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벼락 출세 (1)
도망치는 십상시들을 따라가서 베는 곽봉.
“사, 살려다오! 날 살려주면 금은보화와 관직을.... 크아악!”
“미안하오. 이미 칼을 뽑았으니 어쩔 수가 없소. 아니지. 그동안 이놈들에게 그리 당했던 걸 생각하면 굳이 사과할 필요가.... 젠장! 그나저나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
곽봉은 자신이 쓰러뜨린 십상시들, 그리고 이의민의 곁에서 쓰러져 있는 장양 등을 돌아봤다. 자신과 이의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벌인 것인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헷갈릴 정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쓰러뜨린 수십의 군사들은 원래 황실의 경비병들이었다. 평소라면 곽봉 같은 외성 경비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접을 받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한둘도 아니고 수십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그건 약과에 불과했다. 지금 곽봉이 직접 쓰러뜨린 십상시들, 그리고 이의민이 쓰러뜨린 장양. 그들이 누구인가.
대장군 하진과 치열한 정치싸움을 하며 나라와 황실을 쥐락펴락한 거물이 아닌가. 곽봉 따위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십상시들이 심심풀이 삼아 죽인 병사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 이들을 직접 칼로 베어 죽인 것이다. 뒷감당을 생각한다면 절대 하지 못할 짓을 한 것이었다.
곽봉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이끌어 이의민에게 다가갔다. 장양의 머리를 쪼갠 이의민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거라고 자각도 못한 것인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도끼를 주워들고 있었다.
실제로 이의민은 역사를 바꾼 것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하진이 이 자리에서 죽었으니까. 그런데 삼국지를 잘 알지 못하는 이의민은 자신이 역사를 바꿨다는 자각도 없다.
‘하! 내가 대체 어떤 놈을 데려온 거냐? 나라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놈이구나....’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질러놨으니 곽봉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이의민을 보고 있자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꿀꺽!
얼마 전 원술의 얼굴을 아작 냈을 때 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일들은 그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큰일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이의민을 보니 오히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 무조건 의민을 따라야한다.’
곽봉이 자신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의민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하진을 바라봤다. 하진은 이의민과 곽봉이 벌여놓은 참상에 감히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씨발! 무슨 대장군이 저따위야?’
대장군이란 직책은 단순히 전투능력으로 임명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하진의 꼴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죽음의 위기가 다가오자 울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이의민과 곽봉이 그를 구하러 나섰을 때도 손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이런 자가 대장군이라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이의민이다.
‘괜히 대장군 편을 들었나? 아니지. 어차피 도움도 아니 될 터인데, 가만히 숨어 있어주는 게 차라리 낫군. 덕분에 생색도 좀 더 낼 수 있게 됐고....’
이미 대장군 하진 쪽에서 칼춤을 췄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이의민은 얼른 표정 관리를 하고 하진에게 다가가서 안부를 물었다.
“대장군. 이제 안심하십시오. 소장이... 아니. 소인이 적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하진은 이제 죽을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듯, 귀신을 본 것 마냥 이의민을 보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 그래.... 자네. 유, 유민이라고 했나?”
“유민이 아니라! 이의민입니다. 대장군.”
“아! 그, 그래. 내 실수했군. 이의민.... 고생 많았네.”
하진은 그제야 자신이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빼도 박도 못하고 죽었다 생각했었다.
혼자서 수십 명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신장이 내려왔다. 아니. 이의민의 모습은 신장이라고 하기엔 어색하다.
‘사람이 아니다. 야차다. 지옥에서 내려 온 야차.’
신장이든 야차든 인세의 것이 아니라고 착각할 만큼 이의민의 무력은 충격적이었다. 아무튼 하진 입장에서는 하늘이 자신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진은 이의민의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고맙네. 고마워. 내 자네의 공을 절대 잊지 않을 걸세. 황제폐하께서도 자네의 공을 크게 치하하실 걸세.”
‘크흐흐. 대장군이 호구라서 오히려 좋군.’
“암요. 암요. 마땅히 그러셔야죠. 그런데 뭐 잊으신 거 없습니까?”
이제 여유가 생긴 건지 하진은 빙긋 웃었다.
“잊은 거? 아! 당연히 잊지 않았지. 허나 장양, 저 역적 놈이 얘기했던 거기장군직까지는 줄 수가 없네. 거기장군이 지금 공석이 아니라서 말이네. 게다가 일반 병졸인 자네를 거기장군까지 승진 시키는 것은 아무리 대장군인 나라도 무리한 일이야. 애초에 저놈은 자네에게 말도 아니 되는 거짓 약조를 한 거였네.”
거기장군을 주지 못한다는 하진의 말에 이의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럼 잊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었습니까? 설마 대장군씩이나 되는 분이 한 입으로 두 말 하시는 겁니까?”
대장군인 하진은 일반 병졸인 이의민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럴 리가! 대장군이 한 번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아니 할 리가 있는가? 나는 거기장군 직을 주지 못한다고 했을 뿐, 장군직 자체를 주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네. 당연히 장군직을 내려 줄 걸세. 일단 그 전에 자네에게 황금으로 된 기둥을 내려주지.”
하진의 말을 들은 곽봉은 입을 쩍 벌렸다. 황금 덩어리도 아니고 황금 기둥을 내려준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의민의 다음 말에 그의 입이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 그런데 이번 일은 저 혼자만 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 곽봉 형님도 같이 한 겁니다. 상도 같이 주시지요.”
