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99화 (299/307)

# 299

& 빛의 위광.

“안돼요.”

깜박 잠이 든 세리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사방에 검은 재 같은 것이 잔뜩 떠다녔다.

그 부유물 속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세리스는 그가 세인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세인이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필사적으로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말리기는커녕, 그녀의 목소리가 세인에게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제발. 안 된다고요!”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세리스의 간청에 세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얼굴을 보이는 세인이 흩날리는 재 속에서 말했다.

“미안해. 세리스.”

그리고 그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안돼!”

세리스는 자신의 막사 안, 간이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지금 그녀의 몸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업무에 지쳐 아주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만 악몽을 꿔버린 것이었다.

“헉! 헉!”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낸 그녀는 손을 뻗어 물병을 잡았다.

하지만 곧 물병이 비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죄 없는 물병은 침대 아래에서 박살이 나버렸다.

침대 위에 앉아 무릎을 세운 세리스는 얼굴을 그 위에 파묻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헤집었다.

세인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라를 처리하기 위해 세인이 택한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그건 이미 세인이 보낸 서신에서 다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 서신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리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대부분 또 다른 마라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 짧은 추신에서는 미안하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그 글을 쓰기 위해 한참을 망설여야만 했을 것이다.

잉크의 색이 다른 것을 보아 한참이 지난 후에 마른 잉크로 적은 글귀였다.

「미안해. 세리스.」

죽음을 택한 세인을 원망하자니, 전체적인 상황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다.

세인이 아주 자세하게, 작은 것 하나에도 이유를 써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를 잃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죽을 만큼 아프게 만들었다.

‘그를 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자문해 보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따라 죽을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멜라니가 있었고, 뱃속에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게다가 임무도 있다.

“그래, 임무.”

이마에 손을 올려놓은 세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이렇게나 탐탁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도 참 어려울 것이다.

무려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도 말이다.

정작 세리스는 지금의 자신이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과거 그녀는 정의감을 지닌 성기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 사람의 상실에 몸서리치고 있다.

대의에 의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겨워하는 세리스를 방해하는 인간이 있었다.

“누구예요?”

입구 쪽에서 작은 종이 울리자 세리스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움찔했는지 천막 바깥의 전령이 더듬거렸다.

“괴…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

“얼마나 이동했지?”

“원래 있던 위치에서 이백 미터 정도 이동했습니다.”

세리스가 혀를 찼다.

“그러니까, 아직도 능선 너머에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지금 그걸 보고하러 왔다고?”

“죄…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몇 발자국 움직였는지까지 알아야 해? 그걸 내가 알아야겠어?”

“….”

엄밀히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다.

세리스는 지금 주둔 중인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녀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알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냉기가 서린 그녀의 대응에 전령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장 사라져. 그리고 귀찮게 하지 말란 말이야.”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그녀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전에 세인이 보냈던 다른 편지를 떠올렸다.

드레퓨스의 국화와 함께 쓰여 있는 의미심장한 말.

그것은 빌헬름을 생각하며 한 말인 동시에, 세인이 자기 자신에게 해보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죽은 그가 한 일이 의미가 있을까.’

그 문장에 내포된 의미가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였다.

입구 쪽에서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리스는 다시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호통을 치려 했다.

“내가 방금 방해하지 말라고 했….”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한 까닭은 의외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천막의 입구를 젖히며 들어온 여성은 갈색의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낡은 옷을 걸쳤지만 세리스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방문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당신은.”

사뿐사뿐 걸어온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세리스가 있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찼다.

그런 홀리 디스트로이어를 보는 세리스의 눈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나타났다는 말은 곧….

“그가 죽었나요?”

“….”

“다시 한번 물을게요. 그이가 죽었나요?”

슬픈 미소를 짓던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스는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리스. 당신과 계약을 하고 싶어. 마검이 잠들었으니, 이제 성검이 깨어나야 할 때야. 지금 세상은 위기에 처해 있고, 당신의 결단이 필요해. 그래서 찾아온 거야.”

