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 나의 검은 왕.
생활의 질이 높아지자 글리터의 구성원들은 문화를 향유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운동 종목들이 인기를 타고 떠올랐다.
세인도 종종 경기를 구경하러 돌아다니곤 했다.
가끔 진실을 보는 엘프들이 세인을 발견하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존경을 표시하곤 했다.
그러면 세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다.
어린 엘프들은 거리를 뛰어 다니며 산만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멜라니의 거친 표현을 빌리자면, 이 작은 정신병자들은 이미 글리터에서 손을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해도 놔두자는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어린 엘프들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무장한 상태다.
그리고 항상 초지일관하게 자제력이 없었다.
또 그들이 마플과 죽이 잘 맞는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오페라와 각종 연극이 급부상하는 가운데 어린 엘프들도 무대에 섰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밤! 쇼퐁 크림을 마셨어요~.”
“오늘 밤 쇼퐁쇼퐁!”
모여든 엘프들이 서로의 허리를 잡고 띠를 이루었다.
그 띠는 무대 위를 빙빙 돌았다.
볼이 홍시같이 빨갛고 눈이 큰 엘프가 선두에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무대 앞에 모인 엘프들이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 야!”
“쇼퐁, 쇼퐁!”
“야! 야!”
“오! 오!”
깜찍하게 눈을 뜬 엘프가 자신의 볼을 양손으로 치며 놀라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 표정은 점점 주위로 번져 나갔다.
“하늘에서 쇼퐁 크림이 내려온다!”
그리고 엘프들 사이에서 ‘짠!’하고 마플이 나타났다.
관중석에서 어린 엘프들을 보고 있던 멜라니는 마시던 음료수를 내뿜었다.
옆에 있던 에스의 얼굴에 말이다.
“미… 미안해.”
“….”
에스에게 사과한 멜라니는 무대 위에서 엘프들과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마플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플은 엘프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제 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어린 엘프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모습을 가리고, 다시 마플이 그 속에서 ‘짠!’하고 나타났을 때.
마플은 어른이 되기 직전의 소녀가 되어 있었다.
마플은 아주 아름답게 자라났다.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넘쳤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물론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중석에서 뭐 씹은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는 멜라니도 아름답게 성장했다.
멜라니는 바쁜 업무 속에서도 동생의 공연을 꼭 찾아보았는데, 그건 그녀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플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마플이 금발을 찰랑거리며 소리를 치자.
어린 엘프들이 양손을 위로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쇼퐁 별이 떨어진다!”
그러면 무대 밖에 있는 어린 엘프들도 고사리 같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들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열심이었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영차! 영차! 별을 따는 오늘이 왔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마플과 엘프들은 춤을 추었다.
양 주먹을 번갈아 볼에 대면서 하는 율동이 무대 밖으로 번져나갔다.
흥겨운 리듬 속에서 마플이 깔깔거리고, 엘프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손뼉을 쳤다.
꽃가루가 날아다니고 폭죽이 터졌다.
그 바람에 재채기를 심하게 하는 어린 엘프도 보였다.
핫둘 핫둘!
소리를 내며 열심히 몸을 흔드는 엘프가 그만 흥을 참지 못하고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갔다.
그게 바로 신호탄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대의 마지막은 어린 엘프들의 난입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대체 쟤들은 왜 항상 저딴 식으로 마무리하는 거야?”
기가 질린다는 듯이 멜라니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앉아 있는 에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마플의 성장을 쭉 지켜본 멜라니였다.
아무리 자신의 동생이라 해도, 멜라니는 마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언니! 언니! 오늘은 내가 좀 굉장한 걸 발견했어.”
뛰어 들어온 마플 앞에서 멜라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 그러니?”
멜라니는 언제나 살갑게 대하는 마플 때문에 더러운 성질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멜라니는 내키면 모두에게 독설을 내뱉는 편이지만, 부모님과 에스 그리고 마플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그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성질을 부린다는 뜻이 된다.
마플은 탐탁지 않아 하는 멜라니의 속도 모르고 눈을 빛내며 계속 떠들어 댔다.
“내가 오늘 내 이름이랑 똑같은 이름을 가진 묘비를 발견했어!”
“….”
멜라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자기 이름이랑 똑같은 묘비를 발견하고 저렇게 유쾌한 얼굴이 되는지, 동생을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은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거 아냐?’
멜라니는 심지어 안쓰러운 얼굴이 되었다.
