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 검은 위광. (4)
테러 로드가 죽었다.
호수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던 파멸의 물고기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제 인간이 시간이라고 인지하는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테러 로드가 불쑥 찾아올 일은 없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호수 전체가 기뻐할 일이었다.
테러 로드는 죽었지만, 아직 마무리할 일이 남아있었다.
“가미긴.”
세인은 땅에 꽂혀 있는 가미긴을 뽑아 들었다.
넓적한 검신에 붙어 있는 얼굴은 세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가를 실룩였다.
축 늘어진 혀가 말려서 위로 올라가는 것도 보였다.
가미긴이 지금 반가워서 이런 얼굴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품평하듯 가미긴을 이리저리 돌려본 세인이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알겠지만, 네가 믿고 있던 놈은 죽어 버렸어. 군주를 잃은 네 종족도 세상에서 사라질 게 뻔해. 봐라. 가미긴”
그는 가미긴을 들고 주변을 보여주었다.
“네 왕이 죽었는데도 달려오는 놈들이 하나 없다. 네가 목숨을 걸고 그렇게 희생을 했는데도 이게 바로 너희들의 결말이야. 가미긴. 네 희생이 가치가 있었나? 고작 이거였어. 너는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고. 고작 이걸 위해 그렇게 날뛴 거야.”
세인은 조롱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입을 가미긴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었다.
그건 가미긴을 미치게 하기 충분했다.
그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검은 왕이 그뿐만 아니라, 이노센트 모두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참다못한 가미긴이 소리를 지르자 세인이 중얼거렸다.
“어때? 속이 뒤집어지지?”
그러다가 깜박했다는 듯이 가미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참. 너는 지금 검 쪼가리라 속도 없는 몸이구나. 가미긴. 검으로 변하면 뭐하냐. 네 주인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꼴 좋다. ”
비웃음 앞에서 무력한 가미긴은 이제 발광 중이었다.
검이 되어서 표현이 부자연스러운 가미긴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울부짖고 성을 내는 것으로 감정 표현을 했다.
세인의 손이 서슴없이 가미긴의 눈을 파냈다.
그리고 이빨도 하나씩 뽑았다.
이빨을 뽑을 때 녀석이 깨물어댔지만, 그거야 상관없었다.
마지막으로 축축한 혓바닥을 잡았을 때 미끌미끌한 그 감촉이 세인의 손안을 더럽혔다.
자비심 없이 그것을 뜯어내자 가미긴은 이제 피범벅이 되었다.
그 앞에서 세인이 웃었다.
“이게 고작 죽기 전의 네 표정이냐?”
어두운 굴 안에서 기대했던 만큼 풍부한 표정은 아니었다.
세인은 주먹을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 넘어가자 가미긴은 충격을 전부 흡수하지 못하고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는 가미긴이 내지르는 비명도 점점 커졌다.
결국 세인의 주먹으로 인해 검이 반으로 부러졌다.
부서진 자리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세인의 주먹은 그 후로도 쉬지 않고 넓적한 부분을 때려 부쉈다.
결국, 가미긴의 얼굴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가미긴을 걸레로 만들어버린 세인은 가미긴의 잔해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아까 뽑아내었던 가미긴의 눈알을 밟아 터트렸다.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눈알이 터지자 하얀 즙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게 바로 가미긴의 끝이었다.
그때 예고도 없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테러 로드도, 그의 자식도 죽었다.
그러니 이제 마라가 나타날 시간이 되었다.
몸살을 앓는 것처럼 덜덜 떨리는 땅 위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데스 크라운의 그림자인 마라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마치 섬뜩한 유령처럼,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일어난 형태는 밤하늘의 먹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라는 망토를 뒤집어쓴 신적인 존재 같았고, 여러 개의 뿔이 달린 여자의 얼굴이었다.
지금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상태다.
그 상태로 달빛을 받으며 조용히 서 있는데, 그게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마치 태곳적부터 원래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는 마라.
그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세계에 파괴 행위를 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바이테스 수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아주 큰 형상이었다.
그녀의 몸에 투과된 세상이 곧 그녀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
그런 마라의 밑으로 신부가 쓴 면사포처럼 망토 같은 것이 드리워져 펄럭였다.
마치 오로라가 흔들리듯, 그녀의 몸이 수도의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세인은 그녀의 아래쪽을 향해 걸어갔다.
마라의 옷자락이 드리워진 곳에는 아주 높은 시계탑이 솟아올라 있었는데, 일단 거기가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마라는 세인이 시계탑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달빛 아래에서 천천히 실눈을 뜬 그녀가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속에서 투명한 혀 같은 것이 천천히 튀어 나왔다.
그 혀가 빛을 발한다고 느꼈을 때 바이테스의 수도가 빛에 휩싸였다.
빛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현상은 일체의 소음이 없는 재난이었다.
땅과 건물이 부서지며 빛 속에서 증발했다.
폐허 속에 남아있던 돌과 나무가 하늘 위로 떠 오르고 녹아서 긴 띠를 이루었다.
