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
& 후일담 (1)
“에릭센 황제가 또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각 나라의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여왕님께서 평소에 이런 화합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꼭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언권을 준 마당에 당연히 우리도 우리의 몫을 요구할 권리가….”
맥은 말하던 도중에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잠깐 말을 쉬었다.
세리스가 하품을 했기 때문이다.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아 죄송하군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요? 저는 귀찮게 거기까지 내려갈 생각이 없습니다. 글리터는 이미 부강합니다. 여기저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 북부 동맹을 챙기기도 벅찹니다.”
세리스는 자신의 손톱이 잘 정돈되었나 차례차례 점검하며 말을 끝냈다.
그녀는 나날이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매우 아름다운 그녀였는데, 요즘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리스도 전과 다르게 미모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런 거물과 적극적인 교류를 해서 나쁠 게 뭡니까? 믿을 만한 아군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외교적인 참여도 여왕님의 의무고요.”
이미 에릭센의 초청이 수십 번이나 왔었고, 세리스는 그걸 모두 거절했다.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이번에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 같다.
바로 그게 오늘날 행크와 맥, 더이스를 답답하게 하는 이유였다.
“우리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예요. 그렇다고 여기 땅이 좁아요? 오히려 너무 넓어서 걱정이죠. 이미 막강한 군대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든든한 아군들도 있죠. 블랙 라이어드라는 초거대 상단도 우리 편이에요. 개발하지 못한 광산은 쌓여있고, 그건 우리가 앞으로 더욱 부자가 될 거라는 소리입니다. 이런 판국에서 바깥에 신경을 써야 하나요?”
“내치도 중요하지만, 외치도 중요하니까요.”
“지금은 드워프들과 엘프들을 챙기기도 바쁩니다. 전쟁 때 그들은 우리를 떠나가지 않고 본진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 신경 써주는 것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에요. 할애할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사실 저는 지금 가족과 함께할 시간조차 모자라요.”
“….”
“지금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경들과 함께하고 있잖아요.”
큰 선심이나 쓴다는 투로 말하는 세리스 앞에서 맥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맥을 본 행크와 더이스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참다못한 맥이 언성을 높였고, 세리스도 지지 않고 짜증을 폭발시켰다.
더이스는 이제 둘의 고성이 방 밖으로 새어날까 두려워 문이 잘 닫혀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사절단이라도 보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왕들이 참여하는 자리에 사절단을 보내서 뭐 어쩌란 거예요? 가봐야 눈총만 받고 돌아올 텐데. 그리고 그런 식으로 여지를 주면 나중에는 정말 제가 직접 참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현재 세리스를 괴롭히는 남자는 딱 둘이었다.
언제나 여왕의 책임을 강조하는 맥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유발하는 아비게일이었다.
둘 다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리스 입장에서는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심각하게 피곤해 졌다.
“이러지 마십시오. 에릭센 황제는 대륙을 구한 영웅입니다. 그와 가까이해서 나쁠 것은 조금도, 정말 조금도 없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참가해서 나쁠 게 뭡니까?”
맥의 설득에 세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밑지면 그냥 밑지는 거죠. 본전이 어디 있나요.”
글리터는 지금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눈치를 보거나 권리를 챙길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신적인 존재도 함께하는 마당이다.
그걸 알고 있는 세리스의 입장에서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평온한 시대 속에서 그녀는 가정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때론 자신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것에 회의감이 불쑥불쑥 들 때도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세인이 원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여기에 오래 앉아 있을 필요도 없었다.
멜라니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 그렇게 시간을 아껴서 뭐하시려는 겁니까? 혹시 탑에 있다는 그 인물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그게 바로 여왕님께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시간인 겁니까?”
오늘은 정말 화가 났는지 맥이 선을 넘어 버렸다.
뒤에 있던 행크와 더이스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화가 난다고 해도, 할 말과 못할 말이 있는 법이다.
지금 맥은 겁도 없이 세리스의 비밀을 건드리려 하고 있었다.
그 비밀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다 궁금해하는 것이다.
글리터의 아름다운 여왕.
세리스가 누구와 관계를 해서 자식을 둘이나 낳았는지 말이다.
여태까지 그것을 물어본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맥이 지금 그 금기에 첫 번째로 도전하려나 보다.
세리스가 노려보자, 맥도 자신의 실언을 의식했는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방에 냉막한 기운이 흘렀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오히려 세리스였다.
