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97화 (297/307)

# 297

& 검은 위광. (3)

격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가 보였다.

고여 있는 물은 가끔 흔들렸다.

그리고 동그란 파문이 계속 일어나다가 잠잠해지곤 했다.

격하게 일어날 때는 여러 개의 원이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번져 나가다가, 겉 부분에서 물이 넘칠 듯 찰랑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물의 표면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세한 진동이 끊임없이 잘게 일어나 물을 흔들고 있었다.

진동 폭에 따라 물이 뿌옇게 되는 양상까지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잠해지며 고요를 맞이했다.

사실 그 고요가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  *  *

세인은 덤덤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루시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초록색의 물질이 경계를 만들었다.

그 경계는 둘을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초록색의 공간은 점점 넓이를 넓혀 나가며 사물들을 정지시켰다.

돌 같은 물질은 초록색으로 물들면서 성질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부피는 물론이고 무게가 바뀐 듯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어떤 것은 아예 형질이 달라졌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모습으로 치환된 것이다.

초록색의 영역이 점점 뻗어 나가 밤하늘 아래에서 출렁이자, 달빛마저 그 속에서 굴절되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전혀 없는 뿌연 빛이 멀리에서 보였다.

그 빛은 어쩌면 루시드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태양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 현상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연상케 했다.

진정한 자신을 잃기 전의 루시드였다면 더욱 대단했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자신의 영역을 만들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신과 같은 권위를 누렸을지도 몰랐다.

뭐, 지금은 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 정도만으로도 세인을 죽이기엔 충분하니까.

초록색으로 출렁이는 공간 속에서 황금색으로 화한 육신을 자랑하듯 루시드가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검지로 세인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각오해라.”

그리고 움직인 루시드의 속도는 가히 빛과 비견할 만했다.

세인은 얼굴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경계지대의 바깥에 부딪혔는데, 초록색의 막은 몇 차례 출렁이며 그의 몸을 받아냈다.

마치 주인의 허락 없이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듯 보였다.

세인에게 주먹질을 한 루시드는 자신의 힘에, 되려 자신이 살짝 놀란 듯 보였다.

그러면서 세인을 곧장 뒤따라가지 않고 주먹을 폈다 쥐기를 반복했다.

그가 천천히 걸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미긴을 주워들자.

가미긴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글거리는 황금빛의 투기가 루시드의 몸과 가미긴까지 불태우며, 영역 안에서 파장을 수십 번 주고받았다.

세인보다 더욱 강해진 힘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가미긴으로 세인을 겨눈 루시드가 명령했다.

“가라.”

그러자 가미긴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며 빛 에너지를 쏘아냈다.

황금색의 광선은 지면과 일직선을 이루며 빠르게 이동했다.

세인이 그 공격을 인식했을 때, 빛은 이미 그의 어깨를 관통하고 있었다.

세인이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광선이 지나간 아래쪽 지면이 뒤늦게 부서지며 검은 조각들을 잔뜩 토해냈다.

그 끝에는 휘청이는 세인이 있었고, 세인의 뒤쪽에 있는 초록색의 영역은 광선의 힘을 흡수하여 더욱 덩치를 불렸다.

그리고 내구성이 더욱 강해졌다.

이 영역은 주인인 루시드뿐만이 아니라 세인의 힘마저 조금씩 흡수하고 있었다.

초록색의 막은 공격당하자마자, 수초가 지나면 잠깐 안쪽으로 줄어들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더욱 몸집을 확장 시켰다.

그런 식으로 점점 덩치를 불리고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안에서 현세의 물질은 본래의 형태와 성질을 가지지 못했다.

마치 무중력 안에 있는 듯 소용돌이 형태로 천천히 움직이는 검은 조각들을 헤치며, 루시드가 세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있은 세인의 얼굴을 걷어찼다.

세인의 몸이 떠오르려는 찰나 루시드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아주 잠시, 세인의 얼굴이 보였다.

