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0화 (10/175)

10. 황문시랑 (2)

모든 제후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궁을 빠져나갔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담소를 나누는 자가 있는 가하면 예리한 눈빛으로 황궁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이도 있었다.

“교모형!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으시오? 하하! 아까부터 계속 황궁만 보시던데. 어디 가서 그러다 촌놈소리 듣습니다.”

포신이 가벼운 농을 건네며 다가왔지만 교모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포신형.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황궁의 경비병 말이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 수가 적은 것 같은데?”

“십상시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탈영하고 지방으로 도주한 이들이 많다고 들었소. 그것 때문이 아니겠소?”

“흐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궁의 경비가 이 정도라....”

교모는 부실해 보이는 황궁 경비를 보며 발칙한 상상을 하는 중이었다. 정말 황문시랑의 말대로 생각하는 제후들이 있다는 뜻이다.

교모처럼 황궁을 보며 장고의 시간을 갖는 제후가 있는가 하면, 앞서 가는 원술의 뒤통수를 조용히 노려보는 제후들도 있었다.

‘아오! 저 새끼 때문에....’

논공행상을 빨리 끝마치고 각자 영지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 제후들은 원술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원술 때문에 내일 조회까지 참석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뒤통수에 쏟아지는 눈초리를 원술은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속으로 열불을 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고작 보사였던 놈이 이제는 나보다 더 높은 후장군이 되다니... 이 자식을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잠에 빠지기 직전까지 그를 생각하면서 이를 바득바득 가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원술이다.

다음 날, 낙양에 있는 제후들은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황궁으로 발걸음을 했다. 최대한 빨리 짐을 싸서 돌아가고 싶은 자들도 있었지만, 오늘 조회에서 과연 무슨 얘기들이 오갈지 궁금해 하는 자들도 많다.

원술은 그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이의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원술의 표정은 어제보다는 살짝 밝아져 있었다. 어제 생각보다 꿀잠을 자서일까? 아니다. 지난밤, 날이 새도록 이의민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고 잠을 설쳤다.

그런데도 원술의 표정이 밝아진 것은 생각해보니 오늘 드디어 이의민을 골탕 먹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꿈이 이의민을 잡아 죽이는 것에서 골탕 먹이는 것으로 크게 하락한 셈이지만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아픈 코를 부여잡으면서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생각해보니, 조회 때 그놈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으렷다? 그런 것 따위는 해봤을 리가 없는 보사 나부랭이였으니.... 조회도 모르는 놈이 후장군이라니, 어림없지. 오늘 한번 제대로 망신을 당하겠군.’

원술의 생각에 이의민은 당연히 조회에 대해서 모를 거라 여겼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단계를 밝고 승진한 경우도 아니다.

친지나 주변 지인들도 무지렁이일 테니 조회 같은 걸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기존의 신료들 역시 갑툭튀한 이의민에게 일일이 알려줄 리는 없을 테고 말이다.

‘후장군이 됐다고 기뻐하며 그 우림중랑장 놈과 같이 술이나 진탕 마시다가 뻗었을 가능성이 높지. 감히 건방지게 내게 명을 내려? 오늘 욕 제대로 처먹고 후장군의 자리가 결코 만만찮다는 것을 제대로 느껴라.’

원술은 이의민이 뒤늦게 조회에 도착하여 많은 신료들에게 무언의 욕을 쳐 먹는 광경을 떠올리며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전에 도착하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늦었군. 좀 빨리빨리 다니지 아니 하겠느냐? 고작 중랑장이라면 알아서 사방장군보다 일찍 와야 하는 것 아니더냐?”

이의민은 놀랍게도 웬만한 제후들보다 훨씬 일찍 어전에 도착해 있었다. 원술의 예상대로 누구하나 그에게 조회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의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려나 한나라나 황궁의 예법은 사실 크게 다를 게 없었고, 고려 시절 때 신하로서 최고의 위치인 문하시중까지 오른 그가 조회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이런 씨발! 하나부터 열까지 되는 게 없구나.’

원술은 다시 코를 부여잡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프지 않던 코가 갑자기 아려왔기 때문이다.