“나에게 이런 무례한 질문을 한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가 누구든 단칼에 죽였을 거예요. 제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이런 모욕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이게 모욕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에게 제 사생활을 말할 필요는 없죠.”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세리스는 맥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질책성으로 받아들인 맥은 고개를 숙였다.
맥의 뒤통수를 본 세리스는 심경이 복잡해 졌다.
맥이 지금 말한 남자는 세인이었다.
그는 탑에서 살고 있다.
과거에 세인은 죽은 자들을 엄청나게 많이 살려낸 전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죄를 지었다.
게다가 세상의 흐름을 바꿔 버린 것도 모자라 지금은 아예 부활한 상태였다.
새 시대를 여는 성검이 그를 살린 게 아니라, 불가사의한 힘이 세인을 죽음에서 깨웠다.
물론 세인이 돌아왔을 때 뛸 듯이 기뻐했던 세리스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세인은 유미리와 비슷한 형벌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잊었다.
그의 업적도 뒤틀려졌고, 세상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개연성을 억지로 맞춰 버렸다.
“이상하게 현실이 뒤틀려서 악명으로 남는 것보다는, 아예 깨끗이 잊히는 게 좋긴 해.”
그게 바로 세인의 말이었다.
현재 세인을 기억하는 자는 성검의 수호를 받는 세리스와 그녀의 자식뿐이었다.
그 외에 세인을 알던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그러니 맥도 탑에 있는 세인을 모르는 것이다.
“피곤합니다. 물러가세요.”
이마에 손을 짚은 세리스가 그들을 외면하자, 세 명의 기사는 허리를 깊게 숙여 보이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층계를 걸어 내려갔다.
그 후에 세리스의 방에서 그들이 충분히 멀어졌다 싶자, 더이스가 말을 꺼냈다.
“너무 나가셨어요. 저도 그 말을 들은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거든요.”
그러자 맥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참 이상하지? 저분의 대단한 능력을 떠나,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어.”
맥의 말에 행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엿들었을까 두려워서였다.
더이스는 얼빠진 얼굴로 맥에게 물었다.
물론 지금 맥이 느끼는 감정은 신기하게도 다른 기사들도 느끼는 감정이었다.
정말 이상하지만 거의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이런 곳에서 털어놓는 건 진짜 무모한 행동이었다.
“혹시 여기로 오기 전에 술 드신 겁니까? 술 취하셨어요?”
“….”
맥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려는 더이스를 밀쳤다.
* * *
글리터로 귀환한 세인은 세리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세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인의 얼굴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당신의 원래 자리를 되찾아야 해요.”
세리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날 잊었어. 내가 사람들에게 보냈던 글은 이제 고대어가 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지. 과거가 깨끗하게 세탁된 거야. 그러니 과거를 증명할 방법도 없고, 세상도 그걸 원하지 않아. 세상의 섭리를 어겨가면서까지, 또 일을 벌이고 싶진 않아. 나는 지쳤거든. 거듭 말하지만 세리스. 나는 그동안 할 만큼 했고, 충분히 지쳤어.”
그는 남들에게 자신을 알아보라고 강요하는 대신, 성의 넓은 뒤뜰 중 구석진 곳에 탑을 지었다.
둥글고 큰 탑이었다.
탑을 짓는 비용은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왕의 자리를 포기했다고 해서 그가 빈털터리라는 것은 아니었다.
“일층은 서재가 좋겠지. 큰 창문을 많이 만드는 게 나을 거야. 답답할 때 환기도 잘되고, 한낮에 따뜻한 볕도 많이 들어올 테니까.”
탑을 설계하는 세인의 모습은 왠지 신나 보였다.
그는 즐거운 얼굴로 탑에 채울 것들을 상상했고, 그것을 곧 실행에 옮겼다.
탑의 주변에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 놓았다.
다시 그 주위에 화초들을 가득 심었다.
탑 안에 놔두고도 남은 것들이었다.
묘목도 탑 근처로 옮겨왔다.
탑 주변을 관리하는 남자는 세인이 여왕과 관계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일절 터치하지 않았다.
비록 하인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탑의 최상층에 침실을 만들어 놓은 세인은 아침에 깨어나면 일단 물뿌리개부터 들었다.
그 후에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오며, 화초에 순서대로 물을 주는 게 아침 일과였다.
