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 검은 위광. (2)
루시드는 바이테스의 왕좌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 옆에서 길게 위로 뻗어 있는 창문들이 여러 개 보였는데, 그 창문을 통해 주변이 박살 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멀쩡해 보이던 종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다리가 흔들리더니 끝에서부터 천천히 부서졌다.
주저앉은 다리가 내는 폭음과 진동이 성을 뒤흔들 정도였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는 우박처럼 창문을 때렸다.
멀리에서부터 가까이 검은 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루시드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루시드는 작금의 상황이, 과거의 자신이 했던 돌팔매질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때 지니고 있던 불타는 황금안은 현재에 이르러 파충류와 같은 노란 눈이 되어 버렸다.
그가 지녔던 자애와 현명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태양을 상징하던 눈동자도 이제는 냉혹함만을 담은 그릇이 되었다.
그래서 루시드는 다가오는 검은 힘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검은 연기가 화염처럼 치솟았다.
그 속에서는 이노센트들이 분명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나, 루시드는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한때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던 존재였고 깊이 사유하는 자이기도 했다.
자신이 책임진 종족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고, 족쇄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으나 좌절하기도 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불타는 정의감으로 종족을 힘으로써 계도하는 대신 포용을 펼쳤다.
분노가 아닌 자애로운 시선으로 방종을 눈감아 주었다.
적어도 그는 종족을 억압하는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루시드는 이노센트들에게 자유를 허락했다.
멈출 수 없는 타락에 대해 동정을 보였다.
그리고 통렬한 자괴감에 침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는 종족의 종말에 머물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그렇게 끝에 머무르게 된 자.
루시드.
안타깝게도 지금의 그는 그저 커다란 동물이다.
고귀한 영성과 지력을 잃고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한 마리의 생명체에 불과했다.
창밖의 고통을 외면한 루시드는 가미긴을 들어 검날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흉포한 야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악함을 가득 담은 노란 눈이 루시드와 마주했다.
* * *
루시드가 그렇게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인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섰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긴 복도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그동안 그가 죽인 이노센트의 수는 숫자를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자 거꾸로 달라붙어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기둥에도 검은 형체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물체들은 몸 곳곳에서 사람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엄청난 학살로 인해 데드 페이스들이 끊임없이 농축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낮은음으로 계속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중첩되어 성안이 마치 거대한 오페라 속에 파묻혀 있는 것만 같았다.
망자들이 부리는 노래는 지나치게 우울하고 파괴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었다.
몇몇 데드 페이스는 주제도 모르고 세인에게 달려들었다가 마검에 닿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인이 앞으로 걸어 나가자, 마검의 끝이 바닥에 끌려 쇳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수십여 미터를 전진하다가 멈추었다.
세인의 앞에 넉 장의 날개를 가진 이노센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리석 조각상처럼 하얀 육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웬 가냘픈 여자의 목을 쥐고 있는 상태다.
“불한당아. 거기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여인의 목숨을 빼앗겠다. 이 여자는 이곳의 왕족이다.”
황금 투구를 쓴 이노센트가 앞으로 나와 세인에게 호령했다.
기세등등한 얼굴에는, 인질을 잡고 있다는 한 조각의 부끄러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인의 눈이 인질로 잡혀 있는 여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 속에 깃들어 있는 호소도 호소지만, 무엇보다도 가엾은 여인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작은 새처럼 말이다.
여인을 노려보는 상태로 세인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노센트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세인이 발휘한 힘을 보았다.
그러니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인은 여인을 노려보는 상태로 마검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세상이 멈추었다.
데드 페이스도, 이노센트들도 그 정지된 검은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물며 여인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다시 검을 내린 세인은 천천히 여인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계단을 밟아 올라가 여인의 앞에 선 그는,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공포에 질려있는 여인의 얼굴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지옥으로 변해버린 수도에서 멀쩡한 여인이 존재할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노센트들은 왕족이라고 해서 대우를 해줄 놈들이 아니었다.
‘한패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세인은 여인의 뒤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여인의 뒤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의 파여진 등 쪽으로 갈비뼈와 훼손된 채 붙어 있는 몇 개의 장기들이 보인다.
