐이었다. 결국 성격이 급한 이의민은 참지 못하고 먼저 본론을 꺼냈다.

“공무가 바쁘신 분이 정말로 술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슬슬 날 찾아 온 이유를 말해줘야 하지 않겠소?”

순유는 이의민의 질문에 살짝 침묵을 지키다가 운을 뗐다.

“오늘 후장군이 받은 황명. 그것이 후장군에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아십니까?”

“물론이오. 거기서 잘 만 하면 대사농인지 뭔지랑 청주자사까지 될 수 있지 않소.”

마치 최고공신은 당연히 떼 논 당상이라 생각하는 이의민의 자신감에 순유는 아무런 말없이 술을 한 잔 더 털어 넣었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라면 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무슨 힘으로 최고공신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하시는 건지요.”

“애초에 내가 좌장군 다음인데, 내게 가장 많은 공이 올 게 뻔하지 않소.”

“쯧! 그리 단순히만 보실 게 아닙니다. 토벌군 군사들은 모두 후장군의 군사들이 아닙니다. 후장군의 군사는 기껏해야 배정받은 황군 5천. 그에 비해 제후들은 그 10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장군과 제후들의 사이가 물과 기름 같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아무 계획 없이 갔다간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것이 뻔합니다.”

너무나 신랄한 순유의 지적에 이의민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일단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지적하는 자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해서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의민이 충격을 받았든 아니든 순유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후장군 스스로 관직이 제일 높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허나 관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얼마나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느냐 입니다. 고작 호분중랑장에 불과한 원술을 왜 아무도 못 건드리는지, 또 후장군임에도 왜 아무도 장군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장군께서는 분명 연유를 아셔야 합니다.”

순유가 말을 하면 할수록 이의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면서 말투도 자연스레 변했다.

“끙... 왜 갑자기 술을 먹자고 하냐 했더니... 날 조롱하러 왔군. 그래. 공달도 내가 우스워 보이는가?”

“하하. 설마하니 그런 이유로 왔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의민은 당장이라도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곽봉도 기겁할 정도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의민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물었다.

“그럼 뭔가 혜안이 있다는 말이군. 말해보시게. 내가 최고공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단합니다. 적을 내편으로 만들면 됩니다.”

이의민이 원래도 똑똑하진 않았지만, 지금 순유가 한 말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적을 내편으로?”

“그렇습니다. 장군께서 이번에 상대할 백파적과 흑산적 말입니다.”

이의민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순유를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백파적과 흑산적을 내편으로 만들 수 있냐는 듯한 질문이다. 순유는 이의민의 질문을 안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백파적과 흑산적은 하나의 거대한 단체가 아닙니다. 비슷한 곳에 자리한 도적들이 그냥 이름 하나로 묶이는 것이지요. 나름의 독자적인 세력도 있고 서로 반목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의 이의민. 그의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진중함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백파적과 흑산적 놈들을 단순히 토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내 세력으로 만들어라. 정말 지랄 맞게도 어려운 일이군. 솔직히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장군이 최고공신이 되기 위해선 그 어려운 일을 해내셔야 합니다.”

아까 전의 화난 기세는 온데간데없는 이의민.

“허헛. 공달은 내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의민은 술병에 남은 술을 모조리 털어 넣고는 순유를 지긋이 바라 봤다. 마치 네가 나에게 왜 이런 조언을 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칼을 갈고 닦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목표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의 실행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칼을 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자가 몇 년을 준비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그것도 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꺼내 듯 쉽게 해결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지요. 남자는 생각했습니다. 영웅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 영웅이 아닐까... 라고 말이죠.”

“십상시 이야기를 하는 것이군...”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었는지 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 세상에 나왔으나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감히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공달의 말이 맞네. 나는 아직 세상을 잘 몰라. 내게 끊임없이 바른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하나 물어보지. 이번 병주 원정을 잘 마치고 돌아온다면 공달이 그런 사람이 되어 줄 텐가?”

이의민의 말에 순유는 아무런 말없이 읍을 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공손함을 잔뜩 담아서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의민은 웃으며 마주 읍을 했다.

**

어느덧 황제가 얘기했던 토벌군 원정 날짜가 다가왔다.

