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자마자 사고치다 (3)
거목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명의 병사를 돌아봤다. 다른 병사들은 분명 하진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는데, 그 두 명은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하진이 아닌 거목을 노리고 있는 검이었다. 그래도 두 명 중 한 명은 완전히 결정을 내린 게 아닌 모양이다.
“으윽! 벌써 다 눈치 챘다. 이놈아! 이제 우리는 죽은 목숨이라고!”
“죽기는 왜 죽소? 걱정 말고 내 말대로 하시오.”
그런데 다른 한 명의 병사는 뭐가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지, 거목과 다른 군사들이 다 알아챘음에도 전혀 위축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이의민이고, 옆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자는 곽봉이다.
대충 보기에도 이의민은 한 가닥 할 것 같이 보였지만, 거목은 코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겨우 한 놈, 아니. 갈팡질팡하고 있는 다른 곽봉까지 가담한다고 해도 겨우 두 놈이다. 그 둘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크흐흐! 하진의 제안이 구미가 당기더냐? 그래. 꼭 너 같은 놈이 한두 놈 씩 있지. 재물에 눈이 멀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리분별 못하는 버러지 같은 놈이....”
거목은 이의민과 곽봉을 크게 비웃고는 다른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뭣들 하느냐?! 내가 하진의 목을 벨 동안 너희는 저 두 놈의 목을 내게 가져와라.”
거목은 명을 내리고 더 이상 이의민과 곽봉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머지 군사들에 의해 이의민과 곽봉의 목이 떨어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을 돌려 하진 쪽을 바라보는 거목. 그때 그의 뒤에서 털썩 하는 소리가 났다. 거목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두 병사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거목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잠깐! 거기서 한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넌 죽는다.”
무릎을 꿇은 줄 알았던 이의민이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순간 거목은 사냥 직전의 호랑이를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뭐, 뭐야? 갑자기 웬 소름이....’
하지만 거목은 자신이 받은 느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일개 병사에게 이런 느낌을 받았다니 수치 중에 수치 아닌가. 그것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거목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군사들에게 외쳤다.
“이놈들아! 내가 언제까지 이 따위 개소리를 들어야 하느냐? 어서 이 두 놈을 처리하지 못하겠느냐?”
“예! 상방감!”
거목은 군사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를 듣고 난 이후 다시 안심하고 하진에게 다가갔다.
‘그래! 거사를 앞두고 내가 심약해졌었나보군. 이제 하진 이놈만 잡으면 끝이다.’
이제 오로지 하진에게만 온 신경을 쏟으며 다시 검을 든 거목.
“대장군. 저런 머저리들을 걸러내게 해주어 고맙소. 마지막 갈 때는 그래도 우리 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구려. 크흐흐!”
“제, 제발 살려주게. 날 살려준다면 어떤 자리든 약속을.... 크흐흑!”
“끝까지 꼴사나운 모습이군. 마지막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대장군다운 모습을 보이라고!”
거목은 하진을 베기 위해 검을 높이 들었다. 그때 거목의 귀에 장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상방감! 뒤! 뒤에!”
더 이상 이의민과 곽봉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던 거목. 하지만 장양까지 난리를 치니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꾸 뭐라는 거야? 뒤에 뭐가 있다고....?’
거목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것이 그의 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퍼퍼퍽!
순식간에 날아 온 손도끼 하나가 그대로 거목의 머리를 찍었기, 아니. 갈랐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도끼로 직접 거목의 머리를 찍은 게 아니다. 도끼를 던져서 그대로 거목의 두개골을 갈랐다. 이의민의 가공할 팔 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의민이 보여준 기상천외한 광경에 모두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의민은 모두가 얼어있는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 났는지 쌍도끼를 양손에 쥐고, 거목의 군사들을 베어나갔다.
“크아악!!”
도끼 두 개가 춤을 추었고, 그 춤사위가 지나간 자리는 시뻘겋게 물들었다. 몇 명의 군사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 나머지 군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의민을 상대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먼저 쓰러진 군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미타산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도끼를 휘두르는 이의민은 오래간만에 보는 피 맛으로 잔뜩 흥분했다. 거기다가 몸 상태 역시 전성기로 돌아왔다.
전생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미타산 전투. 그때의 이의민은 50대였다. 게다가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매일 밤을 술과 여자로 보냈기에 몸도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때도 무려 수백 명의 군사들을 상대로 대치 상태를 이어갔던 이의민이다. 그런 이의민이 최고로 강한 힘과 빠른 몸놀림을 지녔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갔으니, 눈앞의 수십 명의 군사들 따위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이의민이 보여주는 인간 같지 않은 강함에 모두 얼어붙어 무기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있다. 십상시들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십상시들의 우두머리인 장양만큼은 침착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군사들이 절반 정도는 남았다. 저놈도 저 많은 군사들을 쓰러뜨리느라 지쳤을 터인데...’
장양은 이의민을 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거목의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궁병?! 궁병은 없는가?!”
이의민 하나를 잡기 위해 궁병까지 찾는 장양.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의민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양에게는 안타깝게도 궁병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진 하나 잡는데 궁병까지 동원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대장군 하진을 따라다니는 호위가 문제였을 뿐, 호위 하나 없는 하진을 잡는 건 너무 쉬웠다.