그러자 세리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제게 할 말은 그게 다인가요?”

“….”

“당신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어요.”

그러자 홀리디스트로이어가 다시 손을 뻗어 세리스의 손등을 덮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고 상냥하게 말했다.

지금의 그녀는 세리스를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의 당신은 기억 못 하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당신도 승낙한 일이야. 세상을 지켜내는 구원자가 되기로 약속했어.”

그러자 세리스가 태도를 바꿔 간절함을 담은 말을 던졌다.

“그를 살릴 수는 없나요?”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괴로웠다.

그녀는 세리스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상심한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게 가능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인을 되살리는 것은 그녀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세리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를 살릴 수가 없어. 나는 당신이 나와 계약하면서 빌 소원을 알아. 세인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지.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소원을 들어줄 거야. 하지만 그 속에 세인은 없어. 그는 데스에게 속해 있고, 나는 데스에게 간섭할 수 없거든. 그게 바로 상호 존중이야.”

“나는 그런 존중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금 내게 하나뿐인 관심사는 그 사람뿐이에요.”

다시 열리려는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입술을 세리스가 가로막았다.

“홀리 크라운은 나를 생쥐 취급했어요. 그녀가 나에게 한 짓을 봐요. 아니,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운명을 비튼 그 짓거리를 생각해 보세요. 그녀에게 인간은 뭘까요?”

“세리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도 아주 오래전에 이 계획을 동의하고 허락한 일….”

“하지만! 내 말은 지금 그걸 따지겠다는 게 아니에요!”

세리스는 주먹을 쥐었다.

지금 세리스의 두 눈에서는 광기마저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위험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홀리 디스트로이어 앞에서 세리스가 열변을 토해냈다.

“그를 살려낼 수는 없나요? 오로지 그것만이 지금 나의 관심사입니다. 그를 살려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그 무슨 짓이라도!”

그리고 세리스가 가까스로 분을 참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 나름대로 자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당신은 빌어먹을 성검이잖아. 모두를 살려낼 수 있으면서 왜 내 남편은 안 돼?”

“세리스. 오. 제발.”

“그는 세상을 위해서 희생했어. 끊임없이 가시밭길을 걸었다고! 그는 내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해! 그런데 성검의 주인인 내가 왜 그를 원하면 안 되지? 왜 그의 부활을 허락받을 수 없지?”

그때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세리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 세리스가 이성을 잃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있는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충분히 그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개인의 비탄을 우선시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 주인공이 세리스라 해도 마찬가지다.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몸부림치려는 세리스를 진정시키며 속삭였다.

“세리스. 그의 부탁을 생각해. 제발 진정하고 그의 소원을 생각해봐. 지금은 그게 가장 중요해. 그의 소원은 지금 우리 모두의 관심사야. 그 소원은 당신만이 들어줄 수 있어.”

그제야 세리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힘도 주어졌다.

마지막으로 세인의 부탁이 남아 있었다.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꽉 쥐어진 세리스의 주먹을 보았다.

하얗게 탈색된 손등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로서는 세리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을 다 살려도 세인만은 불가능하다.

*  *  *

“나오신다.”

천막 밖에 있던 기사들은 그녀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내 말은? 어디에 있지?”

지금 모습을 드러낸 세리스는 누가 봐도 기분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기사들은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말을 불러와서 그 위에 올라탄 세리스는 너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요구했다.

“나 혼자 저 녀석에게 가겠어. 그러니 방해하지 마.”

이 얼토당토않은 말에 누가 나서서 말려야 할 것이냐?

이게 문제였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기사 중에서 희생양이 될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크게 외쳤다.

절대로 안 된다고 말이다.

차라리 세리스가 피신한다면 모를까, 단신으로 나선다는 건 비상식적인 말이었다.

모두의 반대 속에서 세리스가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 말에 토 달지 마. 지금은 당신들을 상대할 기분이 아니야.”

지금 그녀의 분위기는 전과 아주 달랐다.

범접할 수 없는 뭔가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무서웠다.

