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벼락 출세 (2)
이의민과 곽봉이 저지른 십상시 학살 사건은 황궁 내부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연하게도 황궁 내부는 언제 어디에서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 그건 가덕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십상시와 거목이 거사를 위해 가덕전에 사람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십상시와 거목의 수하들이 온 황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는데 아무리 가덕전 밖이라도 모를 수가 없다.
게다가 사건의 주범인 이의민과 곽봉, 그리고 하진 역시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으니 황궁에서 소문이 퍼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황궁에 큰 변고가 생겼습니다.”
마치 전서구마냥 황궁 내부 곳곳을 떠돌면서 변고를 알리는 궁인들. 시끄러운 그들의 소란에 정무를 보던 황궁 관리 황문시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웬만해서는 궁인들이 퍼뜨리는 각종 소문을 들으려하지 않는 그였지만, 하도 많은 이들이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관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황문시랑은 큰일이 났다고 앵무새처럼 떠드는 궁인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큰일이 났기에 황궁 내에서 이리 크게 떠들고 다니는가? 내가 정무를 볼 때는, 더군다나 신성한 황궁 안에서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는가?”
“아! 화, 황문시랑! 큰일이 터져도 보통 큰일이 터진 게 아닙니다.”
“쯧쯧! 그래도 이 사람이.... 아무리 큰일이라지만 작금의 현실보다 큰일이겠나? 그러니 차분히 말해보시게.”
“절대 놀라지 마십시오. 글쎄. 십상시들이 하진과 그 수하들에게 모조리 도륙을 당했다고 합니... 어?”
궁인은 속사포처럼 변고가 무엇인지 털어놓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황문시랑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궁인의 속사포 같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이다.
궁인은 번개같이 순식간에 사라진 황문시랑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았다.
“허얼...! 난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곳뿐만이 아니다.
현재 황제가 있는 어전에서도 시끄러운 얘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전에서는 황제 유변은 그의 생모인 하태후와 같이 있다. 황제인 유변은 화려한 금룡포를 걸치고 있었지만 황제다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어머니인 하태후의 치마폭에 푹 둘러싸여 있는 것이 황제의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장군 하진이 직접 와서 보고를 할 때만해도 황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하진이 읊어주는 대로 황명을 내릴 뿐이었다. 황명을 직접 읊을 때까지도 설마 십상시들이 정말 몰살을 당한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후 궁인들이 너도나도 보고를 해왔다. 그제야 십상시들이 전부 하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황제다.
그럼에도 유변은 황제로서 십상시 살해 사건을 직접 정리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황궁 안에서 죽었다는 얘기에 그저 어미인 하태후를 부르고 그 품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 뿐이다.
“오오! 내 아들! 얼마나 충격이 컸느냐? 이리 오렴.”
“어, 어머니.... 너무 두렵습니다. 이제 어찌 해야 합니까?”
아무리 황제의 생모인 태후라도 황궁의 예법 상 황제에게는 존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는 하태후였고, 황제인 유변 역시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막장스러운 황실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는 황제와 하태후다.
“하아! 오라버니에게 그런 강단이 있었던가? 일을 크게 벌려도 넘 크게 벌렸구나....”
현재 유변 대신 섭정을 하고 있는 하태후지만, 그녀 역시 지금 가진 권력 외에 별다른 능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태후라는 위치만 뺀다면 흔한 아낙네 정도밖에 안 되는 여인이었으니, 당연히 작금의 사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대체 오라버니께서 왜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셨단 말인가? 내 그토록 그들과 반목하지 말라 당부했거늘!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그리 마음 가는 대로 저질러 버리다니! 아아... 어리신 황상은 어쩌라고 이런 난국을 만든단 말인가.”
하태후 역시 충격을 받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탄만 늘어놓았다. 그때 그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인물들이 도착했다.
“폐하. 좌장군과 황문시랑 입실이옵니다.”
좌장군 황보숭은 한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우국충정의 마음을 지닌 충신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평소에도 하태후는 그에게 많은 조언을 구하고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게 평소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가 찾아 왔으니 너무도 반가운 하태후였다.
“오오! 좌장군. 어서 오시오. 때마침 그대의 충언이 필요했소.”
“신 좌장군 황보숭, 폐하를 뵈옵니다. 태후께서도 계셨사옵니까? 태후께도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인사는 됐고, 좌장군께서도 황궁의 소문을 들으셨지요? 아까 오라비... 아니. 대장군께서 직접 사실을 보고 하러 왔으니 단순 소문이 아닙니다. 정말 대장군이 궁내의 환관들을 모조리 도륙한 겁니다. 이걸 대체 어찌 합니까? 그들은 모두 황상께 충성을 맹세하며 목숨을 바치길 자청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다니요? 이 사단을 어찌 수습해야 한단 말입니까?”
황제를 앞에 두고 혼자만 떠드는 하태후. 황보숭은 그 모습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크게 내색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하태후의 질문에 답했다.
“태후마마. 염려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대장군이 누구입니까? 바로 폐하와 태후마마의 혈육이 아닙니까? 대장군을 힐책하지 말고 이번 일에 대해 오히려 지지한다면 그는 누구보다 든든한 황실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옵니다. 이미 폐하께서 그와 관련된 황명을 내리셨다는 것도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잘 하셨사옵니다.”