빠르게 교차하는 루시드의 날개 사이에서였다.

끊임없이 세인을 두들기는 날개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춤추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가 그의 신형이 확 하고 거꾸로 뒤집혔다.

두 장의 날개가 세인의 발목을 낚아채 올렸기 때문이다.

루시드가 양손에 쥔 가미긴을 세차게 휘둘렀고, 본의 아니게 물구나무를 서게 된 세인은 마검으로 앞을 막아냈다.

두 개의 검이 으르렁거리며 부딪히자.

타원형의 충격파가 퍼져 나가며 초록색의 영역을 더욱 확장 시켰다.

전체를 물들이는 섬광이 초록색의 세상 안을 밝혔다가 원래의 색으로 놔두기를 반복하는 것도 그때였다.

가미긴을 뒤로 물린 루시드가 세인의 몸을 걷어찼다.

권능 발현 이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이제는 세인이 뒤로 날아갈 차례였다.

볼품없이 뒤로 날아가는 세인을 보던 루시드는 땅을 박찼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순간이동이나 마찬가지인 현상을 보였다.

중간을 가로막은 파편들에 부딪히지 않고 이동한 것이었다.

뒤로 날아가던 세인은 다가오는 노란 눈을 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파충류의 눈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권능이 만든 결계 안에서 루시드는 세인보다 무조건 강해진다.

그게 바로 루시드의 절대 법칙이다.

그야말로 사기스러운 능력인 것이다.

게다가 점점 확장되는 영역에서 벗어날 방법도 없었다.

루시드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세인의 죽음은 기정사실화처럼 보였다.

세인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이 영역을 멈추는 방법을 알까?’

아주 오래전 자신을 놓아주었던 루시드라면 물론 방법을 알 것이다.

그때 세인이 본 루시드는 초월자였다.

그 당시의 루시드라면 저렇게 번거롭게 쫓아올 필요도 없이 영역을 이용해 공격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루시드는 이 영역을 수족처럼 부리진 못했다.

오히려 거두는 방법도 몰라서 세상을 먹어치우게 할 가능성도 보였다.

세인은 마검을 천천히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감았다.

그와 동시에 검은 안개가 위아래로 솟구쳤다.

그것을 계기로 폭풍우가 몰아치듯 시끄러운 세계에 정적이 찾아왔다.

시간을 정지시킨 것이다.

데스 크라운의 힘은 루시드의 힘보다 상위 개념이었다.

그래서 시간에 간섭할 수는 있었다.

다시 눈을 뜬 세인은 멈춰져 있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루시드 또한 달려오는 자세로 굳어져 있었다.

일견하기에 그는 무방비 상태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인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대신 루시드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발견한 세인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영악하구나.”

그러자 정지되어 있던 공간이 거세게 출렁거렸다.

잠시 이동을 멈췄던 소리가 다시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것도 그때였다.

일부러 시간에 갇힌 척하던 루시드는 눈 깜박할 사이에 세인에게 쇄도했다.

물론 이곳에서 세인은 데스 크라운의 힘을 쓸 수도 있었지만, 영역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루시드였다.

세인이 힘을 사용한다고 루시드가 자신의 힘을 못 쓰는 건 아니었다.

데스 크라운의 힘을 저지할 권위가 없어 공간이 멈춘다면?

그 공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면 된다.

그것은 데스 크라운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정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여기에서 승자인 것이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하든 루시드가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시드는 그대로 가미긴을 휘둘렀다.

가미긴에게서 뿜어져 나가는 황금빛 서광은 뚜렷하게 가시화되었다가 무형화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은 세인을 짓밟았다.

세인의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오고 그의 옷이 찢겨 나갔다.

망토의 한 자락이 잘리며 그 조각이 떠올랐을 때, 루시드의 전진하는 몸에 맞아 옆으로 밀려났다.

“이제 알겠나? 지금 여기에서 벌레가 누군지? 이제 너는 죽는다.”