지금의 세리스의 얼굴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좌절하게 만든 것은 세인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서슬 푸른 기세에 결국 기사들이 물러났다.

지금 글리터의 최고 위치에 있는 것은 세리스였다.

이렇게 그녀가 정색하고 나온다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세리스는 고집대로 혼자 출발했다.

그녀가 탄 말은 아주 빠르게 목책 경계선을 벗어났고, 개활지 위에서 속도를 높였다.

말의 뒷굽에 잔뜩 흙이 채였고,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말의 율동에 따라 아래위로 덜렁거렸다.

말은 이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지역을 벗어나 거친 숲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세리스의 옆으로 검푸른 잎을 가득 늘어뜨린 잡목들이 휙휙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무성한 나무들의 위로 아주 멀리, 하얀 형태의 마라가 보였다.

유령처럼 상공에 떠 있는 존재의 크기는, 보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할 만큼 거대했다.

산과 산 사이에 서 있는 홀리 크라운의 그림자는 세 번째로 큰 봉우리 같았다.

마라는 지금 아주 천천히 인간들의 도시로 이동 중이었다.

도시와 마주치게 된다면 거기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시간이 지나면 마라는 데스 크라운의 그림자를 되살릴 것이다.

그전에 막아야만 했다.

세리스가 탄 말이 시원한 개울물 위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물 아래에 모여있던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어지럽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은 물결에 의해 곧 지워졌다.

물길은 탁 트여서 마라의 정면까지 도달해 있었다.

개울의 중심으로 간 세리스는 말을 돌려세우고, 높게 떠올라 있는 마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이야. 너무 멀어, 조금 더 가까이 와야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세리스는 겁먹지 말라는 뜻으로 말의 갈기를 쓸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 후에 그녀는 맞바람을 맞으며 마라가 좀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개울 위로 드리워진 마라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다가온 그림자는 결국 말의 발치까지 닿았다.

사방이 마라의 그림자로 어두워졌을 때, 세리스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죽어라.”

하지만 멀리 보이는 마라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음.”

성검의 명령이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엘릭서의 힘이 권능을 넘어설 수 있다면 세인이 목숨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루시드도 아주 쉽게 처리해버렸을 것이었다.

마검이 권능을 와해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엘릭서의 힘으로도 권능을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루시드의 권능은 상대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이었고, 데스 크라운의 그림자가 가진 권능은 자신을 죽인 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세인은 둘 다 상대의 권능을 맞춰주며 자신의 해법으로 난관을 풀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홀리 크라운의 그림자는 모든 공격을 무효화 하는 권능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빛의 그림자는 어둠의 그림자가 죽으면 이틀 후에 되살리며, 그리고 무엇보다…. 죽지를 않습니다. 그는 불멸입니다. 어떤 법칙에도 제재 받지 않습니다. 권능. 상대의 힘 등등을 다 무시합니다. 그게 바로 그의 본질입니다.’

질리언이 세인에게 해준 말대로라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마라는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성검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제 마라의 그늘은 세리스의 정수리를 훌쩍 넘어갔다.

그렇게 근방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그림자의 한기가 물 위에 서 있는 동물을 제 자리에서 서성거리게 했다.

“아.”

뭔가를 깨달은 세리스는 잡고 있던 고삐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잡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는 그녀였다.

세리스는 그 상태에서 다시 마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번에는 뭔가 다를까?

지금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마라는 절대 침몰하지 않을 악령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깊은 들숨과 날숨 후에, 세리스는 다시 온 정신을 집중했다.

동시에 복부에 가져다 댄 손에 힘을 주고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자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검 끝에서 뿌연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하얗게 빛나는 기운은 검신을 타고 세리스의 몸까지 흘러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리스의 온몸은 빛으로 하얗게 불탔다.

그 빛은 따뜻함을 지니고 있었고, 강한 전이성도 가지고 있었다.

말의 몸을 타고 내려가 개울 전체를 빛나게끔 만들 정도였다.

