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 후일담 (2)
세리스는 밤늦게까지 일정에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회의를 끝냈다.
그 후에 그녀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세인이 있는 탑으로 찾아왔다.
세리스가 자신의 화려한 침실에서 잠드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그녀의 밤은 대부분 세인의 탑이나 서재에서 끝났다.
그녀는 자신의 수많은 서재중 특별히 하나의 서재만을 유독 아꼈는데, 그 서재에는 아주 커다란 창문이 붙어 있었다.
가끔 그 서재에 들리는 울프 크릭은 창문 상태가 안 좋다고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오늘도 국사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의논하다가 창문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떤 놈들이 작업했는지 아주 못되게 해놨군. 감독하는 놈도 없었던 모양이야.”
그러면서 일꾼을 불러 고쳐주겠다고 말했지만 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새어 나오는데 괜찮겠어?”
“상관없어요. 그런데 이걸 감독했던 드워프가 있다면 그 드워프도 문제일까요?”
그러자 울프 크릭은 피식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드워프일 리가 없어. 드워프식으로 창을 만들었지만, 솜씨를 보면 드워프가 한 건 아니야. 이 성을 지은 건 드워프들이지만, 소규모 작업을 하는 인부 중에 인간도 있었다고. 그중 하나겠지.”
“만약에 드워프라면요?”
“왜 자꾸 드워프를 가져다 붙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드워프 자격이 없는 놈이야. 소명 정신이 없는 놈이니까 말이야. 게을러 빠진 놈이겠지.”
그러자 세리스는 아주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나쁜 놈이로군요.”
세리스의 오묘한 시선을 받는 울프 크릭은 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쁜 놈요.”
“….”
* * *
탑의 꼭대기에 있는 세인의 방은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세인과 자신의 두 딸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멜라니는 엎어져서 코를 골고 있었고, 둘째 딸은 완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앙증맞은 발만 드러내놓고 있었다.
저래서야 숨이라도 쉴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세인은 뭔가를 쓰느라고 열심이라 방금 들어온 세리스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세리스는 그게 약간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크게 헛기침하자 그제야 세인이 고개를 들었다.
“왔어?”
“저는 밤늦게까지 고생했는데, 우리 가족은 저만 빼놓고는 다 행복한 것 같아요.”
투덜거리며 다가오는 세리스를 향해 세인이 웃어 보였다.
세리스는 세인의 양쪽을 두 딸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세인의 발치에 앉았다.
“저는 어디서나 찬밥 신세네요.”
“글리터의 주인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어깨를 으쓱거린 세인이 다시 책을 보느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거 알아요? 당신 부하들이 얼마나 말을 안 듣는지? 엄청나게 귀찮게 굴고 있어요. 가끔 성검을 꺼내서 때리고 싶을 정도로.”
“세리스. 말은 바로 해야지. 이제 당신 부하들이야.”
건성으로 대답하는 세인을 보자 세리스는 정말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인은 그런 세리스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런 세인에게 혀를 내밀어 메롱을 해 보인 세리스는, 멜라니의 머리가 낮게 자리한 것을 발견하고 천을 밀어 넣어 베개를 만들어 주었다.
머리 위치가 높아진 멜라니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잠꼬대를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앞뒤가 없는 내용이었다.
“으, 음…. 내가 궁지에 몰리면… 흥분하는 성격인가 보지~.”
세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멜라니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런 게 글리터의 미래라니. 큰일이구나. 큰일이야.”
그러자 멜라니가 엄마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반쯤 뜨고 대꾸했다.
동공이 완전히 풀린 게 잠을 깬 기색은 아니었다.
“엄마. 여기 번개 치고 난리가 났어. 끝내준다고.”
세리스는 멜라니가 자신의 말에 자다 말고 대꾸를 하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멜라니의 눈을 감겨 주려고 하는데, 멜라니가 세리스의 손을 잡으며 웅얼거렸다.
“그래 더 몰아쳐라. 내가 멜라니다. 신난다. 사방이 물바다야.”
그러다가 다시 눈을 감고 코를 고는 멜라니를 내려다보며 세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얘가 몽유병이 있나?”
그런 세리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세인은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세리스는 심통이 났다.
