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 각자의 별 속에서
「 아비게일은 평생 몇 개의 빵을 만들 수 있을까? 」
원래대로라면 아비게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 게 맞았다.
절대 권력이 이동하는 때이니만큼 관리 감독할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왠지 의욕이 없는 그는, 업무를 나누어 밑의 사람들에게 배당해 버렸다.
아비게일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그만큼 일에 매달렸으면 이제 어려운 일은 밑의 사람에게 맡기고 여유를 가져야 할 때도 되었다.
나이가 든 아비게일은 은퇴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열심히 달려온 인생이지만 모든 걸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시들해져 버렸다.
“이제 쉴 때도 되었지.”
그는 모두가 멜라니의 계승식으로 바쁜 날에도 열심히 펜대를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종이를 넘기기를 몇 시간째.
그는 굽혔던 허리를 뒤로 펴며 신음 내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자 옆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에스가 스승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런 소리 내지 마시고 산책이라도 하고 오세요.”
그러자 아비게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점심때지? 보도블록 짝수로 밟고 올게. 그러면 오후에 행운이 넘친다고.”
그러자 에스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홀수 아니었어요?”
“뭘 모르네. 그건 아침이지. 아침에만 국한된 거라고.”
“아, 네.”
에스는 새삼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며 다시 펜을 잡았다.
아비게일은 능력도 있고 다 좋은데, 좀 그랬다.
그냥 좀 그랬다.
에스는 왜 스승님이 평생 혼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에스야. 나랑 같이 밖에서 점심이나 먹을래?”
“아뇨, 됐어요. 조금 있다가 즉위식에 참가할 옷을 골라야 하거든요. 내일이잖아요.”
“어… 그래….”
단칼에 거절하는 에스를 뒤로 한 아비게일은 밖으로 나갔다.
거리고 나온 그는 먹을 것을 들고 걸어 다녔다.
높은 위치에 있는 그가 채신없게 군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다들 아비게일의 이런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그가 지금 걸어 다니는 거리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고 행복에 젖어 있었다.
과거에 어두웠던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힘차게 살아간다.
보통 때 그런 모습을 보면 아비게일은 없던 힘도 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아닌가 보다.
어느덧 그는 ‘아비게일의 거리’ 앞에 와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착했을 때가 딱 점심때라 그런지, 사람들이 식사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길 위는 한산했다.
아비게일은 벤치로 걸어가 천천히 앉았다.
그는 목을 길게 빼고 자신의 이름이 쓰인 간판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런 말이 갑자기 튀어 나왔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건 너무 불공평해.”
뚜렷한 의식 아래 한 말은 아니었다.
무의식이 뱉어낸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말이 마법처럼 그날 밤의 꿈을 불러온 듯싶었다.
“좀 춥네.”
으스스한 기분 속에서 팔짱을 낀 아비게일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그가 눈을 감고 있었던 이유는, 눈을 뜨고 자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은 밤이었고 아비게일은 꿈속에 있었다.
그리고 아비게일은 그걸 자각하고 있다.
눈꺼풀 밑으로 서서히 세상이 열리자 그는 바다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푸른 물의 세상을 보며 아비게일은 기가 질린 표정이 되었다.
“히익.”
사방이 압도적인 박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방금 그의 옆으로 집채만 한 파도가 지나갔다.
아비게일은 토할 것 같은 얼굴로 그 파도가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원위치 시켰을 때.
한 여자의 등이 보였다.
어느새 아비게일과 같이 바다 위에 서 있는 여자.
그녀의 뒷모습은 묘한 아름다움과 공포가 공존하고 있었다.
아비게일은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굴까?
“너를 여기로 초대한 자.”
“….”
“아니. 그건 아니야.”
여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가웠고, 이지적이었다.
그리고 남의 생각을 거침없이 읽어냈다.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아니. 실례는 아니지. 너는 여전하구나. 이 멍청아.”
아비게일은 그녀에게서 두 걸음 물러섰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데스 크라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거 봐라. 이제 지나간다.”
아비게일은 데스 크라운이 손짓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뗏목에 의지한 채 바다를 지나고 있는 무모한 모험가들이 있었다.
“저들에게 있어 여기는 회색의 세계로 보일 거야. 그러니까 삭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신나는 여행이지. 죽이 맞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아비게일은 미친 듯이 웃는 멜라니, 레드와 유미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인에게 시선이 갔을 때, 그의 가슴이 짜르르 울렸다.
이 꿈이 깨고 그를 다시 잊는다는 게 너무나도 부당하게만 느껴졌다.
‘이건 공평하지 못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야. 왜 그가 잊혀 져야 해?’
아비게일은 화가 났다.
그가 당사자인 세인도 아닌데, 너무 화가 나는 것이었다.
그때 차가운 데스 크라운의 목소리가 아비게일의 흥분에 경종을 울렸다.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이다.
“우리의 여행도 그렇게 될 뻔했어.”
“예?”
