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자마자 사고치다 (1)
이의민의 군 입영은 생각보다 더 쉬웠다.
그래도 외성 경비대에서 한 끗발 날린다는 곽봉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나 보다. 곽봉은 입영 관련 관리에게 화려하게 입을 털며 이의민의 입영을 추천했다.
“이의민이라고, 제가 아주 친동생처럼 여기는 아우입니다. 신분은 확실하다고 보셔도 됩니다.”
“흠.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덩치는 훌륭하구먼. 힘 꽤나 쓰겠어. 알겠네.”
“흐흐. 감사합니다.”
일사천리로 이의민의 입영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실 곽봉의 입김보다는 현재 한나라의 상황이 더 컸다.
안 그래도 지금 한나라는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지러운 시기였다. 그런 혼란한 정국에서는 관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말단 병사들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선임병이나 상급 지휘관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녹봉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한나라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이곳 낙양에서조차 말이다.
그러다보니 제법 많은 이들이 탈영을 해서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병사를 하나라도 더 끌어와야 할 판국에 이의민과 같은 신체건강 한 자가 입영을 했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입영이 처리되고, 이의민은 최종적인 근무지를 배정받게 됐다. 그가 배정 받은 곳은 낙양 외성의 구석진 구역. 다행스럽게도 곽봉과 같은 부대였다.
이의민이 곽봉을 통해 군에 입대를 한지도 어언 한달이 지났다.
“하아암! 형님. 이거 너무 심심한 거 아니오?”
“우리 같은 군졸들은 심심한 게 좋은 거지. 뭘 바라느냐?”
“형님. 오늘 근무 끝나고 한 잔?”
“오늘은 네가 사라. 요즘 마누라 등쌀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거참. 형님. 언제까지 형수님한테 그리 잡혀 살 거요? 사내대장부가 한번쯤은 큰 소리를 쳐야 할 것 아니오. 여자가...! 말대꾸...?! 이리 말이오!”
“지도 앞에서는 입 한번 벙끗 못하면서 안 보이는 데서는 항우 납셨네. 아무튼 오늘 훈련도 끝났으니 갈려면 지금 가자.”
이의민은 평소처럼 곽봉과 시답지 않은 농을 주고받으며 평소 자주 가던 외곽의 술집으로 향했다.
서로 훈련을 담당하던 하급 장교의 뒷담화를 까며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무렵 술집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왔는데 전부 화려한 갑주를 차고 있었고, 얼굴에는 광채가 번지르르 흐르는 것이 보통 신분의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들어온 남자는 허름한 객잔을 한번 둘러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우리가 이런 외곽에서 술을 마셔야 한단 말인가?”
“하하! 본초 형.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않소? 내일은 내성의 객잔에서 실컷 즐기고 오늘은 목만 축입시다. 혹시 모르지. 황제폐하께서 만찬을 하사 하실 지도.”
한 남자의 입에서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객잔 안의 사람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있기에는 뭔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리라.
“야! 의민아. 저 놈들. 딱 봐도 명문가 자제들 같은데 우리도 그냥 나가자.”
“아! 가긴 어딜 가요. 여기 말고 어디가 있다고.”
“이놈아. 괜히 저런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혹시라도 시비라도 걸리면 잘못하면 우리 목이 달아날 지도 모른다.”
곽봉은 얼른 일어나자고 재촉했지만 이의민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짙은 눈으로 방금 객잔에 들어온 사람들을 훑어 볼 뿐이었다.
‘흠! 저 놈들 생긴 거만 보면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이는데? 내가 한번 들어본 이름도 있으려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리를 비키지도 않고 자신들을 관찰하듯 쳐다보는 이의민을 보고 무리 중 한명이 얼굴에 노기를 띈 채 입을 열었다.
“이 무례한 놈! 보아하니 관직도, 이름도 없는 병졸 같은데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어허! 이 사람 공로. 우리가 늦게 들어왔는데 어찌 그리 역정을 내시는가? 하하! 미안하게 됐네. 낙양의 수비병들인가? 나는 전군교위 조조라고 하네.”
‘뭐? 조조?’
이의민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무식한 그라지만 어찌 조조의 이름을 모를 수 있겠는가. 고려의 쓸모없는 문관들도 입버릇처럼 조조의 이름을 입에다 올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의민의 감정은 단순한 놀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은 고려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조조라는 이름값에 놀라 자리를 비켜주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반면, 조조는 이의민이 당연히 자신의 이름과 직위를 듣고 놀랐다고 여겼다. 전군교위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한 때 강직한 북문도위로 낙양에 명성을 떨쳤으니 병졸이라면 마땅히 놀라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의민이 한 번 놀라는 듯하더니 그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본 조조가 오히려 놀랐다.
“하, 하하... 자네. 재밌는 친구로군. 이보게. 관직이 있는 자가 오면 병사들은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예의일세.”
“그렇습니까? 입대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이라 아직 그런 것은 몰랐소.”
