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9화 (9/175)

9. 황문시랑 (1)

모두 멍한 표정으로 황제가 임명한 후장군과 우림중랑장을 쳐다봤다.

이의민, 곽봉과는 구면인 제후도 있었고, 처음 보는 제후들도 있었다. 하지만 구면인 자들과 구면인 아닌 자들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의민과 구면인 원소와 원술, 조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원소와 원술은 이의민과 곽봉을 잡아 죽이기 위해 낙양 외성을 이 잡듯 뒤졌다. 그렇게 찾았던 이의민이 이제는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장군직을 사사받게 됐다. 그 꼴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눈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의민과 곽봉을 모르는 제후들이 놀라는 이유는 조금 달랐다.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이가 후장군에 오른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 이의민과 곽봉의 복장은 누가 봐도 말단 병졸인 보사의 복장이었다. 즉, 원래 보사였던 자가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고 순식간에 후장군에 오른다는 얘기였다.

보사가 중랑장에 오른다는 것만 해도 눈이 뒤집힐 정도인데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이라니. 그들로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모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의민과 곽봉의 임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황제가 직접 사사한다는데, 당장 따지고 들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그때 황제 앞에서도 앞뒤 없이 나서는 한 명의 제후가 있었다. 다름 아닌 누구보다 이의민에게 맺힌 게 많은 원술이었다.

“이, 이것은 말도 아니 됩니다!”

제후들의 시선이 이제는 이의민과 곽봉에서 원술 쪽으로 옮겨갔다. 원술과 가까이 붙어있던 원소와 조조 역시 경악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들도 원술이 황제 앞에서까지 이리 분노를 토해낼 줄을 몰랐다.

그들은 황제 앞이라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니 대신 눈빛으로 원술을 말렸다.

‘젠장! 공로! 제발 나서지 마라!’

‘하! 안 돼! 공로 형! 이런 망했군....’

그들뿐만 아니다. 수많은 제후들이 눈을 빛내며 원술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눈빛에 찔려 죽을 정도다. 하지만 원술은 그 눈빛들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 계속해서 황제에게 외쳤다.

“폐하! 절대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고작 보사를 후장군으로 승진시켰다는 말은 고금을 통틀어 역사가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사방장군을 그렇게 쉽게 임명하시면 이는 폐하 스스로 관직의 엄격함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황실의 위엄을 낮추는 꼴이라는 걸 진정 모르시옵니까? 부디 종묘와 사직을 생각해서 다시 재고를 해주십시오.”

원술은 황제에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에 핏대가 세워져 있었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황제 앞에서 고작 중랑장인 원술의 무례한 언행.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을 행동이다. 하지만 작금의 한나라 황제인 유변은 아무 힘도 없는 어린 황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원술의 이 행동은 분명 선을 한참 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원가가 강대하다고는 해도 이곳은 황궁이다. 원가를 견제하는 다른 제후들에게도 좋은 먹잇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술은 그런 것 따위는 순간적으로 다 잊을 만큼 흥분했다. 그만큼 절대 이의민이 후장군이 되는 꼴을 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원술로서는 그토록 잡아 죽이고 싶던 상대가 저 높은 자리로 올라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기필코 이의민의 후장군 임명만은 막고자 목에 핏대를 세우는 원술. 그런 서릿발 같은 원술의 기세에 황제는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으... 지, 짐은....”

하지만 황제의 측근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나선 이는 광록대부 주준이다.

“감히! 원술은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네놈이 명문가의 자제라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감히 폐하께 그따위 태도로 목소리를 높이다니?! 이제는 황실까지 업신여기느냐?!”

주준이 몹시 화난 얼굴로 원술을 다그쳤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좌장군인 황보숭이 이어 원술에게 호통을 쳤다.

“호분중랑장은 이 무슨 추태인가?! 나중에 상소를 올리던가, 어전에서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기회가 있는데도 이 자리에서 폐하를 다그치려드는가!”

주준에 이어 황보숭의 호통까지 연이어 황궁을 쩌렁쩌렁 울리자 잔뜩 흥분했던 원술도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무리 최근 황실의 힘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가의 힘이 크더라도 상대는 황제였다.

그리고 황제의 곁에 있는 황보숭이나 주준 역시 원술이 우습게 볼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가와 같은 세력은 없지만, 오랫동안 황실을 보좌하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거물이었다.

그제야 원술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납작 엎드렸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뒤이어 원소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주준이 원가와 관련된 말을 했기 때문에 그 역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제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과한 행동을 했사옵니다. 폐하. 신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지, 짐은 괜찮소...”

원소의 말에 황제는 몸을 떨면서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제가 들어간 이후 어색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주준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후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많이 놀라신 거 같으니 오늘 예정된 어전 회의는 내일로 미루겠네. 다들 내일 조회에서 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주준 역시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어전 앞은 제후들과 몇몇 대신들만 남아있는 상황. 원술은 이를 갈며 이의민 쪽을 쳐다봤다.