“네가 동료들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 여행도 신날 뻔했다는 뜻이야.”
“죄송합니다.”
“기억도 안날 텐데 죄송할 것까진 없어. 신이 되라고 여건을 만들어 줬더니 도망간 게 죄송한 일은 아니지. 그게 뭐라고 죄송한 일이겠어? 사실 별거 아니잖아. 네가 엿 먹인 존재들도 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
데스 크라운의 비아냥에 아비게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과거 데스 크라운과 홀리 크라운은 자신들이 속한 종족이 불행해질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불행을 막고 싶었다.
“이봐 아비게일.”
“예.”
“솔직히 너를 완전히 믿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그래도 제구실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도망가다니. 넌 정말 짜릿한 놈이야.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짜릿한 놈이지.”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은 신을 만들어 내기로 합의했다.
종말의 끝에서 기다릴 존재.
이노센트들을 구원해줄 존재를 가공해 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초창기에 라이트닝 블러드가 생겨났다.
여러 재능을 가진 그들은 신이 될 자를 도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의무가 있었다.
그중 스포일러들의 역할은 미래를 인지하여 신이 될 자에게 경고를 해주는 것이었다.
스포일러들은 선지자였다.
미래가 돌변하더라도 더듬어서 패스파인더의 구실을 하길 바랐다.
그리고 스포일러 외에도 다른 라이트닝 블러드들의 구심점이 될 존재가 바로 아비게일이었다.
“너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은 인간에게 진화와 깨달음의 기회를 주었다.
그건 아비게일의 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나씩 다가오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 두 자매는 신을 완성해서 내놓는 것이 아니라, 아비게일이 각성하는 그 길 자체를 인간들에게 선물한다.
그 과정을 인간들과 이노센트들이 지켜본다.
그리하여 구원받는다.
그 구원의 끝에는 라이트닝 블러드들과 신이 있었다.
결국 인간과 이노센트는 최후에 동시 수혜자가 되어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수태하는 것이었다. 모든 계획이 순항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비게일이 도중에 도망쳐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과거를 삭제했고 힘도 포기했다.
동시에 그건 책임도 내려놓는 행위였다.
그럼으로써 아비게일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무한한 책임에서 말이다.
신이 되려는 자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선택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현명한 선택을 하더라도 무조건 따라오는 반대급부와, 파기된 가능성.
선택에서 파생되는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때론 타인의 죽음도 짊어져야만 한다.
모든 결정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었고 부조리 또한 존재했다.
그건 아비게일에게 있어 가혹한 고문이었다.
끝없는 선택.
그리고 몰려오는 책임.
선을 지향하려면 악도 끌어안아야만 했다.
빛과 어둠은 본디 한 몸이기 때문이다.
많은 존재를 구원하라고 만들었더니, 그는 결국 자신을 구원해 버렸다.
자신만, 구원해 버렸다.
그러니 데스 크라운 입장에서는 아비게일이 도저히 사람 새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꾹 참고 아비게일에게 요구했다.
“말해, 아비게일.”
“예?”
“그런 얼빠진 얼굴 하지 말고, 내게 말하라고. 간청해. 마음에 품은 소원을 들어 달라고 말이야. 내게 바라는 게 있잖아.”
“무슨 소원을요?”
그 말을 들은 데스 크라운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렇게 모습을 보인 데스 크라운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건 오히려 아비게일에게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아름다운 여자와 상성이 좋지 못하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잘 들어. 야, 이….”
그녀는 저절로 나오려는 쌍욕을 도로 집어삼켰다.
“그러니까 이건 앙갚음이 아니야. 단지 소원에 대한 소소한 대가일 따름이지. 너는 오늘 밤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아주 뼈 마디마디에 깊게 새겨주마.”
“그… 그러니까 제가 빌어야 할 소원이 뭔데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시고 말씀을 하셔야죠.”
지금 아비게일 처지에서는 좀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는 과거를 기억 못 한다.
그리고 눈앞의 데스 크라운이 자신을 왜 여기로 불러들여 다그치는지도 몰랐다.
앞뒤 사정을 이야기해 줘야 이해할 것 아니겠는가.
그래야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아비게일은 끝까지 구체적인 언질을 받지 못했다.
데스 크라운은 천천히 멀어지는 뗏목에 힐끔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아비게일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을 때.
아비게일에게는 그게 곧 지옥의 시작이었다.
* * *
“음식을 만들어야겠어.”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아비게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있었고 간밤에 이가 몇 개 빠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저 미친 듯이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그가 음식을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그리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다 아비게일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결국 아비게일은 빵을 엄청나게 만들었다.
주방장은 아비게일이 만드는 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외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건데 이건 좀 심한데요?”
그러나 아비게일은 주방장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밀가루를 치댔다.
과거 더이스가 아비게일을 다그쳤던 방식은 그 당시 아주 적합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풍족한 환경이었고, 과거의 여건과는 아주 달랐다.