‘얘는 정말 남다른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구나. 평범하긴 글렀어.’
마플은 멜라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히죽히죽 웃었다.
“그래, 대단하구나! 마플. 넌 오늘 엄청난 발견을 한 거 같아.”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해준 멜라니가 기사들의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그러나 마플은 그런 멜라니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묘비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그렇지?”
‘그게 대체 왜! 궁금해!? 내가 그걸 왜 궁금해하고 자빠졌겠냐!’
이런 속마음과 달리 멜라니는 한껏 위선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 언니는 정말로 궁금하구나.”
그러자 마플은 두 손을 모아쥐고 한껏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시 만나면 더욱 많이 웃어주고 껴안아 준다고 되어 있었어! 너무 슬프지?”
그리고 마플은 신기하게도 묘비에 적힌 글씨체가 아버지의 글씨체를 닮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멜라니의 퉁명스러운 말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그래? 나 같으면 돈으로 때워주는 게 훨씬 좋은데.”
설령 진심이 그렇다 해도, 돈이 넘쳐나는 멜라니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마플의 얼굴은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멜라니는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마플이 갑자기 마구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아하.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맞아 그게 더 좋아! 돈이 더 좋아! 이왕이면 금화가 좋아!”
그리고서 마플은 멜라니의 말을 듣지 않고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그녀를 부르려고 손을 들었던 멜라니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은 채 자기 일에 집중했다.
“엘프 꼬맹이를 동생으로 둔 기분이야. 하아….”
* * *
사실 마플은 성숙한 면도 있었지만 그걸 가족들 앞에서 티 내지 않았다.
일부러 속인다기보단,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리스는 멜라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세인과 꼭 붙어살 생각이었다.
그녀는 마플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건 신에게 할 짓이 아니었다.
세리스는 마플에게 어떠한 굴레도 씌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마플에게 멜라니처럼 책임을 요구하는 대신, 항상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그녀 나름대로는 그게 바로 신의 본질이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성애의 발로인 걸까?
여하튼 마플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뭔가를 달성하거나, 진지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웃고 즐거워하면 부모가 기뻐하니 티 없는 아이로 자라났던 것이다.
사실 마플과 있다 보면, 그녀의 신성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 그녀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엄마! 엄마!”
세리스의 소매를 잡은 마플은 그녀를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세리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망아지나 주고 말겠지 싶었다.
“짜잔! 엄마 생일 선물이야!”
마플이 보여준 말을 본 세리스는 매우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말과 마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플은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이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 세리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마플을 꾸짖고 크게 혼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든지. 뭐, 그런 설교를 할 수도 있었다.
세리스는 단 한 번, 성검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렸다.
그녀로서는 그게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마플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문제다.
그러니 마플이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시야였다.
아무리 세리스가 마플을 훈육하고 싶다고 해도, 그녀가 존중해 줘야 하는 마플의 본질이 있었다.
세리스는 그것을 세인에게 배웠다.
각자의 영역을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사람의 판단에 전폭적인 믿음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했다.
그건 혹시 신에게도 통용되는 일일까?
세리스는 마플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때 마플의 눈은 사랑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세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웃음 짓고 말았다.
마플은 아무것도 모르고 세리스의 웃음을 따라 했고 말이다.
이제 세리스는 오래전에 눈물로 헤어졌던 이그문트에게 다가가 손으로 갈기를 쓸어 주었다.
신에 의해 되살아난 이그문트는 세리스의 팔을 향해 머리를 갖다 대었다.
반가움을 표시한 세리스가 뒤를 돌아보니, 마플은 행복한 표정으로 말과 세리스의 유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스는 마플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마플. 내 소중한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해줘서. 지금 엄마는 매우 기쁘단다. 고마워. 내 사랑하는 딸.”
그리고 세리스는 쑥스러워하는 마플을 꼭 안아 주었다.
마플의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을 때, 세리스는 진심을 담아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는, 마플.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엄마, 나도 그래.”
이그문트는 모녀의 따뜻한 포옹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 * *
다시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 멜라니가 왕이 되는 시기가 성큼 다가왔다.
즉위식을 올리기 전, 왕이 아닌 딸에게 세인이 말했다.
그는 언제나 세리스와 멜라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대로 횟수와 관계없이 용서를 빌고 싶었다.
“멜라니. 미안하다. 좋은 아빠가 돼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자 멜라니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면서 손사래를 쳤다.
