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8화 (8/175)

8. 벼락 출세 (3)

이의민은 무덤덤한 눈으로 내성 성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봤다. 이제 곧 자신들을 내성 쪽으로 쫓기게 만들었던 인물들과 다시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들에게 쫓겨서 몸을 숨겨야 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의민과는 다르게 곽봉은 아직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원술과 같은 중랑장이라는 직위를 받았고, 아우인 이의민은 그보다 훨씬 높은 후장군에 올랐지만 원래 말단 병졸이었던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의민은 그런 곽봉의 기색을 눈치 채고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형님. 뭐 그리 걱정이 많으시오? 이제 그놈들에게 전혀 쫄 필요가 없소. 그리고 내가 옆에 있잖소.”

곽봉은 이의민을 슬쩍 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네가 옆에 있는데 겁날 게 무어냐.”

처음 곽봉을 괴롭히던 내성 병졸들을 때려눕힐 때만해도 비범하다는 건 알아봤지만, 십상시들을 살육할 때 확실히 알았다. 이의민이 정말 어마어마한 괴물이란 것을.

그런 이의민이 옆에 있다는 건 단순히 후장군, 우림중랑장 같은 높은 관직을 받은 사실보다 더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이제는 곽봉도 어깨를 펴고 이의민 옆에 나란히 섰다.

내성 성문이 완전히 열렸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있다.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는 자들은 역시 이의민도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후훗! 다 아는 사람들이구먼.”

그리고 그들 역시 이의민을 발견했다.

그들이 짓는 표정은 매우 다양했다. 어떤 자들은 한가득 의문을 품기도 하고, 어떤 자는 뭔가 반가운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폭발하기 직전의 분노를 머금고 있는 자도 있었다.

당장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각각 이리 말하는 듯했다.

‘어찌 네놈들이 여기 있느냐?’

‘하하! 자네들이 여기 있었군! 낙양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 죽일 놈들! 드디어 만났구나! 내 반드시 네놈의 살가죽을 벗겨서 장을 담그리라.’

대부분 이의민을 보며 속으로 이런 얘기들을 했지만, 단 한 사람은 속마음만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코를 부여잡고 있는 원술은 낮게 이를 갈며 이의민과 곽봉에게 다가갔다.

이 자리는 대장군이 있는 자리다. 아무리 원가의 원술이라도 대장군인 하진과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술은 그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하진의 존재도 잊고 멋대로 이의민과 곽봉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하진은 그런 원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울고 불며 살려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이리 여유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그래. 네놈의 소원대로 죽여주마. 허나 바로 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적어도 네 입으로 직접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죽지도 못할 거다.”

원술은 엄청난 분노를 담아서 이의민에게 엄포를 놓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제발 살려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저번처럼 줄행랑이라도 쳐야 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시종일관 미소를 달고 있었다.

심지어 귀찮은 듯 귀까지 후벼 파며 분노한 원술을 오히려 조롱했다.

“후우! 대체 뭐라는 거야? 형님. 저 놈 말 알아듣겠소?”

처음에는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아우인 이의민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곽봉이다. 그 역시 아무 거리낌 없이 이의민의 장단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글쎄...? 뭐 가만 안둔다고 하는 거 같기는 한데? 이거 발음이 새니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이게 다 의민 너 때문이다. 그러게 사람 이빨을 그리 박살내면 어찌 하느냐? 적당히 코만 부셔도 되지 않았느냐? 쯧쯧! 앞으로 밥도 제대로 못 먹게 생겼네.”

이의민과 곽봉의 연속 조롱을 듣고 원술의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이... 이.... 죽일 놈들이....!”

급기야 그 자리에서 칼까지 뽑으려 하는 원술. 그때 원소가 급히 달려와 원술을 말렸다. 대장군인 하진 앞에서 멋대로 움직인 정도는 명문가인 원가를 방패삼는다면 어느 정도 무마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하진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 하지만 칼을 뽑고, 피까지 본다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된다.

“공로! 그만해라!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

“본초형! 그럼 내가...! 사세삼공 원가의 자제인 이 원술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그냥 참고 있으란 말이오?”

“누가 참으라고 했더냐. 다만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 앞에 누가 있는지 정녕 잊었다는 말이냐?”

원소의 말에 원술도 그제야 하진을 보고는 분루를 삼키며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지금 원소와 원술은 전혀 모르는 것이 있다. 아마 그 칼을 뽑아 휘둘렀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숨이 달아나는 자가 누구인지 말이다.

원소는 원술을 뜯어 말리고 이의민을 노려보았다. 비록 자리가 자리인지라 원술을 말리긴 했으나 그 역시 이의민을 죽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평소에 원술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어쨌든 같은 원가였다.

원가의 사람이 이름 모를 잡배에게 얻어터진 것이다. 이는 원가가 수치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원소 입장에서도 반드시 잡아서 보복을 해야 할 일이다.

‘운 좋은 놈. 허나 두고 보아라. 네 운도 이 자리를 끝으로 끝날 것이다. 지금까지 받은 수모를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전부 되돌려 줄 터이니.’

원소는 분노를 억누르고 하진에게 가서 군례를 올렸다. 속으로는 하진을 어찌 생각하든지 조금의 흠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군례를 올리는 그다. 역시 그는 원술과는 다르게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다.

“사례교위 원소가 대장군을 뵙습니다. 계획하셨던 일은 뜻대로 되셨습니까?”

“오! 사례교위인가?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네. 모두들 들어라. 그동안 나라를 좀 먹던 도적들은 오늘부터 없다. 그들은 모두 나 대장군 하진의 검 아래에 쓰러졌다.”

“우오오오!!”

하진의 선언에 모든 군중들이 크게 환호했다. 물론 그 전에 온 전령에게 이미 상황을 전달 받았지만 대장군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언이니 또 감흥이 달랐다.