루시드가 차갑게 단언하자 피투성이가 된 세인이 웃었다.

그 웃음에 분기를 느낀 루시드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세인의 몸에서 검은 힘이 뿜어져 나왔다.

그 힘은 루시드의 영역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광폭하게 날뛰었다.

세인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했던 루시드조차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황금빛의 힘과 세인의 암흑물질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이리저리 뒤섞이며 주위가 끊임없이 요동쳤다.

서로 물고 물리며 으르렁거리는 격전이 펼쳐졌다.

그래봤자 한계는 뚜렷하다.

루시드의 승리였다.

여기는 그의 권능 속이었으니까.

이제 루시드는 세인의 처형을 위해 가미긴을 곧추세웠다.

그 상태로 천천히 앞으로 이동한다.

유희는 이제 끝났다.

눈앞의 적을 처형한 후에 죽은 이노센트들은 다시 살려내면 된다.

루시드의 눈앞에 비친 적은 무력한 사형수에 불과했다.

그때 세인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빛이 이곳에서는 다른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달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루시드의 권능이 재해석한 달은 위치마저 현실과 미묘하게 달랐다.

이노센트들을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들의 존재는 신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버지.

진정한 어머니.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드의 인식은 세상의 법칙을 태어나게 했다.

분명한 것은 인간 이전에 이노센트가 있었다.

더욱 뚜렷한 사실은 그들은 인간들보다 상위존재라는 사실이다.

초창기의 그들은 인간에게 있어 신과 마찬가지였고 동시에 천사였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악마와 마찬가지인 존재이기도 했다.

아버지.

신.

천사.

악마.

그 모든 모습이 바로 이노센트다.

어쩌면 세상에서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엄청난 기회를 저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면 세계 밖의 수준을 획득할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이 시대가 어떤 상처와 비극을 입었다 해도, 결국 폭력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인은 여기에서 객관적인 정의나, 피아를 떠난 가치, 그리고 올바름을 관철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뜻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상대의 위치가 얼마나 지고하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든 그에게는 하등 상관없었다.

만에 하나 역으로 이노센트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 해도, 전혀 관심 없었다.

이놈들이 존재하면 인간들이 죽는다.

언제나 그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산속에서 살아가는 소녀가. 들판에서 서 있는 소년이. 노인이. 남자가. 여자가. 아이가. 죽는다.’

산속에서 살아가는 멍청한 소녀가.

들판에서 서 있는 멍청한 소년이.

멍청한 노인이.

멍청한 여자가.

멍청한 아이가.

죽는다.

상대보다 우월하지 못하고, 어리석다고 해서 살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노센트들의 고귀한 가치를 몰라보는 불한당이라 말해도 좋다.

기필코 이놈들을 죽이겠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라는 존재가.

인간보다 더욱 나은 생명체의 좌절을 품지 못하는 짐승이 되어도 좋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놈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러운 악마가 되어도 좋았다.

어떤 대가를 감수해도 좋았다.

이놈들을 죽여 인간을 지키겠다.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해도 기필코 이것을 이루겠다.

오로지 그것만이.

세인이 품은 소망이었다.

세인에게 다가가던 루시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위압적인 시선과 마주쳤다.

지금 보이는 세인의 차가운 눈은 마치 심판자를 연상시켰다.

힘의 고하를 떠나 그 앞에 마주한 생명체를 얼어붙게끔 했다.

세인의 입술이 열리고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듣는 자의 심장을 싸늘하게 움켜쥐는 힘이 있었다.

“원 없이 날뛰었나? 루시드?”

말에 깃든 무게감에 루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뭐?”

“이로써 과거 네게 도움을 받았던 빚은 갚았다.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어라.”

그 말을 끝으로 검은 왕이 든 마검에서 검은 힘이 흘러나왔다.

그 힘은 검은 갑옷이 되며 왕의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갑옷을 만들고도 검은 힘이 남아돌아 망토처럼 솟구쳤으며, 그 자체로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었다.