황보숭의 말에 그제야 황제와 하태후는 안정을 찾고 있었다.
“저, 정말이오? 좌장군? 그대의 말대로라면 참으로 다행이구려.”
“그, 그렇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오라버니께서 우리를 배신하진 않겠지....”
목소리에 아직 불안함이 살짝 묻어나왔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안정된 황제와 하태후. 확실히 조정에서 이런 꼴 저런 꼴 많이 본 인물답게 황보숭은 노련한 입담으로 둘의 마음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황보숭의 옆에 자리한 황문시랑 역시 그를 거들었다.
“신의 생각으로도 좌장군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 생각됩니다. 대장군을 포함한 외성의 군웅들까지 모두 불러들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특히나 이번 거사에 지대한 공이 있는 두 사람은 폐하께서 직접 옥음으로 치하를 해주신다면 그들은 더욱 더 폐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평소 신뢰하던 좌장군과 황문시랑이 이렇게 나오자 황제는 두 번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명을 내렸다.
“좌장군과 황문시랑의 말이 참으로 옳소. 속히 그들을 황궁 안으로 들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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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시랑이 말한 제후들은 외성에서 목이 빠져라 내성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불러놓고 외성 밖에만 대기하라고 있으라니 이건 뭔 경우인가? 대장군이란 사람이 저리 우유부단해서야 누가 믿고 따를 수가 있냐는 말일세.”
제후들 중에서도 콧방귀 좀 뀌는지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이 앞에 나와 있는 자가 불만을 토로했다. 황문시랑의 설명에 따르면 분명 대장군 하진을 따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하진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은 듯했다.
그 옆에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내가 불만을 토로한 사내를 달랬다.
“하하! 본초형. 거사가 어찌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이의민과 곽봉이 이 사단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이었다. 바로 원소와 조조 패거리들이다.
방금 대화를 나눈 원소와 조조 뒤편에 얼굴을 찡그린 채 코를 부여잡고 있는 인물도 있었다.
“크으윽! 내 코. 내 코야.... 이놈의 통증이....! 염병! 다 필요 없고 그 육시랄 놈들은 아직도 못 찾았느냐?!”
바로 이의민에게 제대로 쳐 맞고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는 원술이다. 그는 주변에 있던 애꿎은 수하 하나를 발로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하지만 원술에게 발길질을 당한 수하는 꿈쩍도 않고 정자세를 취한 채 질문에 답했다.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는 것이 정말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거나, 아니면 참을성이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
“송구합니다. 주군. 외성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림자도 못 보았습니다. 아마 낙양을 벗어났거나, 아니면 내성 쪽으로 간 듯합니다.”
그는 원술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기령이다.
원술은 기령의 침착한 모습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한지 화를 삭였다.
“그래. 그놈들.... 으드득! 제발 내성에 있기만을 바래야겠군. 어차피 오늘 내로 안의 상황도 결정이 날 것이니, 십상시고 나발이고 일단 그 새끼들이 내성 안에 있는지 샅샅이 찾아보아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조는 느긋하게 원술과 기령의 대화를 들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조조는 겁도 없이 원술의 코를 부러뜨린 이의민의 존재에 대해 이상하게 관심이 갔다. 상대는 고작해야 외성 경비병에 불과한 인물임에도 말이다.
‘이 정도까지 사람을 풀어서 찾고 있는데 아직 흔적도 찾지 못하고 있다니... 게다가 같이 다니던 놈은 그다지 비범한 놈 같지도 않았고.... 후훗! 간만에 재미있는 인물을 찾았는데 아쉽군.... 다음에 또 볼 일이 있으면 좋으련만....’
조조가 이의민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원술과 같은 적대감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강한 호감을 느낀 조조. 스스로도 왜 이의민에게 그런 느낌을 받는지 모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성 성문이 열렸고, 금위군이 직접 나와서 대장군 하진의 행차를 알렸다.
“대장군께서 행차하실 겁니다. 제후 여러분들을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그제야 반색하는 제후들.
“오오! 드디어...! 그럼 십상시들은 어찌 된 것인가? 이제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대장군께서 이미 그들을 모조리 섬멸하셨습니다.”
금위군의 보고에 제후들은 눈을 크게 떴다. 여태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주던 하진이 이미 거사를 끝내놓았다고 하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정말인가? 대장군께서 그런 강단이 있으셨단 말인가....?”
어찌 됐든 제후들에게 나쁠 거 없는 소식이다. 물론 십상시 처단에 공을 따로 세우지 못해 아쉬워하는 이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잘 된 일이 아니오?”
“아쉽군. 내손으로 직접 그 환관 놈들을 처단하고 싶었는데....”
“그건 아쉽지만 그래도 그 바퀴벌레 같은 놈들을 이제라도 쓸어버렸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제후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어느새 대장군 하진이 도착했다.
다른 제후들은 물론이고, 열심히 뒷담화를 까던 원소도 예를 갖추며 하진을 맞을 채비를 했다.
화려한 황금갑주를 걸친 하진이 드디어 내성 성문을 통과하여 제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원술은 백정 출신인 하진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평소라면 억지로라도 예를 갖추겠지만, 이번에는 다친 코를 핑계로 허리를 숙일 생각도 없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진을 바라보던 원술. 그때 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저, 저놈들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두 사람이 하진의 양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