“한 명은 지독한 잠꾸러기에, 한 명은 이렇게 말괄량이인데 당신은 걱정도 안 돼요? 그리고 아까부터 뭘 그렇게 쓰고 있는 거예요?”
“이것저것 적어보는 소설이야.”
“그래요? 그 소설에 저도 나오나요?”
세인은 세리스의 눈을 바라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전혀.”
세리스는 그런 세인의 발을 한쪽으로 빼서 주물렀다.
그러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맥을 목 졸라 죽이고 싶다던가.
더럽게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을 위한 고문실을 지하에 만드는 게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멜라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인이었다.
“멜라니가 오늘은 무슨 사고를 쳤어?”
“승마 교사에게 삿대질했어요. 그리고 욕이 섞인 설교를 한 시간 정도 했어요.”
“그래? 오늘은 그래도 심각한 건 아니군.”
“말한테도요.”
“….”
그러다가 세리스는 깜박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 참. 당신에게 줄 게 있어요. 꽃과 편지에요.”
세인은 세리스가 던진 편지를 잡아챘다.
인장 상태를 보아 세리스가 미리 개봉하지 않은 편지였다.
편지에 서려 있는 향기를 코로 맡아본 세인은 보라색 종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보냈는지 알 거 같아. 그리고 내용도 말이야. 그런데 꽃은 어디 있지?”
그러자 세리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보세요. 이게 꽃받침이에요.”
그러자 세인이 약간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설마, 하는 감정이 그의 얼굴을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세리스는 거침이 없었다.
손바닥을 자기의 턱에 붙인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꽃이에요.”
작게 한숨을 내쉰 세인은 천천히 책과 펜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정색을 했다.
“야. 죽고 싶어?”
“….”
다음 날 아침 모녀 셋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곯아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걸 보면 왜 한 사람이 하나의 침대를 써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발에 걷어차인 이불들도 개판이었고,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져 있는 베개가 가득했다.
그 와중에 멜라니는 제자리에서 몇 바퀴나 돌았는지를 모르겠다.
성장기의 소녀라서 그런지 잠버릇이 아주 험악했다.
난장판을 만든 딸과 아내를 바라보고 있던 세인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아침의 시원한 공기와 함께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창틀을 넘어왔다.
세인은 파란빛으로 젖어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어젯밤 남겨놓았던 차를 훌쩍훌쩍 마셨다.
탑 주변에 깔린 녹색의 식물들은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은 채 세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인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니?”
그리고 그 대답은 엉뚱한 쪽에서 들려왔다.
“예.”
언제 일어났는지 세리스가 세인을 뒤에서 안아왔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세인은 팔을 들어 올려 그녀에게 겨드랑이를 허락해 주었다.
그러자 그의 귓불 아래에서 세리스가 크게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품을 마친 세리스는 그의 목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다음에는 얼굴을 묻더니 질문을 던졌다.
“가실 거예요?”
주어가 빠진 그녀의 질문에 세인 역시 주어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가야지.”
“정식으로 준비할까요?”
그때 세리스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세인이 고개를 저으며 생긴 진동이 몸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홀가분하게 혼자 다녀오고 싶어. 당신에게 온 초대장이지만, 내가 그렇게 해도 될까?”
지금의 세리스는 뒤의 물음보다도 홀가분하다는 표현이 귀에 거슬렸다.
“여보.”
“응.”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우울한 생각을 했어요.”
“….”
“아이를 낳고 나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의 뒤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요. 그런 생각을 한 저는 무책임하고 나쁜 여자인가요?”
세인이 세리스의 손을 풀고 뒤로 돌려고 했다.
하지만 세리스는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완강한 그녀의 저항에 세인은 그녀의 팔을 풀어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계속 등을 내준 채로 그녀의 고백을 들었다.
“당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저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리고 죽음이든 뭐든, 무언가가 당신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저는 질투가 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평생을 책임감에 시달려 왔는데, 우리 가족이 당신에게는 짐일 수도 있겠죠? 저는 가끔 자각하곤 해요. 당신을 향한 저의 집착이 도가 넘어섰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때 세인이 세리스의 팔을 풀어 내렸다.
그리고 뒤로 돌아 그녀의 얼굴을 직시했다.