“뭐야? 이렇게 갑자기? 난데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피식 웃은 세인은 앞으로 멜라니가 좋은 여왕이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머리를 긁적거린 멜라니는 말을 돌리려고 화제를 바꿨다.
세인이 완성한 책을 가리킨 것이다.
최근에 세인은 소설책 하나의 완결을 보았다.
제목은 바로 ‘마플의 모험’이었다.
“이거 언제 마플에게 줄 거야? 그런데 걔는 책 읽는 건 관심 없고, 엘프들이랑 놀기 바쁠 텐데. 볼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마플에게 주려는 거 아니었어? 주인공 이름이 마플이잖아.”
그러자 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맞아 마플에게 보여줄 거야. 그래서 좀 속상했니?”
“흥.”
세인은 콧방귀를 뀐 멜라니를 끌어안았다.
멜라니는 평소에 세인과 그렇게 친근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과거 아버지의 긴 공백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쉽게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부녀 사이에는 분명 존재했다.
그런 마당에 마플만 챙기려는 듯 보이자 좀 서운했을 수도 있었다.
그게 바로 세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품속의 멜라니는 입을 열어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아빠.”
“응.”
“아빠는 서운하지 않아?”
“뭐가?”
“아빠가 과거에 한 일이 있잖아.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모르잖아. 나라면 굉장히 억울할 것 같아. 에릭센이라는 사람은 정작 한 것도 없어. 그런데 다들 그를 존경해. 쥐뿔도 없는 사람을 말이야. 그거 정말 짜증 나지 않아?”
세인은 자신의 가슴에 파묻혀 있는 멜라니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래도 내가 한 일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되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은 것 아닐까.”
그러자 멜라니가 고개를 들어 물어보았다.
“왜 마플은 빼고 말하는 거야?”
“걔는 그냥 그런 것 자체를 신경 안 쓸 거 같아서.”
그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인은 이번에 멜라니와의 거리가 조금 좁혀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글리터에 대해서는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품속의 멜라니는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세인의 생각에 그건 그녀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그는 멜라니에게 조언할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세인이 멜라니에게 원하는 것은 서로 아주 친밀해지는 것이었다.
정다운 딸과 아버지 사이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건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을 연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세인의 생각만큼, 멜라니는 세인과 거리감을 두고 있었을까?
평소에 보여주던 그녀의 어색함이 곧 마음의 거리였을까?
“아빠.”
“응?”
“엄마와 떠나면 성에는 언제 돌아올 거야?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을까?”
“무슨 소리야. 여긴 나의 집이고 우린 가족이잖아. 잠깐 떠나 있어도 항상 여기로 돌아와야지. 그렇게 너와 마플의 곁에 쭉 있어야지.”
그러자 멜라니가 웃었다.
세인의 정색한 얼굴 앞에서 말이다.
“설마 아예 떠나 있는 거로 생각했니?”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세인은 멜라니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멜라니는 그런 세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 * *
멜라니의 즉위식 날.
세인은 최근에 새로 지은 탑에 들어갔다.
딸의 영광스러운 날에 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멜라니와 세리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는 좋은 자리에 참석해서 지켜봐 주는 것도 가족의 몫이었다.
하지만 세인은 멜라니가 충분히 그의 처지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멜라니의 성격에 세인이 안 보인다고 크게 섭섭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글리터와 그동안 자리를 지킨 여왕.
그리고 새로운 여왕이었다.
축복받을 백성과 새로운 시대를 열 여왕.
역사 속에 기록될 인물은 그들로 충분하다.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간 세인은 서가를 정리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시감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 걸까?
그건….
“오늘이었던가?”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던 세인은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천천히 책 한 권을, 자신이 기억하는 자리에 놓아두었다.
* * *
탑 밖은 멜라니의 즉위식 준비로 난리였다.
그중에서 가장 여유로운 자는 아이러니 하게도 멜라니였다.
그녀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행동을 보다 못한 세리스가 다가와 정강이를 걷어찰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윽! 너무 아프잖아!”
“멜라니. 이제 네 신분이 신분인 만큼 품위 좀 지키렴.”
“내가 왜? 이런 날에 동생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아버지도 별로 참여하고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엄마도 시큰둥한 얼굴이잖아!”
그러자 세리스가 콧방귀를 끼었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가족을 챙겼다고. 핑계 대지 말고 좀 의젓하게 행동하란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멜라니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그 후에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서 턱에 손을 올리곤 ‘으음’이라는 신음을 냈다.
