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2화 (2/175)

2. 그 시대 속으로 (2)

뒤에서 살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오자 군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몸을 떨며 황급히 뒤를 돌아 봤다. 거기에는 이의민이 살기 어린 눈초리를 한 채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래 이의민은 이런 일들에 잘 나서지 않는다. 그가 딱히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고, 더군다나 지금 상황도 매우 혼란스러웠으니 남의 일에 끼어들 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들의 대치 상태를 보니 이곳에 오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려 천 명의 군사들과 홀로 싸웠던 기억 말이다. 그 때의 상황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니 이의민은 자신도 모르게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개 같은 놈들.... 하나를 상대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린 이의민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물론 그 때 이의민의 상황과 지금 상황은 엄연히 달랐다. 하지만 다수의 패거리가 한 명을 다구리치는 건 비슷했다. 그렇기에 이의민은 지금 이 상황을 결코 그냥 넘길 생각이 없다.

한 명을 겁박하던 다수의 군사들은 주춤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들이 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야이 자식아! 너 방금 우리한테 뭐라고 했느냐?”

“귓구녕에 화살을 처박았나. 동작 그만이라고.”

“뭐? 이 미친 새끼가? 이 새끼부터 조져!”

군사들의 목표물이 바뀌었다. 그러자 홀로 도망치던 한 사내가 이의민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이봐! 죽으려고 작정했어? 어서 튀라고! 얘네들은 그 악명 높은 내성 경비대 놈들이라고!”

역시 이의민이 본대로 그들은 군사들이었다. 하지만 이의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의민은 전혀 도망칠 생각 없이 다가오는 6명의 군사들에게 맞섰다.

격돌하는 이의민과 군사들. 무려 6대1 이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이의민의 주먹질, 발길질 한 방에 군사들은 한 명씩 나가떨어졌다. 노쇠한 몸으로도 무려 천 명의 군사를 상대했던 이의민이다. 고작 6명은 식후 운동거리도 아니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현재는 무기가 없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원래 이의민의 특기가 수박(手搏) 아닌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이의민. 6명의 내성 경비대 군사들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어디 사내새끼들이 여럿이서 한 명을 다구리치고 있나? 부끄럽지도 않느냐?”

“뭐, 뭐가 부끄.... 커억!”

“예!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내성 경비대 군사들은 이의민에게 몇 대 더 쳐 맞고 난 이후에는 고분고분해졌다. 평소에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신분을 내세워 거들먹거렸지만, 압도적인 강함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 앞에 그들은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수밖에 없다.

‘망할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히익!’

눈동자를 굴리다가도 이의민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이 쪼그라들었다.

“네놈들. 한 번만 더 이런 짓거리 하다가 나한테 걸리면 그때는 진짜 뒤질 줄 알아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의민의 훈계가 끝나자 그들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이의민은 그 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아차차! 저 새끼들한테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때 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살았어.”

‘그래! 이 놈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그래. 자네가 있었지? 잘됐군. 물어볼 것이 있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저기 보이는 산이 미타산인가? 최충헌은 어디 있는가?”

“뭐? 미타산? 최충헌? 그게 대체 뭐냐?”

“허어! 최충헌을 모른다고...? 그럼 두경승이는 아는가?”

“아니! 충헌이고 경승이고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라니까!”

상대의 말에 이의민은 고려가 아니란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여기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의민이 계속 고민에 빠졌을 때 상대는 이의민을 잡아끌었다. 아마 답례라도 하려는 것이 염치가 없는 자는 아닌 것 같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세. 그래도 내 은인인데,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군. 넉넉하진 않지만 둘이 마실 술은 충분할걸세.”

술이라는 말에 이의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가는 도중 궁금한 것을 하나 둘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봐!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 정말 송나라가 맞는 것인가?”

이의민을 데려가던 사내는 질문을 받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의민이 어디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송나라? 후우! 내 생전 그런 나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네. 잘 듣게. 여기는 한나라일세.”

사내의 대답에 이번에는 이의민의 표정이 멍해졌다.

‘한나라? 그게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가....? 잠깐? 한나라라면 설마 그 한(漢)....?’

아무리 무식한 이의민이라도 한나라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한나라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의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놈아!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아까 구해줬다고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이의민이 막말에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맞는 말을 했는데도 지랄... 아니. 그것보다 내가 구해준 게 고마워서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딱 봐도 나이도 어린놈이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이야?”

“뭐? 어린 놈? 이 새끼가 지금 누가 누구한테....?! 야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야! 내가 이미 오십을 넘은 지 훌쩍이다. 네가 네 어미젖을 빨고 있을 때, 난 전장에서 창칼을 들고 있었단 말이다!”

여전히 이의민을 미친놈 보듯 보는 사내. 하지만 곧 측은하단 눈빛을 보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에서 며칠 푹 쉬게나. 며칠 쉬다보면 괜찮아지지 않겠나?”

이의민은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상대의 태도에 또 흥분을 하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이의민이라도 이 정도 되니 알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아까 냇가에 모습을 비췄을 때, 분명 젊어진 모습이었어!’

재빨리 자신의 팔다리를 다시 훑어보는 이의민. 피부가 탱탱하고 매끄러운 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정말 내가 20대의 몸이 됐다고....?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당최 모르겠군. 아무튼 내가 젊어졌다는 거 아닌가? 내 몸이 20대로 돌아갔다니...’

이의민이 다시 날뛸 줄 알았는데, 조용해지는 걸 본 사내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걸어왔다.

“쯧쯧. 꿈이라도 꿨나보군. 어쨌든 간에, 우리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나? 내 이름은 곽봉일세. 낙양 외성의 보사(步士)지.”