처음에는 본인조차 어색해했던 생활 방식이었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능숙해졌다.
이제 보기 싫은 서류를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속마음을 읽기 위해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육아야 하인들에게 맡기는 것이었고, 그가 끼어들려 해도 하인들이 기겁할 게 뻔했다.
그들에게 있어 세인은 외부인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간은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의 하루 전체가 자유로 넘쳐났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실컷 사다 먹었다.
쉬는 시간이 아까워서 간단한 식사, 퍽퍽한 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것도 이제 안녕이었다.
입을 실컷 즐겁게 해준 세인은 본격적으로 책을 탐했다.
유명한 철학자의 책이나 장편 소설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서가에 꽉꽉 채워 넣었다.
거의 매일 탑에 들리다시피 한 세리스는, 세인이 서가를 보면서 배부른 표정 짓는 것을 자주 보았다.
서가는 더욱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그도 재물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여제에 대한 책도 수집하는 게 어때요? 책이란 책은 거의 다 사들이면서 왜 여제에 대한 건 없어요?”
세리스가 물어보자 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 여자가 싫어.”
세인은 그날 유달리 끌리는 책이 있으면 밤늦게까지 자신의 침실에서 펼쳐 놓고 읽었다.
그리고 졸리면 새벽 아무 때나 곯아떨어졌다.
그러다가 대낮에 깨어나면 기분이 아주 좋았다.
푹 자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돈 걱정 없는 게으름뱅이야말로 인생의 승리자였다.
그러다가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세차게 흩날리면, 그건 오늘 날씨가 아주 좋으니 나가서 산책 정도는 하는 게 어떻겠냐는 신호였다.
탑 밖에서 세인은 맨발로 잔디 위를 걸으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들고 깨물며 글을 계속 보았다.
지금 그는 큰 셔츠와 헐렁한 바지만 입은 차림이었다.
게다가 상의의 단추도 몇 개나 풀려 있어서 가슴이 거의 다 드러났다.
귀족이라는 자각이 머리카락 한 올 만큼만 있어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옷차림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볕은 정말 따뜻했고, 사람을 한없이 나른하게 만들었다.
하품하던 세인은 목이 말라 근처에 있는 분수대로 걸어갔다.
새파란 물에 손을 넣고 퍼 올려 얼굴에 대고 문지른다.
아침 세수 대신이다.
그리고 다시 물을 한 움큼 쥐어 목으로 넘기는데, 그게 정말 시원하다.
“시원하다. 너희들도 시원하지?”
분수대 안에 있는 투명한 물고기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세인이었다.
그때 아주 멀리에서 세인을 훔쳐보고 있던 잭이 질리언에게 물었다.
“야. 지금 저자가 분수대에 대고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입이 움직이잖아? 지금 내가 본 게 맞는 거야?”
질리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 저래.”
질리언과 잭은 커다란 나무의 그늘에서 엎드려 있었다.
주위는 온통 푸르른 잔디밭이니까 엎드린 상태 그대로 계속 세인을 훔쳐보았다.
세인이 멀리 이동하면 몸을 낮추고 따라가야 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리언이나 힐다같은 기사들의 업무였다.
잭은 이번에 처음으로 합류했다.
그래서인지 말이 많다.
“와. 진짜. 여왕님 직속 기사인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광인을 감시하는 게 일이라고?”
“제발 말조심해. 저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어?”
질리언의 질책에 잭이 머리를 긁적였다.
세리스의 숨겨놓은 남자인 것을 모르는 건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 둘이 달라붙어 있는 지금 상황이 민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두 형제는 세리스의 명령으로 세인을 보호 감시 중이었다.
세인의 죽음을 경험했던 세리스는 세인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였다.
가끔 그게 타인에게 표출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광기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 집착이 도를 넘었다는 것을 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기사들을 감시조로 붙이는 것만 해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질리언. 그럼 힐다도 주기적으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아니 걔는 그렇게 큰 몸집으로, 어떻게 눈에 안 띄고 감시를 했데?”
잔디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세인을 보며 벌써 지루함을 느낀 잭이 투덜거리자.
질리언이 눈총을 주었다.
“형. 힐다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 힐다가 여기 있었다면 기분이 안 좋았을 거라고.”
“흐음.”