“하하하! 빌어먹을 십상시 놈들이 모두 제거 됐다니! 이제야 내 속병이 다 나은 거 같군.”

“흐흐! 그 변태 놈들이 사라지는 세상이 드디어 오다니.... 공기도 맑아진 것 같네.”

“내 말이 그 말일세. 이제 황실이 안정되고, 한나라는 다시 예전의 광영을 찾을 거야.”

대부분 십상시 처단에 대해 자축하며 기뻐하고 있는데, 곽봉은 하진을 보며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의민에게 속삭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씨발... 대장군, 저 머저리는 한 게 아무 것도 없잖아? 누가 들으면 자기가 다 죽인 줄 알겠네.”

곽봉은 이의민 덕분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올 만큼 나왔다. 물론 속삭임이었지만 평소라면 감히 입 밖으로 뻥긋하지 못할 말을 과감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음을 띠었다.

“흐흐!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소?”

고려에서 최고 권력자의 위치까지 가본 이의민이니 이 바닥의 생리는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십상시에 대한 공을 하진이 빼앗아간다고 쳐도, 어쨌든 후장군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니 충분히 만족한 이의민이다.

“자! 오늘 같이 즐거운 날 다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진이 십상시 처단을 기념하여 연회라도 준비한듯했다. 이때 원소와 원술의 눈이 빛났다. 하진이 연회를 열기 위해 돌아갈 때가 기회다. 드디어 이의민과 곽봉에게 피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원소와 원술.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외쳤다.

“황제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십상시들을 처단하고 나라의 우환을 제거해주신 대장군을 크게 치하하시고자 합니다. 여기 계신 제후분들과 함께 모두 황궁으로 드시란 황명이옵니다.”

“오오! 폐하께서 알아주시는구나. 하하! 자! 모두들 들어가지.”

하진은 마침 잘 됐다는 듯 모든 제후들을 이끌었다.

“오! 폐하를 직접 뵙는다니.... 이런 영광이....”

“우리도 십상시 처단에 대한 공을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건가?”

많은 제후들이 황제를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했지만, 둘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원소와 원술이다.

드디어 이의민과 곽봉을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또 뒤로 미뤄지게 생겼다.

“크윽! 어서 빨리 저놈들을....”

그래도 원소는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고는 하진을 따라갔다. 그런 원소와는 달리 원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의민과 곽봉 곁에 바짝 다가갔다.

“도망칠 생각은 안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부터 네 일거수일투족을 내 부하들이 감시할 테니... 폐하의 치사가 끝난 후 네놈은 바로 죽은 목숨이다. 잘 알아둬라.”

지금 당장 이의민을 족치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쉬운 원술이지만, 결국 그를 잡아 족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여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객잔에 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원술이 데려온 많은 군사들이 사방에서 이의민과 곽봉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만약 하진만 없었다면 진작 병장기를 꺼냈을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여전히 여유롭다.

“흐흐. 할 수 있음 해보던가.”

원술은 그런 이의민을 보며 순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처음 내성 성문을 열고 마주쳤을 때부터 이의민은 계속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의민이 처한 상황을 보면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대체 저놈이 무얼 믿고 저리 여유로운가? 설마 공포로 실성을 한 것인가?’

좀 더 자세히 이의민을 뜯어보는 원술.

이의민의 복장은 보사의 복장이다. 그것도 낙양 경비병의 표식이 있는 보사다. 그런 그가 왜 대장군인 하진 옆에 같이 서 있다는 말인가? 보통 이런 자리는 대장군 다음의 장군이나 아니면, 대장군을 호위하는 금군의 자리였다. 절대 낙양 경비병이 같이 서 있을 수가 없는 자리다.

‘그 사이에 대장군 호위 금군으로 보직 변경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렇다고 보기에도 뭔가 이상하군.’

대장군의 호위라고 보기에는 주변 금군의 배치가 맞지 않았다. 이의민과 곽봉, 그리고 주변 금군들의 배치를 보니, 이의민과 곽봉은 금군과 함께 움직인다기보다 하진처럼 호위를 받는 대상으로 보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배치가 흐트러진 것이겠지.’

하지만 원술은 애써 자신의 생각을 지웠다. 뭐가 됐던, 오늘 저 놈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리라.

이윽고 하진과 제후들은 황제의 어전 앞에 도착했다. 황제는 어전 안이 아니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진과 제후들은 일제히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그대들이 오늘 나라에 큰 우환을 걷어내고 홍복을 가져왔소. 짐이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소? 그래서 오늘 일에 대한 논공행상을 하고 직접 치하를 하려고 하오.”

황제는 황문시랑이 알려준 대로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의 이 난리를 해결한 대장군 하진의 공을 짐은 높이 치하하고자 한다. 그리고 하진을 도와 십상시들과 반군을 단 둘이서 무찌른 후장군과 우림중랑장을 일등공신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땅과 토지를 하사하고자 한다.”

황제의 연설도중 많은 제후들이 의아해했다.

“후장군? 우림중랑장? 그게 누구였더라?”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아니. 그거 보다 단 둘이서 그걸 해결했다고...?”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듣자하니 반군은 거의 백 명 가까웠다는데, 그걸 둘이서....?”

모두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후장군과 우림중랑장은 앞으로 나오라!”

황제의 외침에 두 명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 꿇은 이들은 슬쩍 고개를 들며 그 두 명이 누구인지 찾았다.

“신 후장군 이의민. 황제 폐하의 황은에 그저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신 우림중랑장 곽봉. 황제 폐하의 황은에... 어.... 그러니까 황송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우렁찬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그리고 너 나 할 거 없이, 그곳에 모인 모든 제후들이 경악한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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