“그럼 폐하께서 오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슬슬 자리를 잡지. 네 자리는 여기 어디쯤이겠군. 아쉽지만 조회 때는 얼굴 보기 힘들겠어. 네놈과 나의 거리 차이는 어마어마하니 말이지.”

이의민은 조회 때 품계에 따라 서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이의민을 제대로 골탕 먹이려던 원술의 꿈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다.

‘빌어먹을! 어떤 머저리 새끼가 저놈에게 저런 것까지 가르쳐 준 거야?’

모든 신료들과 제후들이 자리를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등장했다.

황제는 어전에 모여 있는 신료들과 제후들을 한번 쭉 둘러본 후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꺼냈다.

“흑산적과 백파적이라는 도적떼들이 나타나 병주 일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하오. 해서 짐은 토벌대를 보내려 하오. 허나 황궁의 병력만으로는 부족하오. 그래서 짐은 여기 있는 충신들에게 병주의 도적들을 토벌할 것을 명할까 하오.”

황제는 이 말을 오늘 조회에서 꺼내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을 연습했다. 제후들에게 위엄을 보여야 한다며 하태후가 잠도 재우지 않고 연습을 시켰던 것이다. 고작 황명 하나 내리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유변은 위엄이 없는 황제다.

과연 조회때 무슨 얘기가 나올지 기대하고 걱정하던 제후들의 표정이 굳었다. 제후들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명이었다.

황제의 군사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제후들이 그동안 열심히 모아왔던 자신들의 병력을 써야하는 것이니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명성을 크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황건적은 그나마 전국적인 난이었기에 황건적 퇴치에 어느 정도 공을 세웠을 경우에 얻게 되는 명성과 실리가 엄청났다. 하지만 흑산적과 백파적은 병주에 숨어있는 도적들이다.

해결한다고 해봤자 고작 병주의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게 다일 터. 게다가 황제의 군사들이 주 병력으로 참전하는데, 다른 제후 경쟁자들까지 많다. 공을 세운다고 해도 압도적인 공적이 아니라면 생색을 내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들이는 노력과 손실은 많지만 얻는 것은 적은, 일종의 자원봉사나 마찬가지였다.

제후들은 황명을 듣고 모두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어찌 해야 최대한 찍히지 않고 황명을 거절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어진 황제의 얘기에 거절만 고민하고 있던 제후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물론 토벌에 그냥 군사를 내어달라는 건 아니오. 이번 병주 토벌전의 공과에 따라 큰 포상이 있을 것이오. 특히 가장 많은 공적을 올린 일등공신, 그 중에서도 으뜸 되는 자는 대사농에 임명하고 청주자사를 겸하게 할 것이오.”

황제의 말에 모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들의 눈에 나타난 빛은 탐욕의 빛이다.

‘까다로운 토벌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보상이 걸려 있다니....’

흑산적, 백파적 토벌. 아무런 보상이 없을 때는 결코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대사농과 청주자사가 함께 걸려 있다면 분명 얘기가 다르다. 그만큼 큰 보상이었다.

일단 대사농은 무려 삼공의 바로 아래 있는 구경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그 자체만으로 얻게 되는 명예가 엄청나지만, 각종 세금과 곡식을 총괄하는 위치다. 명예와 더불어 실리까지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

거기에 청주자사까지 겸한다. 대사농에 비해 무척 격이 떨어지는 지방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자사가 되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생각보다 무척 컸다. 무엇보다도 지방에 박혀서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기엔 자사나 태수만한 게 없었다.

그런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관직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만 하던 제후들도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원소의 심장이 크게 벌렁 거렸다. 그는 기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며 기주자사 한복과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병주 토벌전으로 만약 그가 청주자사가 된다면 한복과의 다툼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기주에 있는 원래 그의 병력뿐만 아니라 청주의 병력까지 끌어다가 쓸 수 있으니, 한복을 상대로 순식간에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한복의 세력까지 흡수하고 기주와 청주, 두 주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병주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임은 불에 보듯 뻔하다.

이어서 황제는 1등 공신, 2등 공신, 3등 공신의 보상에 대해서도 줄줄이 읊었다. 그에 원소처럼 최고 공신 또는 1등 공신이 될 가능성이 높은 제후들뿐만 아니라 2, 3등 공신을 노리는 자들도 눈을 빛냈다.