“내 이름은 이의민이다. 낙양이라... 정말 한나라인가...? 그런데 아까 그 자들도 보사인가?”

“누구? 그놈들? 맞아. 그 놈들 역시 보사지. 허나 그 놈들은 내성 보사고 나는 외성 보사일세. 말단병졸인 보사라도 급이 있다는 얘기지. 당연히 외성보다는 내성 쪽이 높네. 외성 사람들은 내성 사람들 눈치 보기 바쁘지. 아까도 보게. 잘못은 그놈들이 먼저 했는데... 에이! 씨팔놈들.”

고려의 상장군이었던 이의민이다. 고려시대도 딱히 다른 점은 없었기에 이의민은 곽봉의 말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민은 일단 곽봉의 말을 믿고, 이곳이 한나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도 받아들였는데 그 까짓 거 못 받아들일 것도 없다.

“그럼 지금 한나라 황제는 누구인가?”

“헛! 누가 듣겠네. 황제 폐하를 그리 함부로 부르면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걸세.”

“그래서 누구냐고.”

“대장군 하진의 조카 되시는 분이 현재 황상에 앉아계시네.”

“하진? 젠장! 모르겠군.”

삼국지에 대해서는 진짜 말 그대로 유관장, 조조, 동탁 정도의 인물만 알고 있는 이의민이었기에 하진이란 이름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어느새 곽봉의 집에 도착한 둘.

“여보! 마누라! 손님 왔으니 밥 좀 내오구려.”

“아이고! 이 화상아! 우리 밑 가리기도 바쁜데 어디서 군식구를 데려왔어!”

“없이 살아도 서로 돕고 살면 얼마나 좋은가?”

“하이고!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있네! 쌀이라도 한 가마니 가져다주면서 주둥이를 나불대던가!”

“어허! 이 사람이! 손님 앞에서....”

“당신이 알아서 해!”

“어휴! 저 성질머리 하고는.... 나니까 데리고 살지. 험험! 미안하네. 의민. 잠깐만 기다리게.”

곽봉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주섬주섬 부엌으로 가더니 직접 술상을 하나 가져왔다. 반찬이랄 것도 딱히 없는 초라한 상이었다. 밥에 나물 한 종류, 그리고 딱 술 한 병이 있는 밥상이다.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던 이의민의 성에는 당연히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이의민은 걸신들린 듯 먹어치웠다.

“거 안 뺏어 먹으니까 좀 천천히 먹으라고. 자! 술 한 잔 받지.”

“고맙군.”

“헌데 내 진지하게 충고 해줌세. 내가 언짢아서 그런 건 아니고.... 나야 괜찮다지만, 밖에 나가서 아무한테나 그리 함부로 반말 짓거리를 하고 다니면 곱게 죽지는 못할 걸세. 그러니 제발 좀 고치게나.”

곽봉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내 몸이 이리 됐으니, 내가 정말 젊은 게 맞지... 그래! 어찌됐거나 젊어지면 좋은 거 아니겠나? 게다가 다른 뜻은 없고 호의만 가득한 사람이니...’

이의민의 기준으로 보자면 처음 보는 자신에게 술을 대접하는 사람은 두 종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던가, 아니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가.

곽봉이 자신을 죽이려고 이러지는 않을 것이니 호의만 가득한 사람이라고 멋대로 단정 짓는 이의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의민은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소. 감사히 먹겠소. 곽봉 형.”

화끈한 이의민의 대답에 곽봉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크크. 그래. 이제야 뭔가 좀 체한 게 내려가는 것 같구먼.”

이의민은 곽봉에게 궁금한 것 몇 가지를 더 물어봤다. 주로 현재의 시대 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진이라는 이름으로는 알아 낼 것이 없었던 이의민. 하지만 몇 마디 대화 끝에 드디어 그가 아는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십상시라고?”

“그래.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들과 대장군 하진의 세력다툼이 한창이지. 크큭. 우리 같은 놈들이야 누가 이기던 별로 상관은 없지만.”

이의민도 십상시는 알고 있었다. 부패한 환관들의 대명사와도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도 고려 조정에 있을 때는 ‘에휴! 이 십상시 같은 놈들.’ 이라는 말을 자주 쓸 정도로 십상시는 유명인물들이었다.

‘그럼 지금은 십상시들이 판치던 한나라 말기로군... 그 유명한 삼국지 시대로구나!’

시대 상황을 대충 감 잡은 이의민. 그의 몸이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지금이 삼국지 시대라면 그야 말로 난세 중에 난세다. 자신이 살았던 고려 시대와 완전 판박이다.

난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재산과 목숨을 앗아가지만,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어마어마한 광영이 비치는 시대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의 이의민처럼.

이의민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렇게 촌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봉 형. 낙양 외성의 보사라고 하였소?”

“그렇지. 보사라도 해야 처자식들 먹여 살리지 않겠나?”

“혹시 거기에 나도 좀 꽂아줄 수 있소?”

고려시대에서는 정점에 올랐었던 이의민 입장에서 고작 보사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썩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서두르지 않았다. 고려 때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기로 마음먹은 이의민이다.

이의민의 말에 곽봉은 저도 모르게 입이 귓가에 걸렸다. 안 그래도 이 놈을 어찌 꼬셔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의민이 자신과 함께 외성 보사가 된다면, 적어도 오늘 같은 수모는 당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크하하! 안 그래도 언제 그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네. 내일 당장 나랑 같이 감세. 이 형님이 그래도 외성에서는 나름 한 끗발 날린다네. 내 추천이라면 입영은 크게 어렵지 않을 걸세.”

이의민은 그 길로 한나라 병사가 되기 위해 곽봉과 함께 외성경비대를 찾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