이노센트의 한쪽 손은 여인의 내부와 연결된 상태였다.
놈은 자신의 신경 조직을 여인에게 연결해 연기를 펼친 것이다.
시체를 쓰면 금방 들통이 날 테니 살아있는 여자를 이렇게 요리한 것이겠지.
세인의 검이 단호하게 움직였다.
칠흑의 검날은 여인은 물론이고 이노센트들도 휩쓸었다.
그리고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앞을 향해 걸었다.
그로부터 몇 걸음이나 떼었을까?
멈춰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는 목을 잃는 육체들이 한꺼번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잡하게 얽혀있는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세인의 뒤꿈치를 잡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하지만 세인은 벌써 저만큼이나 앞질러 가버렸다.
이제 그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은 바이테스의 수호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문뿐이었다.
세인은 검을 든 상태로 천천히 문을 밀었다.
그런 그의 동작에서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긴장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좀 이상한 점이었다.
빈센트와 함께 루시드를 해치우려는 계획은 완벽히 실패했다.
그건 곧 루시드의 권능을 파훼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공략법이 없다면 남은 것은 패배뿐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세인이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문을 여는 것은 이상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금의 세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시드를 해치우지 못하면 어차피 인간의 세상은 끝장이 나고야 만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루시드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다가오는 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세인을 흥미롭다는 듯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건 마치 희귀한 도자기나 찻잔을 품평하기 위해 유심히 살펴보는 것과 비슷했다.
즉 지금의 루시드에게는 긴장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지 않는구나. 하긴 여기까지 왔다면 당연한 것이겠지.”
루시드의 목소리는 매우 탁하고 거칠었다.
그리고 음성 자체에 광기가 내재하여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세인은 루시드의 노란 눈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불쌍한 루시드.”
“내 이름을 알고 있군. 그런데 수식어가 마음에 안 들어.”
“가엾은 루시드. 너는 오늘 나에게 죽는다.”
그 말을 내뱉는 세인은 루시드를 능가하는 기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루시드는 지독한 반발심을 가졌다.
그의 무의식은 지금 세인의 모습에서 데스 크라운을 느낀 것이었다.
그 감각이 루시드에게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놈이 매우 위험하다고 말이다.
“이봐.”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듯이 루시드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루시드의 거구가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어서 강철이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세인의 등 뒤를 점한 루시드는 그대로 가미긴을 내리친 것이었다.
세인은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방어했고 말이다.
옆으로 살짝 얼굴을 돌린 세인은 가미긴을 보고 중얼거렸다.
“낯익은 검이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미긴을 막았던 마검이 몸을 뒤틀며 빠르게 움직였다.
루시드는 상체를 뒤로 젖혀 간발의 차이로 마검을 피해냈다.
거대한 가미긴이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에 무수한 잔영을 만들어 내었다.
그 잔영은 마검인 데스를 만나 불꽃을 튀겼다.
거대한 루시드의 힘에 밀릴 만도 한데 세인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나가며 가미긴을 쉽게 튕겨냈다.
가미긴을 쥔 손이 옆으로 젖혀지자 루시드는 자유로운 한 손을 뻗어 세인의 얼굴을 움켜쥐려 했다.
세인은 그런 루시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주 짧은 순간 벌어진 힘겨루기는 세인의 승리였다.
압도한 세인이 루시드를 집어 던져 버린 것이다.
“크윽!”
루시드는 뒤로 날아가며 기둥 두 개를 부순 다음에야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세 번째 기둥에 등을 맞닿은 상태로 말이다.
그걸 바라보는 세인은 몸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 상태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세인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본 루시드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 공격을 세인이 마검을 들어 막아내자 방 전체가 들썩였다.
그리고 홍역을 앓듯이 덜덜 떨리는 상태에 들어갔다.
검을 맞댄 루시드와 세인이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시드로서는 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세인은 가미긴 앞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또다시 루시드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이제는 세 번째 기둥마저 부서지면서 루시드가 뒤로 굴러갔다.
먼지가 비산하며 천장까지 뒤덮는 가운데, 세인의 손이 루시드의 날개를 잡으려 했다.
