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자마자 사고치다 (2)
믿기지 않은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내성 성벽을 넘은 이의민. 전생의 전성기 때 몸놀림 그대로였다.
“야이! 자식아! 너 혼자 그리 성벽을 넘어가면 어떡하느냐? 헥헥! 난 어찌 들어가라고?”
곽봉도 성벽을 넘으려고 하지만 그는 이의민이 아니다.
“아! 형님. 그리 굼떠서 대체 어쩌려고 그러슈? 이러다 잡히겠소.”
그래도 이의민은 다시 내성 성벽 위로 올라가서 곽봉이 넘어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의민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성벽 위까지 올라 온 곽봉.
이제 올라왔으니 내려가는 것이 문제였다. 마치 곰이 나무를 오르내리듯, 내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의민이었지만 곽봉은 그렇지 못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려왔지만, 중간에 발을 헛디디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이쿠!”
그대로 성벽 아래로 추락한 곽봉. 다행히 제법 내려온 상태에서 떨어진 것이라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추락하는 소리가 주변으로 크게 들렸다.
“거기 누구냐!”
곽봉은 제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길 빌고 빌었지만, 이미 저쪽에서 한 무리의 내성 경비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칠까? 아니. 차라리 여기서 순순히 잡혀 버릴까? 외성 보사가 술김에 실수했다고 치면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까 그 원술이라는 놈도 우리들이 감옥 안에 있다고는 생각 못 하지 않을까?’
곽봉이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이의민은 옆에서 태연하게 몸을 풀고 있다.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경비병들을 때려눕힐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들이구나!”
“무슨 목적으로 내성 성벽을 넘은 것이냐?”
‘잠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린데?’
이의민은 바로 주먹을 뻗으려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먼저 그들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곧 그들이 구면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바로 곽봉과 처음 만났던 날, 이의민에게 참교육을 받고 돌아간 내성 경비병 패거리들이었다.
이의민은 마침 잘 됐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크흐흐! 이놈들아!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느냐?”
처음에는 이의민을 못 알아보고 단순 성벽을 넘은 도둑놈들이라고 생각해서 달려왔던 경비병들. 이의민과 곽봉을 알아보고는 얼음이 됐다. 그들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존재가 바로 이의민 아닌가.
놀란 경비병들은 호랑이를 마주친 사슴처럼 몸이 굳어서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으히힉! 야, 야차 헙....!”
“미친놈아! 닥쳐!”
경비병 중 한 명이 이의민을 보며 야차라고 소리쳤다. 그때 다른 동료 한 명이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이의민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그들은 이의민을 야차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그걸 이의민 앞에서 내뱉었으니 혼비백산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전생에서의 그의 별명도 금강야차 아니던가.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의민은 평소답지 않게 다짜고짜 손을 쓰지 않고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마침 잘 됐군. 우리가 여기 내성 안에서 좀 있어야 할 일이 있다.”
“무, 무슨....?”
“자세한건 알 필요 없고.... 그냥 있기만 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희들의 그 내성 경비병 복장을 좀 빌려야겠다.”
“헉! 대인! 보사들의 옷을 뺏어... 아니. 빌려 가시면 저희는 어쩌라고 그러십니까?”
“우리 걸 좀 입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며칠만 외성 경비병으로 활동하면 된다.”
평화로운 대화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내성 경비병들의 복장을 빼앗아버리는 이의민이다. 그래도 평소에 비하면 많이 유한 편이다.
이의민과 곽봉은 내성 경비병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경비병들에게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외성에 있는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왜 내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지.
하지만 내성 경비병에 불과한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래. 외성 상황은 잘 모른다고?”
“그렇습니다. 저희는 내성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습니다.”
“내성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자세히 좀 말해 보거라.”
“그저 소소한 변화들입니다. 내성의 교위분들이나 도위분들이 뭔가 바쁘게 움직이시는 거 같습니다.”
“훈련이 있다거나 할 수도 있지 않느냐? 고작 그런 일로 이상하다 고하는 게냐?”
“그게 아닙니다요! 문제는 우리 같은 말단들은 바쁜 게 아니라 한가할 정도입니다. 오늘도 실은 일찍 집에 들어가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가다가 우연찮게 대인을 만난 것이고요.”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본래 어떤 상황이든 가장 바쁜 것은 제일 밑에 위치한 보사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교위나 도위 같은 자들은 이유 없이 바쁜데 보사는 한가하다? 이의민의 상식으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닙니다. 교위들이 오늘은 자기들이 경계를 서겠다고 하지 뭡니까? 그런데 경비병들은 다 쉬고 몇 되지 않는 교위들이 서봤자 얼마나 서겠습니까? 지금 성문을 제외하곤 경비 서는 자가 없습니다. 평상시라면 대인이 성벽을 넘었을 때 이미 수십의 경비병들에게 둘러 싸여야 정상입니다.”
이어지는 내성 경비병들의 말에 이의민은 평소 그답지 않게 제자리에 서서 장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비슷한 일이 고려에서도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죽일 때 썼던 방법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눈앞의 경비병들이 정적의 군사들이고, 도위니 교위니 하는 것들이 암습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이 상황이 이의민의 예전 경험과 너무 비슷했다.