그 띠는 땅이 소멸하며 남겨놓은 찌꺼기와 합쳐져 잠시 고리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하늘로 올라간 후 실이 되었다.
그 실은 밤하늘 속에서 감쪽같이, 마술처럼 사라져 버렸다.
눈 부신 빛 속에 서 있는 세인은 주변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바이테스의 수도가 있던 자리는 분지가 되어 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소리 없는 마라의 노래가 끝나면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고개를 드니 마라의 혀가 깜박일 때마다 주위가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라의 거대한 몸 주변으로 눈부신 파문이 신호처럼 번졌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문득 어딘가에서 몸을 일으켰을 홀리 크라운의 잔재도 눈앞의 그림자처럼 행동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야겠어.’
마검을 든 세인은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있는 마당에 그는 결국 이동에 성공하고야 만다.
눈앞에 보이는 마라의 내부로 침투한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마검을 든 세인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마라는 자신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
마라의 내부는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웠다.
흑수정들이 가득 모여 하나의 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내부는 실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스트랄 물질의 집적체였다.
영적으로 농축된 물질들이 결정화되어 거대한 명령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명령은 초창기에 어땠을지 모르나 지금은 말살 명령만을 띄고 있을 뿐이다.
흑수정은 그 둘레가 집채만 한 것과 아이의 새끼손가락만 한 수정도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다양한 크기로 모인 수정들이 바닥을 형성하고 벽이 되었다.
다만 천장만은 아주 높은 곳에 있어 뻥 뚫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라의 내부에 들어선 세인은 그 최상층에 도달하고자 한다.
세인은 수정들 사이로 보이는 검은 층계를 밟아 올라갔다.
마라는 그런 세인을 공격하지 않았다.
같은 근원을 품고 있는 세인에게 공격 의사 자체가 없었다.
세인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세상에 큰 해가 되는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마라의 파괴력은 매우 강력했고, 말도 안 되는 권능을 두르고 있었다.
여태껏 몸을 일으킨 거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스로 무너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홀리 크라운의 그림자까지 합치면 세상에 파괴신 두 명이 강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는 세인의 머리 위로 빛을 발하는 둥근 물체가 떠 있었는데, 천장에 달린 것이었다.
위로 올라감에 따라 그 물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접근해서 보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외눈이었다.
그 외눈에서 후끈한 열기를 느낄 때, 세인은 최상층에 도달했다.
“….”
이제 계단의 끝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고, 허공에서 끝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인은 주저 없이 허공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투명한 유리판 같은 것이 그의 발바닥에 걸리며 ‘덜컥.’하는 소리를 내었다.
투명한 바닥은 튼튼한 평면이었지만, 완전한 면은 아니었다.
격자무늬 형식으로 짜 맞춰져 있는 바닥은 중간중간 구멍이 뚫려 있었다.
머리 위의 빛 때문에 오히려 그런 구멍을 발견하는 게 더 어려웠다.
주변에 있는 수정들은 이제 투명한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여러 각도로 깎여진 그것들이 빛을 산란하며 세인의 눈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세인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라의 내부에 들어오는 방법도 그렇고, 세인은 마라를 보았을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시간이 지나 그는 아주 폭이 좁은 외길 위를 걸어가야만 했다.
천장은 점점 높아지더니 빛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외길의 끝에서 커다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허공에 스스로 떠올라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공간은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세인은 검은 존재를 만났다.
마라의 최상층에서 만난 존재는 검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물체다.
그는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세인이 아는 누군가가 매우 닮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인 자신이다.
세인이 바로 등 뒤에 서 있는데도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둥그런 내부에 비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세인은 그에게 말을 거는 대신 옆에 나란히 서서 원형의 벽에 비친 장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하얗고 커다란 물체가 땅 위에 떠 올라 있었다.
크기는 여기 있는 마라와 비슷한 정도.
등 뒤에 여러 장의 접힌 날개를 달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또 다른 마라.
즉, 홀리 크라운의 그림자였다.
그 형상을 보던 세인이 입술을 열었다.
“전에 이 광경을 과거에 본 적이 있다. 너와 나란히 서서 뭔가를 구경하는 장면 말이야.”
그러자 세인의 옆에 있는 검은 형상도 입을 열었다.
“미래를 본 건가?”
“그래.”
“어디까지 봤지?”
“딱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제의를 해도 되겠군.”
흑수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고 반질반질한 그의 얼굴에 세인이 얼굴이 비쳤다.
흑수정으로 만들어진 세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세인은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상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상대의 손가락은 당연한 말이지만 매우 차갑고 딱딱했다.
세인의 얼굴을 만지작거린 상대는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네가 이곳에 들어섰을 때, 너의 본질이 나에게 투사되었다. 네가 층계를 오르는 과정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에게 전이되었다. 너의 생각.”
상대는 세인의 얼굴에 대었던 손을 거두어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다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마음까지도.”
“파괴를 멈출 수 있나?”