그때 휙 하고 몸을 뒤집은 루시르가 세인의 얼굴과 가슴에 연타를 날렸다.
커다란 주먹이 수십 개의 잔상을 보일 정도로 빠른 연타였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불꽃들이 일어났다.
세인은 귀찮다는 듯이 루시드의 공격을 손으로 걷어냈다.
루시드의 몸에서는 노란색의 기운이 번져 나왔다.
마치 오라처럼 그의 몸에 머무는 기운은 닿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절단해 버렸다.
거기에서 딱 두 가지.
세인과 마검만은 예외였다.
검빛이 날아다니며 벽과 천장에 깊숙한 자국을 내었다.
가미긴은 소리를 지르며 세인을 홀리려고 했고, 루시드처럼 거대한 몸집으로 상대를 억누르려 했다.
놀랍게도 세인은 가미긴을 피하거나 막는 게 아니라, 검면을 손바닥으로 후려쳐 버렸다.
그 난폭한 힘에 루시드의 거구가 휘청일 정도였다.
억지로 힘의 방향을 뒤틀었으니 루시드의 두꺼운 허리에서 통나무를 쥐어짜는 소리가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균형을 잃은 찰나.
루시드와 세인의 눈빛이 교차했다.
“….”
짧은 정적을 깨트린 것은 세인의 발차기였다.
루시드의 몸이 위아래로 접히며 다시 뒤로 날아갔다.
그렇게 벽을 뚫고 날아간 루시드의 앞에 마검이 날아왔다.
가미긴을 휘둘러 그것을 쳐냈을 때 뒤에서 루시드의 두꺼운 목을 휘감는 손이 있었다.
손의 주인은 세인이었다.
세인은 루시드의 몸을 힘껏 끌어당겨 옆에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노란빛들이 움찔거리며 주변으로 흩어질 정도로 난폭한 기세였다.
루시드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런 그의 복부에 세인이 주먹을 질러 넣자, 주먹과 복부 사이에서 공기가 터져나갔다.
그 압력으로 인해 루시드의 등은 벽과 충돌했다.
벽에 거미줄과 같은 금이 간 것은 물론이고 건물 전체가 들썩였다.
세인은 손을 뻗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을 불러들였다.
마검은 세인의 손에 잡히자마자 검은 궤적을 그렸다.
그것을 가미긴이 힘겹게 막아내자.
마검은 채찍처럼 여러 갈래가 되어 다시 루시드를 노렸다.
두 개의 마검이 허공에서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고, 그때 오가는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루시드의 우람한 상체가 몇 번이나 뒤로 흔들릴 정도였다.
막상 이렇게 붙게 되니 세인이 시종일관 루시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각성 전이라면 몰라도 완전히 각성을 이룬 세인은 테러 로드와 호각 이상의 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압!”
이대로는 안 된다 싶었던 루시드가 기합을 지르자, 세인의 몸을 두르고 있던 검은 연기가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처음으로 세인의 몸이 뒤로 비틀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루시드는 두 손으로 가미긴을 잡았다.
‘베어버린다!’
그의 근육 면적이 팽창하면서 가미긴에 전력을 실었다.
그 상태로 루시드는 가미긴을 휘두른다.
소리마저 떨구고, 검날이 빛으로 화할 정도로 강력한 베기였다.
그 베기가 세인의 몸에 적중했을 때 건물은 더 이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붕괴한 천장에서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리고, 비틀린 벽들이 견디다 못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아수라장 속에서 여러 겹의 층들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굉음과 함께 붕괴하는 현장에서 다시 충격파가 터졌다.
루시드가 재차 검을 휘두른 것이다.
루시드의 검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세인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에 충격을 주었다.
무너져 내리던 건물은 횡으로 움직인 검기에 잘려나갔다.
자신의 공격이 먹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루시드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세 번째 공격을….’
다시 검을 휘두른 루시드의 얼굴이 뒤로 밀려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세인의 무릎이 날아와 안면에 부딪히자, 루시드의 코가 뭉개지면서 눈알이 얼굴 안쪽으로 밀려났다.