여기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꼭 살아있는 동물을 잡지 않아도 음식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재료도 도구도 넘쳐난다.
“잠시만요. 마구 만든다고 사람들이 무조건 먹는 게 아닙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떨까요?”
주방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비게일은 계속 빵을 구워냈다.
설마, 빵을 빚어내는 마성의 기쁨에 눈을 뜬 것일까?
하녀들과 요리사들이 뒤에서 수군대며 ‘왜 저럴까?’ 싶은 표정을 지어도 아비게일은 열심이었다.
결국 두손 두발 다 든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놔두면 저러다 결국 제풀에 꺾이겠지 싶었다.
그리고 아비게일이 만든 빵을 지나가던 맥이 우연히 집어 먹었다.
“이거 맛있는데?”
그렇게 말한 맥은 빵을 계속 집어 먹었다.
아비게일이 만든 빵은 생긴 것과 딴판으로 기막히게 맛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집어 먹었을까?
맥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멀리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주방장이 뛰어왔다.
“무슨 탈이라도 나신 겁니까?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전문가가 음식을 다뤄야 하는 건데! 잠시나마 공권력에 무릎을 꿇은 제가 죽일 놈입니다!”
하지만 맥은 한동안 창백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비게일을 보더니 빵 조각 하나를 들어 그에게 권했다.
아비게일을 그것을 받아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런 아비게일을 본 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게일은 간밤의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지독한 고통의 흔적은 몸에 남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빵을 만들고 싶은 이유도 몰랐다.
그냥 어느 날 벼락 치듯이 꽂혀, 빵을 엄청나게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렇게 만든 빵은 볼품없었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그리고….
빵을 다 먹고 난 아비게일은, 마치 망치에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인님?”
* * *
화창한 어느 날, 동화책을 읽던 소녀가 말했습니다.
“엄마.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다음이 뭔지 알아?”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는 그것으로 끝이야. 그다음은 없어.”
그러자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한번 가볼래?”
엄마가 무슨 뜻인지 몰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소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르면 우리 모두 거기에서 다시 만날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다음에 말이야.”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그만하고 이거나 먹자.”
“이게 뭔데?”
“어렸을 때 곧잘 먹던 건데 기억 안 나? 세이지 롤리팝 미트 스튜.”
“….”
* * *
각자의 별 속에서.
「 영원히 기억하겠다.
그 쓸쓸한 다짐이, 좁디좁은 얼음 굴을 채우는 유일한 의미였다.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던 남자는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견뎌냈다.
인내하고 다시 인내했다. 」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별 안에서도.
별 밖에서도.
아주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고,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잊었지만 별 안에서 분명 존재했다.
스치는 바람.
저물어 가는 하늘의 풍경.
그 밑에 펼쳐진 바다.
푹신한 모래사장은 언제나 그녀를 품고 긴긴 시간을 견디어 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궁금증을 풀었지만 오래전에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으니 시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시도가 있었다면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일까?
수백 번?
수천 번?
그녀는 아이처럼 다리를 드러내고 해변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바다는 흐린 하늘 아래의 바다였다.
회색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면 축축하고 더욱 생동감 있는 색을 띤 모래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그 앞의 바다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천천히 비를 맞았다.
그 광경은 관찰자의 감성을 평소와 다르게 재가공했다.
그녀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이 별 위에서 영원히 홀로 존재해야만 했다.
그 존재에게 말을 걸어줄 타인은 없다.
하나의 풍경 속에서 하나의 정물처럼 자리해, 끊임없이 그 풍경을 마음에 담고 존재할 수 있는 일.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다.
그렇게 무구한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하나둘씩 내려놓게 될 것이다.
시간.
여자라는 성.
인간이라는 정체성.
언어.
행동하는 법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오히려 움직이는 바다가 그녀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게 된다.
파도 옆을 걷는 여자는, 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계속 걸어 다녔다.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걸을래?”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손 앞에서 망설이기엔 너무 아득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므로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어디로?”
“모르겠어. 지금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었거든. 그런데 네가 나타나고 이 별이 돌변했어. 갑자기 의미를 품어 버렸어.”
그녀의 말에 남자가 웃었다.
영원히 기억하겠다던 그 쓸쓸한 다짐이, 한때 그의 내면을 채우던 유일한 의미였다.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는 그렇게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남자는 여기 서 있었다.
한때 그를 황홀하게 했던 존재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꿈을 꾸는 표정을 지으면 그는 꿈을 꿀 것이다.
그녀가 웃으면 그도 이렇게 웃는다.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이처럼 영혼과 가슴을 뒤흔들고,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것이었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런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남자가 말했다.
“가자.”
모래사장 위로 발자국이 생겨났다.
길게 이어지는 발자국의 끝에서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가끔은 장난처럼 모래를 발로 차기도 하면서, 그렇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그들의 옆에는 바람과 파도가 내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둘만의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외전 끝.>
그동안 검은 왕을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