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시대 속으로 (1)
산악지대에서 건국된 나라인 만큼, 고려에는 수많은 산이 있다. 불가의 아미타불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미타산은 금강산이나 설악산 같은 명산은 아니지만, 특유의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을 자랑하는 산이었다.
그리고 그 산 중턱에 멋들어진 집이 하나 있었다. 다른 민가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걸 보면 평상시 사람이 쓰는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집 자체는 딱 봐도 고풍스러우면서도 으리으리해 보이는 것이 아마도 고관대작의 별장으로 사용하는 집이리라.
주변 풍경 역시 미타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다. 이 별장의 주인은 가끔 이곳에서 미타산의 화려한 절경을 즐기는 취미라도 있나보다.
한없이 화려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주변 풍경 속에 있는 그림 같은 별장. 하지만 주변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굉장히 흉물스런 광경이 이 별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평화롭게 지저귀던 새들과 곤충 소리는 온데간대 없다. 그리고 푸르러 보이는 초목들 역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호랑이가 사냥이라도 한 것일까? 그건 아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들이었지만, 대충 어림짐작으로만 봐도 수백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의 시체였다.
몇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체들 앞에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바닥에 댄 대부를 의지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아마 그 사내가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리라.
하지만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해 보이는 그 사내 역시 눈앞의 시체들과 같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 앞에는 시체들 말고도 서슬 퍼런 기세로 멀쩡히 도검과 창을 들고, 사내에게 맞선 군사들 수백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들의 복장으로 보아 고려의 관군이 틀림없다. 도대체 고려의 관군 군사들이 왜 수백의 희생을 내면서까지 이 한 사내를 잡으려고 안달인 것일까?
관군과 맞선 사내의 정체는 바로 이곳 미타산에 있는 별장의 주인이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고려의 지배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이자 판병부사(判兵部事)인 이의민이었다.
고려의 왕인 명종도 한수 접어준다는 권력자가 어째서 관군들에게 쫓긴 채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 이놈! 최충헌! 네놈이 감히!”
이의민은 수백의 군사들 뒤편에 있는 한 장수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있는 관군을 이끄는 자, 고려의 절대 권력자인 이의민을 이 꼴로 만든 자가 바로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바라보며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휴우! 정말로 대단하단 말로도 모자라는군. 괜히 금강야차(金剛夜叉)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척준경과도 비교가 가능하단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 설마 하여 일천 기를 투입했는데, 적게 데려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최충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의민 하나를 잡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인원을 희생시켰다. 그만큼 이의민이 보여준 가공할 무력은 대단했다.
최충헌의 말마따나 천 명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수백의 관군이 이의민 한 명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이의민은 이미 수백 명이 넘는 관군을 쓰러뜨리고 아직 숨이 붙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이의민도 사람이었다. 한 명이 무려 천여 명의 군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수백을 쓰러뜨렸지만, 최충헌과 남은 수백 앞에서는 그저 숨만 붙어 있는 채 간신히 서 있을 뿐이다.
최충헌은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나섰다.
“이의민. 그러게 적당히 분수를 알고 지냈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크큭! 분수를 모른다? 대체 내 분수가 무엇인가?”
“네놈은 종놈이다! 종놈이 지금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이미 분에 넘치거늘,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보았다. 너는 선왕을 함부로 시해하고, 결국 네놈 스스로 옥좌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더냐?”
“크하하! 이미 우리의 손에 의해 옥좌의 주인이 바뀌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는 말이 얼마나 개소리란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내지 않았던가! 솔직해지거라. 최충헌. 역모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결국 이 자리를 나대신 네놈이 차지하고 싶다는 말 아니더냐! 쿨럭!”
이의민은 피를 토하면서도 울분에 찬 외침을 내뱉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최충헌과 권세가들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온몸의 상처에서 피가 세어 나오고 있었고, 점점 힘이 떨어지고 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어차피 이리 될 것을....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아득바득 살았단 말인가...?’
최후를 직감한 이의민. 그의 머리에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소금장수였던 아버지와 종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의민은 경천동지할 능력을 지녔음에도 자신의 신분 때문에 언제나 괄시를 당해왔다. 그는 천출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해왔었다. 온갖 어려운 일, 더러운 일 가리지 않고 말이다. 선왕이었던 의종 살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겨우 권력을 잡나 했더니, 끝내 모략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됐다.
이의민은 갈 때 가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고 싶었다. 특히 군사들 뒤에서 여유롭게 서 있는 최충헌은 반드시 데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비겁한 놈. 쿨럭! 사내대장부로서 부끄럽지 않더냐? 조금이라도 기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와 제대로 맞서봐라. 내가 이 꼴이 됐는데, 아직도 군사들 뒤에 숨어 있느냐?”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 나도 네놈의 그 무지막지한 용력은 인정한다. 그러니 난 네놈 같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생각은 없다.”