초록색의 영역은 검은 힘에 밀려 몸을 뒤흔들더니 가까스로 검은 힘을 받아내었다.

반구형으로 밀리는 검은 힘이었지만, 언제라도 주변을 깨트리고 바깥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을 보여주었다.

검은 영역이 으르렁거리며 주변을 잡아먹고 있는 현상 앞에서 루시드가 외쳤다.

“끝까지 나를 조롱할 셈이냐? 너는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이기지 못해!”

루시드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인의 신형이 검게 변해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그의 육신은 검은 폭풍이 되어 루시드의 몸을 잡고 뒤흔들었다.

마치 안개가 휘몰아치며 증오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눈을 빛낸 루시드는 가까스로 세인의 위치를 찾아냈다.

몸이 격렬히 흔들리는 와중에 그가 가미긴을 휘두르자.

검은 폭풍 속에서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빛을 머금은 충격파가 번지고 그 폭발을 다시 검은 소용돌이가 잡아먹었다.

“으으아아아!”

루시드의 포효 앞에서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세인이 나타났다.

가미긴과 마검은 서로를 죽일 듯이 밀어붙이며 살기를 뿌려댔다.

세인과 루시드의 손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상대의 검을 마주 잡았다.

그 상태로 상대를 향해 전력을 다해 밀어붙인다.

어마어마한 힘에 몸이 흔들리면서도 루시드가 웃었다.

‘기필코 이긴다!’

어차피 루시드가 이길 겨루기였다.

그건 당연하다.

세인이 아무리 힘을 뽑아내 봤자, 여긴 그의 영역이었다.

권능의 안이란 말이다.

하지만 세인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둘은 잠시나마 고착 상태에 들어갔다.

보라색의 안광과 노란 눈빛이 마주 닿을 듯 가까워지는 찰나.

세인의 갑옷이 파탄을 드러냈다.

무조건 세인보다 강한 루시드의 힘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자 루시드가 이를 드러내며 세인을 비웃었다.

“뭐라고 지껄이든 너는 죽는다!”

기고만장하게 떠들더니 꼴좋다는 표정이었다.

검은 투구가 부서져 뒤로 밀려나고 세인의 얼굴이 노출되자 갑옷이 부서지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세인의 표정은 낭패를 당한 얼굴이 아니었다.

소름 끼치게 무표정한 그 얼굴.

세인의 얼굴을 본 루시드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먹구름처럼 의혹이 피어올랐다.

‘눈의 초점이?’

뒤늦은 깨달음이 다가왔다.

‘나를 보는 게 아니고 내 뒤를 보고 있는 건가?’

그때 루시드의 주변에서 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긴박한 지금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받아들여라.”

“너의 죽음을.”

그리고 마검이 루시드의 등을 꿰뚫었다.

루시드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가슴을 헤집고 나오는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관통한 마검은 그의 심장을 관통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검에 묻은 피가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하다.

‘이게 무슨?’

루시드가 입에서 피를 토하자 여전히 앞에서 대치 중인 세인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루시드와 달라붙어 힘겨루기를 하는 세인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쑥하고 검날이 루시드의 몸 뒤를 빠져나갔을 때, 루시드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가미긴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릴 때, 앞에 있던 세인이 힘을 거두며 뒤로 약간 물러났다.

그러자 균형을 잃은 루시드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입에서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루시드였다.

세인은 루시드의 손을 잡고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자비 때문이 아니다.

루시드가 부축해주는 세인을 올려다볼 때, 여전히 무표정한 세인이 마검을 휘둘렀다.

루시드의 몸에서 그의 머리가 깨끗이 분리되었다.

테러 로드가 죽은 것이다.

루시드가 허무하게 죽자 검은 폭풍이 잦아들었다.

그런데 그건 주변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주인을 잃은 결계가 점점 사라져 간다.