물론 궁병이 있었다고 해서 눈앞의 이의민을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이의민은 착실히 나머지 군사들을 쓰러뜨려갔다. 어느새 가덕전의 후원에는 60구가 넘는 시체가 나뒹굴었다. 전부 이의민이 혼자 쓰러뜨린 군사들이다.
이제 거목의 수하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사, 살려줘!”
“다가오지 마! 이 괴물아!”
“제발 살려주세요. 흐흐흑! 집에 토끼 같은 노모와 곰 같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황궁을 지키는 군사들이다. 그냥 평범한 군사들도 아닌 정예 중에 정예 군사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의민이 보여주는 야차 같은 모습 앞에서는 전부 목숨을 구걸할 뿐 아무도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의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히이익!”
그 공포는 뒤에서 지켜보던 십상시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십상시들 중 한 명인 조충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쳤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뒷목에 칼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건 이의민의 작품이 아니었다. 조충을 쓰러뜨린 건 같은 십상시인 장양이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 쪽팔린 줄 알아야지. 퉤!”
장양은 쓰러진 조충의 시신을 향해 침을 한 번 뱉고는 이의민을 향해 물었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의민도 이제는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을 베는 건 흥미가 없는지 장양을 상대해주었다.
“나는 이의민이다. 잘 기억해뒀다가 염라대왕을 만나면 내 이름을 말해주거라.”
“후훗! 이의민이라.... 그래. 일단은 그 살벌한 도끼를 좀 치우고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떻겠나?”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일단 상황을 모면하고자 세치 혀를 놀릴 작정인가본데,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보아하니 네가 우두머리 인듯한데 일을 벌였으면 책임을 져야지. 목 내밀고 기다리고 있어라.”
살벌한 이의민의 엄포에도 장양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의민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훗! 네놈도 결국 재물이나 관직이 탐나는 것 아니겠느냐?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후훗! 그대와 같은 인물이 고작 병졸이라니... 이것은 나라, 아니. 천하의 큰 손실이다. 아까 하진이 장군직을 약속했나? 허나 장군도 다 같은 장군이 아니다. 장군도 무슨 장군이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는 말이지. 나는 화끈한 사람이다. 그대에게 별 거 아닌 장군직 따윈 내릴 생각이 없다. 지금 내 곁에 선다면 너에게 거기장군직을 내리겠다.”
장양은 그 자리에서 이의민에게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거기장군은 대장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자리였다.
분명 이의민이 혹할 만한 제안이다. 실제로 이의민은 전생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분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원술을 폭행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 상태다. 만약 하진과 함께 한다면 그가 정확히 무슨 장군직을 준다고 하지 않았으니, 조조 패거리보다 더 낮은 장군직을 받았을 때 곤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양의 제안을 받고 거기장군이 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거기장군은 대장군 바로 다음 직위이니 그들을 직위로 눌러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의민은 정말 장양의 말에 혹하기라도 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양은 그런 이의민을 보고 자신의 설득이 먹혔다고 확신했다.
‘그래! 네놈이 원하는 건 결국 이런 것 아니더냐? 흐흐! 능력은 있는 놈이니 당분간 사냥개로 요긴하게 써먹어 주마. 그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바로 삶아먹을 것이다.’
그런데 장양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이의민의 입에서 나왔다.
“다 떠들었느냐.”
“뭣이?”
“방금 한 말을 네놈의 유언이라고 생각해주마.”
이의민은 장양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가 장양의 제안을 받고 약간의 시간을 보낸 이유는 제안을 받을지 말지 고민을 한 게 아니다.
‘거기장군이 도대체 뭔데? 얼마나 높은 건데? 그리고 고자 새끼 주제에 지가 뭐라고 장군직을 주니 마니하고 있어?’
쌍도끼를 들고 장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의민.
“뭐, 뭣이...?! 어째서....? 흐이익!”
놀란 장양은 조충처럼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이의민이 주는 공포 앞에 자신이 버러지라 부르며 멸시했던 조충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장양이다.
장양과 함께 나머지 십상시들도 잇달아 비명을 지르며 후원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래도 다들 머리는 꽤나 쓰는지 방향을 달리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이의민이라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십상시들을 다 잡기는 버거운 상황.
“젠장! 고자 새끼들이 머리는 좋군. 귀찮게 됐어.”
그때 십상시의 도주 경로 중 한 곳을 틀어막는 이가 있었다.
“의민!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넌 그쪽을 막아라!”
곽봉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던 그도 이제는 누구보다 빨리 판단을 내렸다.
“어딜 도망가?!”
“크아악!!”
“오! 형님! 좋소.”
곽봉 덕분에 다른 십상시를 편히 추격할 수 있게 된 이의민. 결국 장양을 따라잡았다.
장양은 최후의 발악인지 품에서 검을 꺼냈다. 하지만 눈앞의 이의민에게는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힘없이 검을 떨어뜨리며 마지막 유언을 내뱉었다.
“손아귀에 다 들어왔다고 생각했건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내 앞을 막는구나.”
장양은 유언을 끝으로 거목처럼 머리가 쪼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