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
& 그에게 경배를 바친다.
「 저는 당신이라는 가족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정녕 행복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아끼는 사람으로서 부탁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위해 웃으며 살아 주세요. 」
* * *
왕위 계승식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다.
홀리 레이크의 경우에는 당연히 성직자를 대동시킨다.
왕관을 씌워주는 교황 외에도 성직자가 나서서 식을 진행하는 것이다.
동맹 관계인 귀족이 나와 중간에서 왕관을 운반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다양한 형식이 있을지언데, 처음으로 치르는 글리터의 방식은 좀 유별났다.
아무래도 멜라니의 심중이 반영되었을 거라고 봐야 하는 계승식은, 처음부터 파격적으로 시작했다.
축하를 위해 내성 쪽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기사들이 한결같이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수들의 손에 들린 깃발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교차하는 쌍검과 검은 왕관.
성검이야 글리터에서 유명하니 한쪽은 성검이라 치면, 다른 하나의 검은 무엇일까?
게다가 검은 갑옷도 그렇지만, 깃발에 그려진 검은 왕관은 아주 불길해 보였다.
어디 전쟁터로 몰려가는 것도 아니고 왜 저런 복장과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일까.
경사스러운 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 모였나? 그럼 가자.”
연단에 오른 멜라니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녀의 곁에는 세리스가 함께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멜라니와 세리스가 이끄는 대로 행동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현재 여왕이고 다른 한 명은 곧 여왕이 될 권력자였다.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수많은 인파가 행진을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행진은 일단 내성을 한 바퀴 돌았다.
중간에 북도 치고 나팔도 불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내성의 뒤쪽에 도착했다.
그 시각 세인은 탑 안에 있었다.
현재 그는 탑의 위쪽에 있는 게 아니라, 중간쯤에 위치한 방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세인은 한참 전부터 등을 벽에 기대고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늘에 파묻힌 그의 상체는 아주 어두웠지만, 보라색 눈동자는 그 속에서 어느 때보다도 빛났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인의 발치로 다가왔다.
그가 시선을 돌려 발끝을 바라볼 때 뭔가가 옆에서 움직였다.
정확히 말해 계단 쪽이었다.
분명 뭔가가 올라갔다.
그 순간 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참 많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세인이 택할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는 구름처럼 일어나는 미련을 접은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참아야지.”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지.
그게 바로 그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통로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마치 여러 개의 쇠사슬이 흔들리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그 소리를 듣고도 세인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 계단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위를 오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올라가는 도중에 잠시 세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세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세인의 상체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까이 오지 않는 한 얼굴을 확인하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세인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그대로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제는 그들의 시간이다.
세인은 과거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과거의 꿈속에 있는 그를 붙잡는다고 해도,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도 없었다.
다만….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길.”
지금 세인은 과거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이 부러웠다.
그가 지금 누구를 보고,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세인은 그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가 올라가고 난 후 문가에서 소녀가 나타났으니까.
나타난 소녀는 바로 마플이었다.
붉은 망토를 걸친 그녀는 손에 횃불을 끼워 넣는 장식대를 들고 있었다.
“아빠. 침입자가 있는 것 같아. 엄마나 언니일 리는 없어. 지금 계승식 때문에 밖에 있을 테니까. 누군가가 올라오면서 이걸 떨어뜨린 걸 거야. 당장 내가 올라가서 잡을까?”
세인은 대답 대신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 후에는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마플은 세인에게로 걸어와 순순히 안겼다.
그때 마플의 몸에 걸려있는 성검과 마검의 끝이 바닥에 닿아,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동시에 내었다.
* * *
수많은 사람이 탑의 주변을 에워쌌다.
멜라니는 탑 앞에 급조된 연단 위로 올라섰다.
그다음에는 세리스가 뒤를 이었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멜라니의 주황색 망토가 옆으로 나부꼈다.
파란 하늘 아래 멜라니가 입은 갑옷과 의전용 검이 번쩍였다.
옆에 선 세리스 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오늘의 멜라니는 아주 당당하고 멋져 보였다.
그리고 새 시대를 여는 주인공처럼 보였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멜라니가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벗겨진 장갑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녀의 눈부신 손이 하늘 위로 들렸다.
“오늘의 나는 글리터의 손이 된다. 그 손으로 글리터의 미래를 움켜잡을 것이다.”
그러자 기사들이 신호를 보냈고, 나팔과 북이 울렸다.
깃발을 든 기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그 뒤를 빈틈없이 메운 것은 쏟아지는 갈채였다.
예기치 않은 장소였지만 이런 분위기도 괜찮았다.
급조한 장소라고 해서 진지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앞에 서 있는 멜라니의 표정은 매우 비장했으며,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을 방불케 했다.
세리스의 얼굴도 잔뜩 굳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주변에 도열한 기사들은 아주 날카롭고 차가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지금의 멜라니를 부각했다.
지금 그녀는 치세를 펼쳐나갈 현왕보다는 차라리 군왕에 가깝게 보였다.
“들어라 나의 백성들아. 피가 다를지언정 같은 이념과 북부의 정의. 든든한 동맹. 성검과 신이 우리와 함께한다. 그 모든 것이 모여 내가 서 있는 글리터다.”