황제가 말한 대로라면 1등 공신뿐만 아니라 2, 3등 공신의 보상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어쨌든 이번 토벌전에서 공신으로 임명만 된다면, 자신들의 세력을 더 크게 키울 기회였다.

제후들은 각자 계산을 마치고는 토벌을 거절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제후들 중 가장 먼저 원술이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어제 황제에게 호통을 치고 욕을 먹은 것도 만회할 겸이다.

“폐하! 폐하의 상심이 그리 크신 줄 이 어리석은 신이 짐작도 못하였나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심려 놓으소서. 신들이 최선을 다해 그 도적놈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겠사옵니다.”

원술이 먼저 나서니, 나머지 제후들도 너도나도 나서서 황제에게 읍을 했다.

“폐하! 심려 놓으시옵소서!”

모두가 원술을 따라 폐하만 부르짖고 있을 때, 조조가 슬쩍 나서서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폐하!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사온데, 황궁에서 나서는 장수는 누구이옵니까?”

“좌장군 황보숭이 총대장이며 그가 경들의 공과를 판단할 것이오. 그리고 실질적인 금군은 후장군 이의민이 이끌 것이오.”

황제의 대답에 제후들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이의민이 후장군에 임명된 것도 황당한 일인데, 이제는 그의 명을 들어야 할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들은 곧 표정을 고쳤다.

이의민이 자신들의 계산에 별 변수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제는 마지막 당부를 내리고는 조회를 끝냈다.

“출정은 앞으로 나흘 후요. 황실의 위엄과 병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는 일이니 모쪼록 잘 준비해주길 바라오.”

퇴청하는 제후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부하들과 병장기를 점검해야 했다. 모두 이번 병주 토벌전에서 공과를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됐다.

반면 이의민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어전을 빠져나왔다. 옆에서 곽봉이 투덜대는 걸 들으며 말이다.

“아! 젠장! 이제 중랑장 달았으니 편하고 즐거운 생활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고작 도적 토벌가지고 그러시오?”

“고작이라니? 흑산적과 백파적은 단순 도적이 아니라고!”

“그래봤자 도적떼들이 뭔 대수라고.... 그런데 병주가 대체 어디 붙어있는 곳이요? 이틀 정도면 후딱 처리되겠소?”

“아! 이거 무식한 줄은 알았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후장군이라는 놈이 병주가 어딘지도 모르냐? 여기서 곧장 황하를 건너면 나오는 가까운 곳이 병주라고는 해도 이틀이라니? 가는 데만 적어도 이틀은 걸릴 텐데....”

한나라에 비해 매우 좁은 고려에서 살았던 이의민으로서 제법 충격이다.

“가는 데만 이틀이나? 그런 곳이 가깝다고....? 하여간 이 무식하게 큰 중원 땅덩어리는.... 그런데 수상하군. 조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똥 씹은 표정을 짓던 놈들이, 다들 저리 열정적이라니.... 그 대사농? 구경인지 뭔지 하는 게 그리 높은 벼슬이오?”

“하! 말을 말자. 구경이 높은 벼슬이냐니.... 황제폐하 밑에 승상, 승상 밑에 삼공이 있고, 그 밑에 있는 것이 바로 구경이다. 이놈아.”

“에이! 그럼 별로네. 벼슬이야 승상이나 대장군이 아니면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니오?”

“거, 거기서 거기? 이런 미친 놈.... 내가 살면서 너만큼 골 때리는 놈을 본 적이 없다.”

“흐흐! 됐고. 간만에 형님 집에서 술이나 마십시다.”

그들이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집으로 가는 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술, 나도 좀 얻어 마실 수 있겠소?”

복장을 보니 전형적인 문사 차림을 한 사내였다. 이의민은 그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의민은 태생적으로 문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항상 무관보다 관직도 높았고 언제나 무관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있었던 무신정변 역시 거기에서 비롯되었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의민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문관이 싫다고 해서 고려처럼 아예 내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고려시절 문하시중이 되고 나서 깨달았다. 국정을 운영하는 데 문관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이번 생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포용할 생각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는 이의민. 살짝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미 구면인 상대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했더니 황문시랑이셨구려. 술은 많으니 같이 가시오.”

바로 황문시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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