“크으... 끝까지 대장부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거냐? 날 없애고 절대 권력을 잡는다한들 네놈의 이 꼴사나운 모습은 영원히 비웃음거리가 되리라.”
“후훗!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놈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
“뭣이?”
“역사의 기록이야 승자가 쓰기 나름이다. 네놈은 이곳에서 수많은 군사들을 상대하며 장렬히 전사한 것이 아니다. 내가 단칼에 네 목을 벤 것이다. 역사에는 그리 기록이 될 것이니 저승에서 잘 지켜보아라. 만적! 뭐하느냐? 저 천한 놈의 목을 당장 베어내지 않고.”
“최, 최충헌...! 이 더러운 놈!”
원래 떨리던 이의민의 몸이 분노로 인해 더 심하게 떨렸다. 최충헌은 그의 목숨뿐 아니라, 무장으로서의 명예까지 말살 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말을 마친 최충헌은 뒤를 돌아보며 신호를 주었다.
“잘 가게. 금강야차.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아쉬워 말게. 나만큼은 네 최후를 기억해줄 테니.”
“최충헌!!”
이의민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최충헌에게 나아갔다. 하지만 수십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그의 길을 막았다. 여태껏 수백을 쓰러뜨린 이의민이었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그의 손에 간신히 들려있는 거대한 대부를 다시 휘두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수십의 군사들과 몇 번의 합이 오가고, 끝내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숨이 끊어지고도 무엇이 그리 원통한지 대부에 기대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그의 몸이 쓰러졌다.
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4번째 지배자이자,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이의민은 그렇게 미타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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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여긴 대체....?’
이의민은 황당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다. 분명 자신은 죽었었다. 수십 군사들의 검에 목이 꿰뚫린 느낌이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은 목에 상처는커녕 몸에 생채기 하나 없었다. 거기다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듯한 개운함이 느껴졌고, 온 몸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몸만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평생 고려 곳곳을 누벼왔던 그는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마을 풍경은 고려에서 봐왔던 것들과는 분명 다르다.
‘뭐야? 내가 죽어서 저승에 온 것인가? 망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인가?’
하지만 생소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저승 같지도 않았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죽어서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죽으면 황천을 건넌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전설처럼 들려오는 저승사자 같은 것도 없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풍경은 인세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최충헌에게 당했던 것이 꿈일 리도 없었다. 그때의 분노, 죽음 직전의 느낌,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이의민은 일단 주변의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 헛!”
이의민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켰다.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은 평소 그가 쓰던 고려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송나라 말이었다.
‘내, 내가 어찌 송나라 말을 알고 있는 것이지? 아니?!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도 송나라 말로 하고 있군! 대체 어찌 된....?’
생각에 빠진 이의민은 순간 자신의 팔을 자세히 보았다. 상처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피부가 달라졌다. 마치 젊은 시절처럼 매끈해져 있었던 것이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마침 근처에 작은 하천이 하나 있었다. 이의민은 급히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하천에 비춰보았다.
그 모습은 분명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나이를 적잖이 먹으면서 매일 기름진 음식과 술에 찌든 원래 그의 몸이 아니다. 20대 초반 시절의 쌩쌩한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젊어진 것인가? 그런데 내가 송나라 말을 하는 건 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의민은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사람이 보이면 아무나 하나 붙잡고 지금의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다.
이의민이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뜀박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가 박자 없이 뒤죽박죽인 것을 보니 다수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이의민의 눈앞에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일곱 명의 사내들이었다.
“헉헉! 이 개새끼들이 나 하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그러게 적당히 좀... 헉헉! 도망가지 그랬느냐. 누가 외성 놈 아니랄까봐 도망하나는 기가 막히는 구나.”
그들의 대화를 듣고 보니 저잣거리를 포함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추격전이었다. 아마 왈패들 간에 싸움이라도 벌어져 이런 추격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평소라면 이런 왈패들의 싸움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이의민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그들은 일반 왈패들과는 조금 달랐다.
‘저놈들 역시 송나라 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다른 건 몰라도 여기가 고려가 아니란 것은 확실하구나. 게다가 저 놈들의 복장은...’
모두가 하나로 통일된 복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얼핏 보니 군복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들 역시 이의민의 존재를 눈치 챘다. 무리에 있던 군인 하나가 이의민을 보며 거들먹거리며 말을 건넸다.
“보아하니 길 잃은 농민 같은데, 이 옷만 봐도 우리가 누군지 알지? 내부의 일이니까 괜히 입 함부로 놀리지 말고 갈 길 가라.”
그들은 그 말을 끝으로 이의민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한 사내를 포위했다. 마치 이의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러게 외성 놈이 왜 우리의 심기를 건드려? 오늘 어디 한군데 부러질 각오해라.”
그들이 한 명을 빙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실력행사를 하려 할 때였다.
“동작 그만.”
그들의 뒤쪽으로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