멜라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모든 것의 앞에서 나는 맹세하겠다. 내 삶은 온전히 글리터의 영광을 위해 걸어갈 것이며, 글리터를 채운 백성들을 위해 온전한 내 시간을 바치겠노라고. 그러니.”
이 대목에서 멜라니는 세리스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등 뒤에 버티고 있는 탑을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 있는 세인을 떠올렸다.
* * *
종종 마플은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훌쩍 떠나는 경우가 있었다.
세리스와 세인은 그런 그녀를 힘들게 찾지 않았다.
세상에서 마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걸 아니까 말이다.
이번에 마플이 끝마친 여행은 아주 특별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못 본 사이에 살짝 초췌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초췌함은 성숙함으로 거듭나려는 듯 보였다.
마플을 안고 있는 세인은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가에서 검은 물체가 불쑥 나타났다.
녀석의 정체는 검정 개였는데, 코를 바닥에 대고 킁킁거린 녀석이 입구 쪽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 상태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부녀 쪽을 바라보았다.
세인은 검은 개를 바라보며 참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플이 어디에 갔다 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계수가 말한 적이 있었다.
신은 이미 한번 과거에 다녀갔다고 말이다.
“정말 위로 안 올라가 봐도 돼?”
마플이 세인에게 묻자 세인이 대답해 주었다.
“내가 초대한 손님들이야. 그러니 내버려 두자.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거든.”
“손님?”
말을 아낀 세인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세인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마플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이제 부녀는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바깥의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언니는 중부를 정복할 생각이야. 결국 에릭센을 혼내주고 싶나 봐. 언니는 그가 분수에 맞지 않는 수혜자라고 생각해. 비겁하게 아빠의 영광을 빼앗았다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나 있어. 아빠 생각은 어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왕관을 쓴 사람에게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겠니. 부모라 해도 그래서는 안 돼. 하지만 이런 생각은 든다. 멜라니는 전쟁을 일으킬 만큼 모진 아이는 아니야.”
그러자 마플이 ‘흐응.’하는 소리를 냈다.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 수가 없는 소리였다.
세인의 손을 꽉 쥔 마플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그럼 나는 어떤 아이야?”
“너는 멜라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온 소리에 마플이 활짝 웃었다.
“나도 아빠를 사랑해. 아빠. 고마워. 나를 낳아 줘서. 이번 여행을 마치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게 가족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말이야.”
마플의 고백을 들은 세인은 그녀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는 대신, 다시 한번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건 오래전에 그가 마플에게 했던 약속 그대로였다.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더욱 많이 웃어주고 껴안아 주는 일.
그리고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마플은 세인의 미소 띤 얼굴 아래에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세인 몰래 그의 주머니 안에 금화 한 닢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때 마플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멜라니의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왔다.
“그러니 외쳐라.”
세리스에게 왕관을 건네받은 멜라니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런 멜라니에게로 쏠렸을 때, 멜라니는 왕관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왕관을 썼다.
“내 앞에서 목소리 높여 외쳐라.”
지금이 바로 세계를 하나로 통일할 여왕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후에 두 번째 여제라는 칭호를 얻게 될 멜라니가 외쳤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담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검은 왕이여 만세! 나의 검은 왕이여 만세!”
모인 사람들은 당연히 멜라니가 자신을 칭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도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특히나 더이스, 행크, 맥은 목에 실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뻘게진 채로 주먹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검은 왕이여 만세! 우리의 검은 왕이여, 만세!”
“검은 왕에게 경배를 바쳐라!”
“경배를!”
깃발들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땅을 두드리는 소란 속에서 사람들은 크게, 더욱 크게 외쳤다.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소리 높여 부르짖는 그 이름.
멜라니를 따라 연호하는 검은 왕이라는 단어가 성의 뒤뜰을 가득 채우고, 성벽 속에서 끝없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주먹을 높이 올린 그들은 검은 왕을 외치고, 다시 한번 외쳤다.
그렇게 주위를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훗날 이 열기는 북부 전체를 달구고, 대륙 전체를 열정에 빠뜨리게 된다.
“나의 검은 왕에게 경배를 바쳐라.”
모두가 소리를 지르는 곳에서 멜라니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거기에는 미소 지으며 서 있는 세리스가 보였다.
눈을 마주친 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둘만이 알 수 있는 미소를 교환했다.
“나의 아버지. 역사가 잊은 검은 왕에게”
멜라니의 속삭임이 군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맴돌았다.
“경배를 바쳐라.”
* * *
탑 밖을 가득 채운 외침 속에서 세인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빛은 이제 그의 앞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함께 들어온 바람은 기분 좋은 내음도 옮겨 주었다.
그의 옆에는 마플이 있었고, 밖에는 멜라니와 세리스가 있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은 끝났고 이제 모두가 행복해지는 날만이 남았다.
그들은 그리하여 마침내, 이곳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마플은 세인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바깥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은 상태로 지금 이 순간을 음미했다.
그녀가 눈을 살짝 뜨고 올려다보았을 때, 어둠에 잠겨 있는 세인의 얼굴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눈동자가 깜박였다.
마플의 시선을 눈치챈 세인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을 발견한 소녀의 가슴 안에서, 그녀의 깊숙한 곳에 깃든 마플의 영혼이 작게 속삭였다.
나의 검은 왕이여. 만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