아마 지금 세리스는 세인의 근처에 붙여 놓은 기사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거다.
그녀는 세인이 돌아온 후 그의 주변에 힐다나 질리언, 잭 같은 기사를 붙였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관해 세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즉 그녀 마음대로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리스. 내 첫 번째 가족은 당신이야. 그리고 당신은 내게 다른 가족도 만들어 주었어. 그런 당신이 나에게 집착한다면, 그런 행동에 자격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과거의 내 행동거지를 돌이켜 보면 더욱 이해할 수 있어.”
“당신의 동의 없이 제가 저지른 일에 화나지 않나요? 저는 당신을 감시하고 있어요. 그건 지탄받을만한 일이에요. 당신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잖아요.”
세인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중요한 거야. 세리스. 자신을 객관적으로 심판하지 마. 여기에는 우리 가족밖에 없어. 우리들의 삶은 우리끼리의 이야기야. 당신이 내키는 대로 행동할 때, 낯부끄러운 말을 할 때, 무리한 것을 요구할 때, 그게 문제가 안 되는 이유는. 이건 오로지 우리끼리의 일이기 때문이야. 이 관계에서 제삼자는 성립되지 않아.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무슨 상관이야? 세상의 규칙이나 기준도 없어. 아무런 규격이 없으니 당신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해. 자유롭게 하라고. 나는 괜찮아.”
“당신….”
“지금은 힘들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멜라니가 이곳의 주인이 될 거야. 그럼 둘이서 여행을 많이 다니자. 좋은 산에도 가보고, 강을 품은 절경도 보고, 유적지도 가면서 둘만의 시간을 갖는 거야. 세리스. 나의 아내. 나의 기사. 나의 여왕.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가져도 좋아. 그게 뭐든 당신이 내게 하고 싶은 것이라면. 나는 언제나 기꺼이 당신을 허락할게.”
세인의 손가락 사이에서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을 받아 끊임없이 반짝였다.
둘은 잠시 그것을 같이 바라보았다.
이제 세리스는 약간 마음이 놓이고, 그리고 감동을 한 얼굴로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때 세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놈의 꽃받침만 아니면 다 수용할 수 있거든.”
둘의 시선이 갑자기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리스가 웃으면서 세인의 가슴을 미는데, 세인이 다시 말했다.
“난 정말 그놈의 꽃받침만 아니면 다 괜찮아. 하지만 인간적으로 꽃받침은 너무 했다. 그렇지? 손찌검을 부르는 애교야. 그건.”
이제 세리스는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소리 때문에 둘째 딸이 깼나 보다.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아이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이불속이라 밖을 볼 수가 없었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린 아이가 양손으로 상체를 휘감은 이불을 벗겨냈다.
그러자 흘러내린 이불 위로 덥수룩한 금발 머리가 드러났고, 그 밑으로 하얗고 통통한 볼을 가진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의 커다란 눈은 지금 반쯤 감긴 상태였다.
반쯤 말려 있는 긴 속눈썹이 아주 가끔 위아래로 움직이며 깜박였다.
잠에서 덜 깬 모양새다.
여자아이는 창가에 있는 부모를 발견하더니 침대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짧은 발로 열심히 달려와 세리스의 허리에 매달렸다.
볼을 엄마의 다리에 문지른 아이가 칭얼댔다.
“엄마. 나 졸려. 졸려.”
아예 눈을 감아버린 아이가 턱을 올린 상태로 엄마의 말을 기다릴 때, 세리스는 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녀의 품을 파고드는 아이는 계속 칭얼거렸다.
그러니까 말 내용은 졸리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그 뜻은 정말 졸린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리 자서 배가 고프다는 뜻이다.
애들 언어가 다 그랬다.
“엄마가 우유 줄까?”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린 세리스가 묻자, 아이가 그제야 샐쭉 웃었다.
“응. 줘. 빨리 줘.”
세리스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세인을 바라보았다.
세인은 손을 뻗어 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아이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머리를 세인의 손 쪽으로 이동하는데, 세인은 아이의 균형을 위해 머리를 앞으로 밀어줘야만 했다.
딸을 향해 세인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니, 마플?”
“응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