잭은 질리언의 반응을 보며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러다가 얼굴에서 빨리 그 표정을 지웠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동생의 연애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내 말은 우리 같은 고급인력이 언제까지 저 사람에게 매여 있어야 하냐는 말이다. 이건 너무 이상하다고. 안 그러냐?”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어차피 요즘은 전투도 없잖아.”
그렇게 대꾸한 질리언은 멀리 있는 세인에게 한 번 더 시선을 던지고는 몸을 돌려 누워 버렸다.
그리고 잭의 옆에서 팔베개한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질리언이 보고 있는 하늘은 아주 맑고 시원해 보였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서 하늘 자체가 커다랗고 아름다운 호수 같았다.
그런 하늘을 보며 질리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평온함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날씨다.
죽치고 있기 참 좋은, 완벽한 날씨였다.
“정말 잘 모르겠어.”
잭의 옆에 누워 있는 질리언의 미소는 곧 웃음으로 화했다.
* * *
“난 잠시나마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요즘은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사람으로 보이거든.”
멜라니가 찾아와 그렇게 말했을 때, 세인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여러 개의 베개와 방석, 이불들이 돌아다녔다.
그중 하나의 방석 위에 책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거기에는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세인은 책을 보며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멜라니가 뭐라고 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은 한낮이기 때문이다.
성장기라 그런지 멜라니의 키는 많이 자라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소녀티가 났다.
완전한 성인이 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기척을 죽이며 살금살금 다가온 멜라니는 세인의 옆에 있는 볼록한 것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았다.
그러나 이불 속에 있는 것은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만 내었다.
평소라면 멜라니에게 투정을 부렸을 텐데 말이다.
“동생 괴롭히지 마라.”
세인의 말에 멜라니가 투덜거렸다.
“이 녀석은 왜 매일 여기에 와서 있는 거야? 유모가 종일 이 녀석을 찾아 돌아다닌다고.”
“그러는 너는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여기에 와있는 건데?”
그 말에 멜라니가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세인이 검지로 그 부풀린 볼을 찔러 보려 했다.
귀여웠기에 저절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멜라니는 뒤로 펄쩍 물러나 손가락을 피했다.
그전에도 이런 일이 잦았던 듯 능숙한 회피 동작이었다.
세인이 입맛을 다실만큼.
“왜 꼭 내가 죄를 지어야 여기로 온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 네가 나를 면죄부로 써도, 나는 다 이해한다. 네 엄마가 좀 포악하지. 흉악하고. 난폭해. 너를 좀 물건처럼 다루긴 해. 마치 소유물처럼 말이야.”
“아니, 난 그런 말까진 한 적이….”
“그러니 네가 나를 방패로 써도 넌 정당방위인 거야.”
“아빠.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투덜거린 멜라니는 세인의 발치에 앉았고, 이제 아늑한 방안에서는 간혹 책장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술잔에 손을 가져가려다가 세인에게 손등을 맞은 멜라니는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뭐야? 책도 쓰는 거야?”
책상 위를 바라본 멜라니는 거기에 수북이 쌓인 원고를 발견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었다.
“별거 아니야.”
멜라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세인은 원고를 보려는 멜라니를 말렸다.
“완성되기 전에 보는 건 실례다.”
멜라니는 아버지가 말리자 금방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금방 다른 것으로 옮겨갔다.
술잔과 책을 내려놓은 세인은 멜라니가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다가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부녀가 나누는 이야기는 때론 심각한 주제일 때도 있었고, 시시콜콜한 화젯거리일 때도 있었다.
세인은 가끔 자신의 이야기도 부담 없이 꺼내 놓았다.
“동물을 키워볼까 생각 중이야. 그러니까, 멜라니. 어떤 게 좋을까? 처음에는 아무래도 충직한 개가 좋겠지?”
“그만둬 아빠.”
“왜.”
“애완동물은 저절로 쑥쑥 크는 것들이 아니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고. 걔들도 외로움을 타거든. 그런데 아빠는 무책임하잖아. 하인을 여기에 들일 것이 아니라면, 그런 성격으로 생명을 책임지려 하면 안 돼. 나중에 아빠는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지만, 동물은 무슨 죄야.”
그러자 세인은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멜라니가 놀리듯이 혀를 내밀어 보였다.
내성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얼굴이었다.
지금 그런 멜라니의 얼굴이 세인에게 있어서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반박할 수 있으면 해봐.”
“분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네. 그래서 더 열 받는 거 같아.”
세인이 농담하며 웃자 멜라니가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