“의, 의민....?!”
곽봉은 어디 맡겨 놓은 돈 내놓으라는 듯 당당히 얘기하는 이의민의 태도에 일차적으로 놀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배려에 2차적으로 놀랐다.
이미 이의민에게 푹 빠진 하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자네도 같이 싸웠군. 내 잊을 뻔했네. 그만큼 이의민, 자네의 활약이 눈부셔서.... 아무튼 곽봉? 자네에게도 황금 기둥을 내리겠네. 그리고 약속한 장군직 말인데. 폐하의 윤허를 받아오겠네.”
이의민은 사실 황금 기둥 따위는 별 관심 없었다. 어차피 권력을 손에 쥔다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재물 아닌가. 중요한 건 장군직인데, 하진이 확답을 해주지 않으니 이의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진은 그런 이의민을 최대한 달랬다. 곧 장군직을 받는다지만, 현재는 일개 병졸의 비위를 대장군이 맞춰주는 진귀한 모습이다.
“하하! 걱정 말게. 자네에게 반드시 장군직을 줄 걸세. 아까 장양이 자네를 탐냈지 않았던가? 나 역시도 마찬가지일세. 자네 같이 능력 있는 친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임명하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폐하께 윤허 받고 임명되는 게 뒷말이 좀 덜나올 테니 이러는 걸세.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황제폐하께 윤허를 받도록 하지. 가세.”
하진은 이의민과 곽봉을 데리고 황제가 있는 어전으로 향했다. 물론 아직 일개 병졸일 뿐인 이의민과 곽봉은 어전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대기해야했다.
하진이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가고 남은 이의민과 곽봉. 곽봉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이의민에게 속삭였다.
“여기가 정말 어전 앞이 맞을까...? 설마 이러고 우리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뭐 그럴 거 같진 않소. 저 대장군이란 작자를 보니 생각보다 순진하고 멍청한 것 같소. 그리고 설사 이게 우릴 죽이려는 함정이라면 또 도망가면 되지요. 어차피 원술인가 원숭인가 하는 그놈 때문에 도망 다녀야 하지 않소.”
이의민과 곽봉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갔던 하진이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하진은 나오자마자 칼을 뽑아들었다. 곽봉은 정말 자신들을 죽이려는 함정인줄 알고 움찔했다. 그런데 이의민은 눈썹 하나 까닥거리지 않았다. 하진이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칼을 꺼낸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하진이 함정을 파 놓은 거라면 자신의 그 괴물 같은 무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직접 칼을 꺼낼 리 없다. 그리고 무예에 통달한 이의민은 상대가 검을 꺼내는 자세만 보고도 공격을 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이의민의 예상대로 하진은 칼을 뽑아서 이의민의 어깨에 걸쳐만 놓았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제폐하를 대신하여 대장군이 명한다. 이의민과 곽봉은 역적 장양과 그 무리들을 처단한 바, 그 공을 높이 사 이의민을 후장군으로 임명하고, 곽봉을 우림중랑장으로 임명한다.”
“히이익!!”
곽봉은 조용해야 할 자리인 것을 알면서도 절로 비명을 터뜨렸다. 황금 기둥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절초풍할 지경인 곽봉.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장군을 구해줬다지만 방금까지 병졸이었던 자신은 중랑장이 되었고, 이의민은 무려 사방장군의 일원인 후장군이 됐다.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봐! 의민이! 아니. 후장군님! 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후장군이면 얼마나 높은 거요?”
“이런 무식한 새끼. 대장군, 표기장군, 거기장군, 위장군. 이 네 자리가 가장 높은 건 알고 있지?”
“아니. 그것도 모르지.”
“아무튼 그게 가장 높은 네 장군직인데,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한 게 사방장군이고, 그중 하나가 후장군이야.”
처음 장양이 제시했던 거기장군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높은 위치의 장군직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의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말 거기장군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후장군.... 후장... 후우! 확실히 높은 관직이라 만족스럽긴 한데.... 어째 이름이 좀....”
다행이도 관직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닌 것 같다.
“크흐흐! 아무렴 어떠냐. 아! 대장군님. 혹시 원술이란 자를 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래도 착실히 대답을 해주었다.
“허허. 천하 삼대가문중 하나인 원가의 원술을 모르는 자가 있던가? 그런데 원술은 왜 묻나?”
“흠흠. 그와 사소한 문제가 좀 있어서... 후장군이면 원술보다 높은 겁니까?”
“당연하지. 가문의 위상은 그가 높다지만, 그는 호분중랑장일세. 후장군과 비교될 순 없지.”
“크흐흐! 잘됐군요. 그럼 이제 도망 다닐 필요가 없겠군.”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내 명에 의해 외성에서 대기하고 있네. 지금 만나러 갈 건데 자네들도 갈 텐가?”
하진의 질문에 곽봉은 이의민을 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의민이 후장군이 되었다고 하나 병졸의 신분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두려운 마음이 아직 남아있는 곽봉은 원술과 마주치기 싫었다.
“제발 가지말자.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아! 형님. 뭐가 무섭소? 나는 이제 그놈들보다 더 높은 장군이오. 형님도 그놈과 같은 중랑장이잖소?”
“그, 그래도....”
이의민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아니. 오히려 반갑다는 듯 하진에게 답했다.
“흐흐흐! 그거 잘 됐군요. 같이 가시죠. 대장군. 원술 얼굴 보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