분명 예의가 아니라고 일러주는데도 이의민의 태도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마지못해 비켜주기는 하겠다는 듯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처음 화를 냈던 사내가 다시 나섰다.
“저! 저런 시건방진 놈을 봤나! 네 놈은 목숨이 몇 개나 되는 것이냐?”
“당연히 목숨은 한 개... 아니. 두 갠가? 아무튼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자꾸 놈놈 거리는데 언제 봤다고 자꾸 그러슈? 형장은 누군데? 나 알아?”
“이런 천인공노할 놈이! 나는 사세삼공의 명가 원씨 집안의 원술이다!”
원술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으니 눈앞의 이 시건방진 놈이 무릎 꿇고 벌벌 떨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의민은 같잖다는 듯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술? 무명소졸이군. 조조는 들어봤는데, 원술은 처음 들어보는데? 별 이름도 없는 새끼가 어디서 잘난 척이야?”
이의민은 삼국지를 잘 모른다. 조조라는 이름은 워낙 유명해서 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의민은 정말로 원술을 몰라서 한 말이었지만, 원술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여겼다. 원술은 완전히 꼭지가 돌아서 직접 도를 들고 이의민 쪽으로 다가갔다.
“네 이놈! 천하디 천한 놈이 감히! 오늘 네놈의 목을 반드시 벨 것이다!”
순간 이의민의 눈도 돌아갔다. 고려에서 그가 절대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앞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 중 하나가 천출이란 단어였다. 그 단어를 오랜만에 들은 이의민의 눈앞에 보이는 건 없었다.
이의민은 도를 들고 달려오는 원술 앞에 섰다. 그리고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억!
원술은 도를 들고 있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의민이 휘두르는 주먹에 정통으로 안면을 강타당하고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마치 곰의 앞발에 강타당한 것 같았다.
“크어억!!”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사세삼공의 명문가 원가의 원술이 일개 병졸에게 쳐 맞고 나가떨어졌다. 현실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으아악! 내 코! 내 코!”
단 한 대 맞았을 뿐이지만, 원술의 상태는 처참했다. 코가 완전히 부러져 피가 줄줄 나오고 있었다. 앞니 역시 부러져 발밑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무작정 주먹을 휘두른 이의민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고려시절이었다면 누구에게나 할 수 있었던 주먹질이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씨발! 순간 화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의민의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 본 곽봉 역시 혼이 나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이 미친놈아... 이제 어쩔 거야?”
이의민은 그 와중에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개죽음 밖에 없었다.
“형님. 어쩔 수 없소.”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어쩔 거냐고?”
“어쩌긴요. 일단 튑시다.”
말을 마친 이의민은 곽봉의 손목을 붙잡고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객잔의 담을 넘었다. 마치 바람과도 같은 그의 움직임에 객잔 안의 사람들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제야 원소가 정신을 차렸는지 호위병들에게 분노에 찬 일갈을 터트렸다.
“너희는 대체 뭣들하고 있는 거냐? 당장 저 두 놈을 잡아오지 못하겠느냐?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저 놈들의 목을 베겠다.”
잔뜩 흥분한 원소. 하지만 그때 말리는 조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낙양 경비병들인 것 같소. 그러니 그놈들을 찾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 아니겠소? 일단은 공로형의 부상이 먼저요.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한시가 급하니 서둘러야 한다.”
“그래. 그게 맞겠군. 일단 공로부터 살펴라! 이후에는 내 반드시 그놈들을 찾아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잔뜩 흥분한 원소 대신 이것저것 명을 내린 조조는 묘한 표정으로 담벼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없는 병졸인줄 알았는데... 오늘 저 자 때문에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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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을 빠져나와 무작정 도망치는 이의민과 곽봉. 곽봉은 세상이 무너졌다는 표정으로 한탄을 늘어놨다.
“크흑! 이리 도망쳐봐야 소용없을 거다. 우린 이제 죽었다고! 왜 그런 미친 짓거리를 했냐?”
“아! 그 원술인지 원숭인지 하는 새끼가 자꾸 성질을 돋우는데 어쩌란 말이오? 이왕 이리 됐으니 방법이 없잖소. 살길을 찾아봅시다. 일단은 낙양을 벗어나 도망을 쳐야 할 텐데... 형수부터 데리고 올 방법이....”
도망칠 작정을 하고 낙양의 외성 골목 사이를 누비는 이의민. 곧이어 조조 패거리의 군사들이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했다.
이의민은 그들을 피해 숨어 다니는 도중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조 패거리 군사들이 외성은 쥐 잡듯 돌아다니는데 내성 안으로는 전혀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라? 저것들이 왜 내성으로는 전혀 못 들어가지? 그 정도 위치라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놈들, 내성 안에 있는 객잔에 가지도 않고 우리가 있던 객잔에 왔었지? 뭔가 있다!’
“형님. 형수를 이쪽으로 빼낼 걱정 할 필요가 없소.”
“무슨 소리야?”
“저놈들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그럼 우리가 그냥 내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면 되오.”
“진짜 그래도 되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오. 따라오시오.”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이의민. 곽봉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