상대가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너라면 숨 쉬는 것을 멈출 수 있겠어?”
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은 하나뿐이군.”
하지만 검은 형상은 바로 세인의 말을 반박했다.
“다른 선택지도 있을 수 있어. 아까 내가 말한 제의가 바로 그거야.”
“다른 선택지?”
“나를 거두고 네가 파괴신이 되는 거다. 우리의 본질은 같으니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야. 나를 흡수하면 너는 너만 제어하면 돼. 너는 지금 여기 있는 마라를, 그러니까 나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너도 죽어야 해. 그건 알고 있겠지?”
데스 크라운의 그림자인 마라의 권능은, 바로 자신을 죽인 상대를 무조건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살해자를 죽인다.
세인이 지금의 마라를 죽인다면 세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여기 있는 마라를 죽이면 결국 너도 죽을 텐데 사람들은 그런 너를 어떻게 기억할까? 세상을 구한 자? 그들은 네가 어떻게 싸웠는지조차도 몰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이다. 그러니 차라리 신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 보는 게 어떠냐?”
그의 설명을 들으며 세인은 홀리 크라운의 그림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건?”
“네가 신이 되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겠지. 저건 신에 가까운 괴물이다. 그러니 상대하는 자도 신이 아니면 곤란해. 그렇지 않고서야 불가침의 영역을 어떻게 침범할 수 있겠나. 네가 신의 영역에 올라서야 비로소 홀리 크라운의 그림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여기 있는 마라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어떠냐? 내 제안이? 네가 어떤 미래를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미래는 네가 선택하는 거다.”
검은 세인은 눈앞의 세인이 잠시나마 고민이라도 해볼 줄 알았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눈앞의 세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이런 말을 던져주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 처음부터 계획이란 게 완전할 수가 없다고. 계획이란 건 일단 짜놓고, 흔들리면 다시 수정하거나. 난관에 부딪히면 다시 짜놓는 게 좋다고 말이야. 일단 계획을 세우고 고치고 또 고치는 거야.”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그걸 바로 융통성이라고 하는 거다. 일부러 꽉 막힌 길을 갈 필요도 없어. 왜 굳이 순교자 흉내를 내려 하는….”
“계획은 약속이야.”
칼처럼 단호한 말이 수정으로 이루어진 세인의 말을 끊었다.
“혼자만의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수정해도 된다. 하지만 계획이 크고 무거울수록 여러 존재의 사정과 계획이 얽혀있어. 모두와의 약속을 어긴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미 결정한 결과가 이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비튼다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이 계획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인을 베낀 물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감정을 더욱 세밀하게 구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인간 같은 말을 해댔다.
“너는 분하지도 않냐? 그 계획안에서의 네 역할이 뭔데? 너는 한낱 도구였을 뿐이다. 그 계획도 원래 너의 것이 아니야. 너는 그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네 운명 속에서 네가 주체가 되고, 능동성을 가지라는 게 그렇게나 이상한 말인가?”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 조각 앞에서 세인은 짧게나마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회상이 끝났을 때 세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신이 되는 것도 내 삶은 아니야.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중에 나는 깨달았어. 내가 인간답게 살기 힘들다는 것을. 그래도 밑에 있는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렇다 해도 너무 많은 죄를 저지른 것 같아.”
비록 앞에 듣는 자가 있었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건 독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세인은 유혹에 질 수도 있었다.
그라고 왜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상대의 제안이 솔깃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초월자들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접했다.
일단 본인부터가 초월자들이 만들어낸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빈센트의 아버지가 세운 주도면밀한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계획이라도 삐끗하면 망가지기 십상이다.
지금 여기에서 세인이 딴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어긋나, 각자의 처지에 입각해서 행동을 한다면?
“남겨질 가족에게 미안하다. 나를 알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이제 여기까지 와서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선하지 못했고, 어질지 못했고, 현명하지도 못했어. 그래도 단 하나 다행인 것이 있다면.”
신이 된다?
그래 보았자 루시드의 전철을 밟을 뿐이다.
전체를 위해 필요한 건 또 다른 파괴신이 아니었다.
세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것이 최선이라 믿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그게 세상의 구성원인 그의 몫이었다.
이제 와 그것을 배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인이 하려던 말을 검은 형체가 마무리했다.
“여기에서 내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는 믿고 맡긴다.
세인이 천천히 마검을 들어 올려 복제된 자신을 겨누었다.
그러자 마라와 세인이 반반 섞인 상대방이 마지막으로 충고해 주었다.
“이봐. 그러면 너는 죽는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각오했다.”
세인은 그의 앞에서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데스 크라운을 대신하는 자. 그녀의 권위를 빌려, 종극인 여기에 서 있다.”
그러자 복제물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이마를 세인의 검 끝에 가져다 대었다.
세인은 상대의 얼굴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세인, 그리고 그의 복제물.
복제물에 비친 얼굴.
세 개의 상이 모두 다 그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한다.”
세인은 그렇게 검을 겨눈 상태에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