그녀가 보기에 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는 내게 자리를 넘기고 아버지랑 빨리 놀러 가고픈 생각밖에 없지?”
“인수인계 때문에 그게 빨리 되겠니? 네가 사고를 치나 안 치나 살펴보려면 또 몇 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할 텐데. 그보다 멜라니. 망토를 약간 느슨하게 풀어봐.”
“여기?”
“아니, 거기.”
“여기?”
“아니, 거기 말고 저쪽 말이야. 저쪽.”
멜라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세리스는 멜라니가 한숨을 내쉰다고 꾸짖었다.
왕이 그렇게 쉽게 낙담하는 몸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휴. 네 아버지의 반만 닮아봐라.”
“엄마는 맨날 그 소리야! 내가 아버지를 안 닮았으면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겠어? 어디 있는 누굴 닮았겠냐고.”
그 말버릇에 멜라니는 다시 세리스에게 꾸중을 들었다.
이번 계승식과 함께 맥, 더이스, 행크의 은퇴식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두 배로 바빴다.
드워프들은 벌써 와인 통과 맥주 통을 굴려대며 한쪽에 쌓아놓는다고 난리였다.
하는 짓을 보면 술통으로 성벽을 만들어도 될 듯하다.
“오늘은 먹고 죽는 거야!”
이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드워프들이 서로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마주쳤다.
이런 날에는 참 죽이 잘 맞는 그들이었다.
그들을 자제시켜야 할 울프 크릭은 팔짱을 끼고 술이 적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망발을 남발했다.
“아. 한때 욕을 전수해 줬던 꼬맹이가 이제는 외교적 파트너라니.”
앞으로 의견차가 보이면 욕설이 오갈지도 모르겠다.
* * *
오늘만큼은 글리터의 시민들도 매우 들뜬 분위기였다.
물건을 잔뜩 실은 마차가 분주하게 오가는 가운데 내성으로 향하는 광대들도 줄을 이었다.
어느 정도 신분이 되는 자들은 식순이 적혀 있는 매뉴얼을 미리 받아보았는데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문의를 하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장소나 복장. 전개에 대해서는 이번에 여왕 되실 분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네. 그것 외에는 해줄 말이 없네.”
한마디로 토 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오니 묻는 쪽에서는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더이스나 행크 같은 경우에는 은퇴하는 마당에, 상식을 벗어난 복장이나 장소 선정에 대해 걸고넘어지고 싶지 않았다.
주인공인 멜라니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이견을 제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더이스와 행크는 지금 멜라니의 계획에 딴지를 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맥을 찾는 일이다.
“은퇴식 준비해야 하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더이스와 행크는 한참을 물어물어 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맥은 내성의 큰 연못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인과 함께 있었다.
맥에게 달려간 더이스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한시가 바쁜데 대체 여기에서 뭘 하는 거예요?”
그러자 맥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아비게일이 만든 음식을 먹어봤나?”
“예? 아비게일이 음식도 만들었어요? 어? 물고기 손질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만들었지?”
“빵을 구웠더군. 오늘 아침에 그걸 먹었어. 내 생각에 자네들도 그걸 먹어야 할 거 같아. 혼자 먹기엔 아까운 맛이거든. 빵을 먹으면서 밀렸던 이야기나 해보는 게 어떨까?”
행크와 더이스는 서로 마주 보았다.
혹시 상한 빵을 먹고 맥이 이상해진 걸까?
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맥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아직 배가 안 찼으니 가서 먹자고.”
“잠깐만요. 지금 그럴 분위기가 아닌데요. 갑옷을 입으려면….”
“배가 든든해야 식도 잘 치르지.”
맥이 둘을 이끌고 멀어질 때, 세인이 몸을 일으켰다.
세인은 천천히 낚싯대를 거두었다.
세 명의 기사에 대해서는 이미 멜라니와 상의를 마친 후였다.
그들은 글리터의 명예로운 오벨리스크에 이름이 새겨질 것이다.
물론 역사서에서도 기록될 것이었다.
은퇴 후에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도록 지원도 넉넉히 해줄 예정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세인은 멀어지는 전우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눈빛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끈끈한 그 감정은 어느 기사들이나 한 번쯤 소망해 보곤 하는 것이었다.
이제 손에 들었던 방패와 검을 내려놓고 각자의 인생 속에서 편히 쉬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세인은 서로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낚싯대를 어깨 위에 얹은 그는 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