뼈가 주저앉고 근육들이 풍압에 밀려나며 부르르 떨렸다.
뒤이어 고통을 느낀 신경들이 불타는 듯한 느낌을 뇌에 전달했을 때에는, 루시드의 목뼈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꺾어진 상태였다.
퍼어억!
무너지는 건물 밖으로 루시드의 거구가 튕겨 나갈 때 세인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면서 마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추락하는 루시드에게 폭발이 일어났다.
부서지는 잔해 속에 박히는 루시드의 몸 위로 세인이 내리꽂혔다.
세인의 발이 루시드의 허리를 반으로 분질러 놓았다.
마치 거대한 곤충의 등위에 못을 꽂아 넣듯이.
단호하고, 잔인한 공격이었다.
지금 루시드의 얼굴은 원래 상태로 수복되는 중이었다.
그러니 허리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루시드의 비명이 처음으로 가미긴의 비명을 능가했다.
세인은 굳은 얼굴로 루시드의 몸에 연타를 먹였다.
그의 주먹이 루시드의 몸에 꽂힐 때마다, 루시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테러 로드인 그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쓰레기를 차내 듯 발로 루시드의 얼굴을 걷어차 버린 세인은, 전신의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힘은 장난이었다는 듯이 검은 안개가 일어나 사방을 뒤덮었다.
바이테스의 내성은 그 검은 힘에 홍수를 만난 듯 좌우로 들썩였다.
샹들리에와 함께 데드 페이스들이 녹아내렸다.
뿐만 아니라 바깥에 몰려들던 이노센트들도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다음에는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극통에 몸을 떠는 것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시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검게 불타고 있는 세인을 올려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데스 크라운이 준 힘을 완전히 각성한 세인은 테러 로드보다 한 수 아래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재 세인의 힘은 테러 로드보다 더 끔찍했으면 끔찍했지 모자라진 않았다.
고대에도 데스 크라운과 홀리 크라운은 루시드보다 상위 존재였다.
그리고 고대에서 유미리가 말했듯이, 루시드가 마라에게 경의를 표시한다고 되어 있었다.
지금 마라가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의 그림자로 밝혀졌으니, 루시드는 둘의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게도 경의를 표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데스 크라운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세인은 검은 왕으로서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노센트들이 잔혹하게 짓밟은 인간들의 장소에서, 이노센트들에게 무한한 공포를 던져주고 있었다.
검게 불타고 있는 세인은 마검을 가슴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루시드에게 도발했다.
그런 그의 말투에 묻어 있는 것은 이노센트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과 경멸이었다.
“가엾은 루시드. 약한 루시드.”
세인의 조롱에 이를 악문 루시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힘을 모은 듯 날개를 쫙 펼친 그가, 가미긴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노란빛이 폭사 되어 사방을 가득 메웠다.
빛의 주인인 루시드는 그대로 세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세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수직으로 내려오는 검날을 보고 있었다.
공기와 마찰한 가미긴이 불그스름한 빛을 띄웠다.
그 붉은 날이 세인의 이마를 쪼개려는 찰나.
최후의 순간에 세인은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가미긴은 그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했지만, 어깨를 가격하는 것은 성공했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땅이 흔들거렸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세인은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검을 맨몸으로 받아낸 그는 얼굴 옆의 가미긴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고작 이거냐?’라는 물음 같았다.
루시드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 그는 다시 쓰레기처럼 무릎을 차여서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나동그라졌다.
마치 이 모든 게 지독한 희극 같았다.
세인은 타오르는 검은 힘 속에서 안광을 빛내며 발로 루시드의 얼굴을 밟았다.
루시드의 양손이 세인의 발을 붙잡았지만 밀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태산이 올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루시드. 내가 네 종족을 멸살시킬 자다. 그러니 벌레처럼 굴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지독히도 거만한 세인의 말에 루시드의 눈에서 광망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순수한 힘으로 쳐 죽이고 싶었던 게 루시드의 본심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독한 모멸까지 받고 나서야 권능을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이 자식. 죽여 버리겠다.”
루시드는 자신의 권능을 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