‘뭔가 황궁이나 내성 내부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 틀림없다.’
이의민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찌 보면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다. 지금의 흐름에 몸을 잘 맡기기만 한다면, 어쩌면 지금 쫓기는 신세까지 극복할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잘 알아들었다. 군복은 잘 입고 금방 돌려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일 테니 푹 쉬고 와라.”
**
낙양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황궁. 그 황궁 내에 아주 화려한 갑주를 걸치고 있는 사내가 거침없는 동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전시나 훈련도 아닌데 황궁 내에서 갑주를 걸친 것, 그리고 황궁 안을 제 집 드나들 듯 활보하는 것을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아니면 아주 높은 직위에 있는 자일 터였다.
갑주를 걸친 사내는 거침없는 동작과는 달리 표정은 꽤나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숨어서 은밀히 훔쳐보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여자처럼 마른 몸매, 기생오라비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갑주를 걸친 사내를 비웃었다.
“클클클! 백정 놈.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 벌어질 일은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군. 여봐라. 준비는 다 되었느냐?”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의 질문에 뒤에 있던 수하로 보이는 사내가 답했다.
“예. 내성의 순찰을 담당하던 이들 백여 명을 불러들여 매복시켜 놓았습니다.”
“잘했군.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거라. 우리의 명줄이 걸린 일이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에게 포권을 한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나와서 화려한 갑주를 걸친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갑주를 걸친 사내의 정체는 바로 현재 한나라 최고의 실권자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 하진이다.
“너는 누구냐?”
“소인은 태후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러 온 상방감 거목입니다.”
기생오라비의 수하로 보였던 이 사내는 상방감 거목이다. 하진은 갑작스레 나타난 거목을 의심해 볼 법도 했지만 태후라는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반색했다. 하진으로서는 하태후의 전갈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 그래. 태후께선 뭐라고 하시더냐?”
아무런 의심 없이 기뻐하는 하진을 속으로 비웃은 거목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태후께서는 지금 후원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셨습니다.”
“후원에서 기다린다고....? 그것 말고는 다른 말씀이 없으셨느냐?”
“그리고 ‘오라버니의 청을 어찌 거절하겠나?’ 라는 말씀도 얼핏 하셨습니다.”
“그래? 크하핫!”
거목의 답을 들은 하진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만큼 거목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것이리라.
갑자기 왜 후원으로 오라고 한 것일까 충분히 의심을 해볼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진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오직 누이가 자신의 청을 들어준다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다른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이제 후원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구나. 가자.”
“예. 대장군.”
하진은 아무런 의심 없이 거목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가덕전의 후원에 도착을 한 하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다는 하태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눈치를 챌 법했지만, 하진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거목에게 물었다.
“태후께선 어디 계시는가? 태후께서 기다리시겠다는 곳이 정녕 가덕전의 후원이 맞는가?”
거목은 하진이 자신들이 파 놓은 함정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태후는 급한 일이 생겼다고 먼저 가 계시라더군요.”
완벽하게 변한 거목의 말투. 그제야 하진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불안한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먼저 가 있으라니...? 어디로 말이냐?”
“크흐흐! 아직도 모르겠나? 어디긴 어디냐?! 바로 지옥이지! 크하하하! 안심해라. 분수도 모르고 날뛰던 천한 네놈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구나. 단칼에 죽여주마.”
거목의 대답과 동시에 후원의 문이 닫혔다. 그리고 매복해있던 수십의 군사들이 무장 한 채 튀어나왔다.
그들 뒤로는 처음 거목에게 명을 내렸던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로 대장군 하진과 경쟁하며 한나라 황실을 쥐락펴락하는 환관, 십상시들이다.
그제야 하진은 상황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장양... 십상시... 네 놈들...!”
“후후! 그러게 같이 좀 잘 살면 되는데, 왜 이리 우릴 못살게 굴었는가? 잘 가시게.”
십상시들의 우두머리 장양이 손짓을 하니, 하진을 둘러싼 군사들이 서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하진은 크게 당황하며 자신 앞에 있는 군사들에게 횡설수설했다.
“이, 이놈들아! 나는 대장군이다. 너희들은 대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텐가? 아, 아무라도 좋다! 나를 여기서 살려준다면 금은보화와 장군의 관직을 내릴 것이다.”
하진의 꼴사나운 모습에 거목이 대폭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일개 병졸들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장군이라....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오늘 귀한 구경을 하는 구나. 소용없다. 하진! 이들은 모두 우리가 오래 전에 황궁에 심어놓은 군사들이다. 내가 친히 네 놈 목을 베어주겠다.”
거목은 직접 하진의 목을 치기 위해 칼을 뽑았다. 그리고 볼썽사나운 얼굴을 한 하진을 향해 막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목소리가 들렸다.
“야이! 미친놈아!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진짜 목숨이 한 열 개는 있는 것이냐?”
“아! 이거 좀 놓으쇼. 형님. 방금 못 들었소? 금은보화는 물론 장군직도 내려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출세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오.”
거목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웬 두 명의 병사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