물길이 마라의 그림자 속에서 하얗게 타오르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마치 어둠 속에서 축복의 길이 태어난 것만 같았다.

숨 막힐 듯한 빛의 포만감 속에서 세리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네 아빠는 끝까지 너를 믿었어. 그러니 나에게 힘을 빌려주렴.”

그녀가 쥔 성검은 그녀의 안에 깃든 생명에게 말을 전달하는 열쇠가 되어 주었다.

세인이 지니고 있던 마검이 할 수 없는 역할을 한 것이다.

세리스는 자신의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성스러운 힘은 세리스가 품은 생명체의 본성을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자신이 잉태한 생명체의 힘을 빌려 마라에게 명령했다.

“죽어라.”

그러자 세리스의 뒤로 훌쩍 넘어간 마라의 그림자가 정지했다.

마치, 마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덜컥 멈춰 버린 것이다.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눈 부신 빛을 띠며 사방으로 광휘를 흘려댔다.

그 빛은 개울을 더욱 밝게 불태우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질주한 찬란한 빛이 마라에게 닿았을 때, 커다란 반응이 있었다.

마라의 몸에서 빛의 균열이 생겨난 것이다.

그 균열에서 흘러나온 빛은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었다.

빛 속에 있는 마라는 어떤 느낌을 받고 있을까?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여자의 얼굴도 아주 잠시, 그녀의 모든 것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멀리에서 세리스를 찾아다니던 기사들은 물론이고, 꽤 떨어진 주둔지의 사람들 모두가 이 숨 막히는 기적을 지켜보았다.

태산과도 같은 크기의 괴물이 빛 속에서 증발하고 있다.

세상을 위협하던 파괴신이 티끌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라의 권능을 넘어선 기적이 발현된 것이다.

치솟은 빛의 기둥이 구름을 사방으로 흩어놓자, 그 아래에서는 더 이상 마라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라의 마지막을 확인한 세리스가 천천히 성검을 내렸다.

그러자 주위에 가득 찬 빛의 기적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숲속을 부유하는 빛의 조각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반딧불처럼 떠다니는 빛들이 방금 일어난 기적의 유일한 증거였다.

뒤늦게 긴장이 풀린 세리스의 귀로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은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성검을 다시 허리춤에 찬 세리스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라이트닝 블러드.

초월의 피.

과거 빈센트의 아버지는 세인에게 몸을 피하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세리스와 함께 도망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당장 사람들은 학살당해도 어쨌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종말에 가까운 타격을 받는다고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은 고대에 라이트닝 블러드를 창조한 적이 있었다.

초창기 라이트닝 블러드들은 대부분 미래를 보는 스포일러가 되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의도는 무산되고야 만다.

그 후 실망감에 등을 돌리지만, 자매는 인간들의 분투를 보고 다시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두 존재는 이노센트 중에서도 위대한 자였다.

그런 둘이 만들어낸 회심의 계획이란 무엇일까?

대단한 두 존재가 만들어낸 것.

높은 자리에서 추락한 천사들을 다시 구원할 수 있는 계획의 핵심은 무엇일까?

세인이 코볼트 스톰을 통해 조우한 미래에서 왜 그 세상은 파탄지경이었을까?

그곳에는 자신을 포기해 버린 세리스가 있었다.

죽어버린 세인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잉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인이 살아있어서 세리스와 맺어졌다면?

그들은 무엇을 잉태할 수 있었을까?

수호자인 엘릭서.

그리고 라이트닝 블러드.

초월의 피가 잉태하고픈 것.

모든 답은 하나로 귀결된다.

마라의 권능 자체가 불가침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리스의 몸속에 깃든 생명체는 그 법칙조차 우습게 무시해 버렸다.

그런 아이의 힘을 빌린 세리스의 명령은 곧 아이의 명령이었다.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이 미래 속에서 그토록 이나 획득하고 싶었던 것.

모든 난제에 대한 답.

모든 법칙과 한계를 초월하는 자.

그것은 바로 신이다.

지금 세리스의 몸속에 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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