대장군 하진 주제 하에 출정식이 치러졌고, 토벌군은 낙양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하로 향했다. 일단 황하를 건너야 병주로 갈 수 있다.

“의민이. 배는 탈 만한가? 나는 예전에 배를 제법 타봐서 괜찮지만, 처음 타면 멀미를 좀 할 텐데?”

곽봉의 말대로 배를 처음 타는 군사들 상당수가 뱃멀미를 하며 고생을 하고 있다.

이의민도 배를 탄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선천적으로 뱃멀미를 하지 않는 편인지 다른 이들과 달리 별 이상이 없었다.

“흠... 난 전혀 이상 없소. 게다가 생각보다 강이 그리 큰 거 같지는 않으니 금방 건너가겠군.”

“흐흐. 다행이구만. 확실히 이쪽 수로는 폭이 그리 넓지 않아서 괜찮을 거야. 장강 같은 곳은 뱃멀미 심한 사람은 건너지도 못한다고 하더군.”

“장강이 그리 크오?”

“예전에 내가 배를 탔었을 때, 장강에서 탔었지. 정말 여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넓다네.”

이의민과 곽봉이 시시콜콜한 얘기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하하! 두 분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도 좀 끼워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강을 건너는 동안 이 지루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고역입니다만....”

“오! 맹덕형. 어서 오시구려.”

이의민과 곽봉에게 접근한 사람은 조조였다.

“강바람이 참 참으로 시원합니다.”

“나야 뭐 말동무 하나 더 늘어나서 좋기는 한데... 그대는 여기서 우리와 이리 말을 섞어도 괜찮소?”

“도적토벌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인데, 네 편 내 편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조심하셔야 할 사람은 장군이시지요.”

“내가 무얼 조심해야 한단 말이오?”

“후후. 공로형이 이번 원정에서 반드시 장군을 죽일 것이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라 말이지요.”

“허어! 감히 중랑장 주제에 후장군인 나를 죽이겠다고?”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이의민이지만 며칠 전 순유와 나눴던 얘기가 생각났다. 정말 이 배위에서 갑자기 원술과 싸운다면 지는 쪽은 아마 후장군인 자신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의민 본인의 신병이야 어떻게든 피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세력에서는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것에 쫄 이의민이 아니다.

“하! 제까짓 게 나대봤자지. 그럼 원소도 마찬가지로 날 죽이려 칼을 갈고 있겠구려.”

그런데 조조는 원소 얘기에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본초형은 조금 다릅니다. 본초형도 본래 후장군을 죽이고 싶어 했으나, 이제 후장군은 그의 관심사에서 조금 멀어진 모양새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는데도 왠지 무시 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살짝 나쁜 이의민.

“그럼 그자는 무얼 관심가지는 것이요?”

“본초형의 현재 관심사는 어떻게 해서든 최고공신이 되냐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 그것 때문에.... 하긴. 원술 그놈이 이상한거지.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쯧쯧!”

잠시 혀를 찬 이의민은 잠시 원소를 떠올렸다. 과연 그와 맞붙는다면 그를 제치고 최고공신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조조는 그런 이의민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후훗!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이미 원소는 교모나 왕광 같은 세력이 약한 제후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놈들은 욕심이 없소? 그렇게 붙어먹는다면 최고공신 자리는 결국 원소에게 줘야 하는 것 아니오?”

“그들은 현실적으로 최고공신이 되기 힘듭니다. 아니. 일등공신이 되기도 벅차지요. 그러니 최소 일등공신의 자리는 보장해준다고 하는 원소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소를 중심으로 일종의 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미 제후들 중에는 그를 맹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것이 원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이 옹졸하고 편협하긴 하나, 사람을 끌어안는 데는 정말 귀신같은 사람입니다.”

조조의 설명에 곽봉이 감탄을 터뜨렸다. 곽봉은 조조가 전형적인 부모 잘 만난 도련님인줄 알았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그가 지금의 위치까지 간 것은 부모 빨보다는 그의 능력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조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는 이의민도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라는 것인가? 확실히 범상치 않군.’

“그런데 맹덕형 역시 저들과 한편 아니오? 나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오?”

“후장군께서 이 사람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군요. 원소와 원술 두 사람의 힘이 강해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장군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배는 어느 덧 황하 건너편인 하내군의 영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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