이의민은 원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원술에게 다가왔다. 분에 겨워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원술에게 나지막하게 말하는 이의민.

“거 참. 내가 너무 심했나? 미안하군. 크흐흐. 그러게 좀 적당히 나대지 그랬더냐?”

“컥! 지금 나에게 나, 나댄다고 한 것이냐?!”

“이 놈 보게. 고작 중랑장이 후장군에게 반말 하게 되어 있느냐?

계급으로 확실히 찍어 누르는 이의민. 원술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고 싶었지만 황제를 만나는 자리라 이미 도검은 모두 놔두고 온 상태였다.

이의민은 그런 원술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태연스레 그의 옆을 지나쳐가며 마지막까지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호분중랑장. 이제부터는 좀 자중하도록! 아까도 감히 폐하 앞에서 말이야. 아! 이것은 단순한 충고가 아닌 명령일세.”

원술은 그런 이의민의 뒷모습을 죽어라 노려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

내전으로 돌아간 황제의 표정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십상시가 죽고 난 이후의 모든 상황이 두려웠다. 감히 황제를 겁박한 원술에게 벌을 내리라는 명도 내릴 수가 없었다.

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태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황제를 품에 안았다.

“오오! 괜찮은 것이냐? 내 아들!”

“두렵습니다. 어머니. 이 자리에 있기 싫습니다. 크흑!”

“약한 소리 하지 말거라.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더 위험해진다.”

하태후가 황제를 어르고 달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주준이 들어오며 황제의 안부를 물었다.

“폐하! 얼마나 놀라셨사옵니까? 괜찮으시옵니까?”

“주준 장군. 짐이 대체 어찌해야겠습니까? 제발 알려주시오.”

“원술은 감정에 격해져 그랬을 뿐, 역적은 아니옵니다. 그가 황실에 칼을 뽑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주준 역시 원가와 대놓고 싸울 생각은 없었다. 특히 원술과 같이 온 원소는 떠오르는 신예였다. 전설로 남을 6년 상을 치른 후에는 모든 유자들과 사대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 주준이나 황보숭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괜히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

아까는 황제에 대한 태도 때문에 주준도 너무 화가 나서 다그쳤지만,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주준의 말에 황제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런데 어디선가 또 황제의 불안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외람된 말씀이나 원술이 문제가 아니옵니다.”

이번에는 황문시랑이다. 그는 하진에게 물었다.

“대장군, 십상시들을 처단하기 위해 제후들을 불러 모으셨다고 하셨습니까?”

“그, 그렇지. 내 의지는 아니었다네. 원소 놈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아무런 희생자도 없이 일을 해결했단 말일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방에서 제후들이 힘을 모아왔고, 터트릴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곳에 모인 거대한 힘이 그냥 소멸하진 않습니다. 그들은 허무한 마음에 힘을 터트릴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제는 지금 황문시랑이 하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뭔가 위험하고 불길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자, 잠깐 황문시랑. 좀 쉽게 말해주시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최악의 경우엔 그들이 황실에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뜻이옵니다. 만약 지금 당장 그들이 반역을 한다면 황실은 막을 힘이 없사옵니다.”

모두가 크게 놀란다. 특히나 태후가 대경실색했다.

“뭐, 뭣이?! 오라버니 어쩌면 좋습니까? 지금까지 황문시랑의 예측은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황문시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나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게 무엇인가?”

“최근 병주에 백파적과 흑산적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들 자체도 문제지만 혹시나 흉노와 손을 잡을까 그게 걱정이라네. 그런데 그것과 여기 있는 제후들이 무슨....? 설마?!”

“그렇습니다. 그 도적 무리들과 제후들을 한꺼번에 처리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제후들의 작위를 올려주고, 그들에게 병주의 도적들을 정벌하라 명하십시오. 정벌에 성공하면 공에 따라 높은 관직과 금은보화를 약속하시고 공신으로 임명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명예와 재물에 눈이 멀어 감히 반역을 꿈꾸지도 못할 것입니다.”

황문시랑의 설명이 끝나자 주준과 황보숭 등은 크게 기뻐했다.

“오!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황문시랑의 지혜는 매번 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려.”

“하하! 참으로 신묘한 생각입니다. 제후들의 힘을 돌리면서 황실의 골칫덩이도 해결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닙니까?”

황제 역시 황문시랑의 묘책에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쳐냈다.

“역시 황문시랑 밖에 없소. 덕분에 짐이 한시름 놓을 수 있겠소.”

그런데 정작 이 묘책을 낸 황문시랑은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는 표정이다.

“허나 폐하께서 종묘사직을 지키려면 하나 더 명을 내려주셔야 하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뭐든 말해보시구려.”

“이번 병주 원정에 새로 임명하신 후장군을 반드시 포함하셔야 하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