마검을 아래로 내린 검은 왕은 홀로 서서 주변의 영역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길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폐허 속에서 세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얼굴 앞으로 피에 젖은 칠흑의 검날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차가운 검날이 그의 이마에 닿았을 때, 그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승리를 완성 시켜야만 한다.

세인이 마검의 힘을 개방하자 세상이 잘게 흔들렸다.

웅웅 거리는 소리로 뒤덮인 주변이 조금씩 역행하기 시작한다.

격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가 보였다.

고여 있는 물은 가끔 흔들렸다.

동그란 파문이 계속 일어나다가 잠잠해지곤 했다.

격하게 일어날 때는 여러 개의 원이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번져 나가다가, 겉 부분에서 물이 넘칠 듯 찰랑거렸다.

거기까지가 루시드와 세인의 대결로 인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의 표면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세한 진동이 끊임없이 잘게 일어나 물을 흔들고 있었다.

진동 폭에 따라 물이 뿌옇게 되는 양상까지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잠해지며 고요를 맞이했다.

사실 그 고요가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그 고요 속에서 초록색이 물결이 일어나며 사방을 뒤덮었다.

이제 세인은 과거로 되돌아가 다시 초록색의 영역 안인 것이다.

물론 영역의 주인인 루시드도 건재했다.

그가 이마에서 검을 살짝 떼어내자 등 뒤에 있는 루시드가 느껴졌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바라보았던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등이, 아까 루시드를 죽일 때 본 기억으로서 머릿속에 남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세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부서지는 갑옷을 걸친 또 다른 자신이 보였다.

루시드와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아주 생소한 경험이었다.

빈센트가 필요했던 이유는, 루시드의 권능은 한 명을 지정해 무조건 일대일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법칙의 허점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처음부터 상대가 둘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루시드는 자신이 구현한 세계 속에서 상대보다 무조건 한 배 반이 강해진다.

그건 너무나 사기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쌍둥이도 아닌, 처음부터 완전히 같은 사람이 루시드의 영역 안에서 그 법칙을 따르게 된다면?

빈센트보다 더 강해진 루시드에게 세인이 다가간다.

빈센트와 세인은 하나의 존재와 다름없으므로 루시드가 만들어낸 영역은 세인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었다.

같은 영혼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세인의 승리가 된다.

하지만 가미긴은 이 계획을 간파하고 빈센트를 제거해 버렸다.

그 상황에서 루시드와의 대결은 세인의 패배로 확정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루시드를 죽여 승리를 거둔 세인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렸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래에서 세인이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루시드를 죽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공간에 두 명의 세인.

똑같은 영혼.

그리고 현재 루시드는 눈앞의 세인을 찍어 누르고 목숨을 탈취하기 위해 힘을 다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령 뒤로 다가온 자를 눈치채게 되더라도 기민하게 등을 돌리는 것 따위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힘으로도 세인이 위다.

왜냐면 루시드의 힘은 한 명을 지정해 그보다 조금 더 강해지는 것이었고.

이렇게 두 명으로 늘어나 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인 쪽에서는 오히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다.

게다가 어쩌면 세 명.

네 명으로 늘어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이게 바로 빈센트를 잃은 세인이 생각해낸 해답이었다.

결국 이곳은 세인의 처형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세인은 마검을 루시드의 등에 가져다 대며 아까 자신이 들었던 말을 내뱉었다.

“받아들여라.”

그러자 루시드와 검을 맞대고 있는 세인이 끝말을 이었다.

“너의 죽음을.”

세인은 마검을 들어 루시드의 등을 찔렀다.

검은 자제할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 루시드의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결국 마지막에는 루시드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검날을 내려다보는 루시드.

모든 게 세인의 기억대로다.

이로써 세인은 예정된 결말에 도달한 것이다.

루시드의 등 뒤에 서 있는 세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루시드의 앞에 있는 세인이 피로 물든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예정된 행동을 했다.

그 후 세인은 또 다른 자신이 루시드의 손을 잡아주고, 거침없이 목을 베어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테러 로드의 죽음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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