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 검은 위광. (1)
황혼 녘이 하늘에 드리워졌다.
화가의 거친 손놀림이 빚어낸 듯 하늘에 그려진 명화는 천천히 움직이며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그림이 서서히 어둠에 잠겼을 때, 황량한 벌판에서는 하얀빛 덩어리들이 떠 있었다.
그 빛 덩어리는 수명이 다한 듯 깜박였다.
그리고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지다가 하나둘씩 꺼져간다.
마지막으로 바이테스의 수도 바깥에 남은 빛 덩어리가 깜박거렸다.
홀로 남은 빛이 사라지기 직전.
그 안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 나왔다.
허리를 굽힌 그의 발과 손이 땅에 닿았을 때, 그 뒤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망토의 끝자락이 있었다.
그 한 뼘 정도가 될 듯한 망토의 끝자락은 칼에 베인 듯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빛 덩어리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가 빛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늦었다면, 혹은 몸을 반쯤 빼냈을 때 빛이 소멸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펄럭이는 망토의 끝이 그런 상상을 하게끔 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세인은 고즈넉한 벌판의 분위기를 음미했다.
전방의 성내에서 무슨 비극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지는 몰라도, 그가 느끼기에 밖은 평온했다.
귓불을 빨갛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과 주변에 내려앉은 이 침묵마저도 세상이 그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거기에 있는 세인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는 발에 느껴지는 너른 땅의 감촉을 즐기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결판을 내기 좋은 시각이다.
마음의 준비는 끝낸 지 오래였다.
막상 이 시간이 되자 머릿속은 바람 없는 수면처럼 아주 깨끗해 졌다.
두려울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런 세인의 등 뒤로, 능선 속으로 침몰한 태양이 마지막 숨을 거두듯 한줄기 미약한 서광을 거두었다.
바이테스의 수도를 점령한 이노센트들은 성문 쪽에 거대한 문지기들을 배치해 두었다.
방패를 연상시키는 녀석들은 게딱지처럼 둥글넓적한 몸과 팔을 가지고 있었다.
눈도 몸 밖으로 길게 돌출되어 있었는데, 그 동그란 두 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세인을 양쪽으로 나누어 담았다.
“누구냐?”
몸에 달린 입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눈이 달린 촉수는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으로 길게 움직였다.
그 눈은 점점 세인의 얼굴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세인은 다가오는 눈을 보면서도 괘념치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러자 두 눈은 점점 뒤로 물러나며 의혹을 담았다.
“뭐야 이 녀석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상한데.”
문지기 역할을 하는 놈들이 지능이 높을 리가 없었다.
성안의 상황을 아는데 홀로 나타나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오는 것이 문지기로 하여금 경거망동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선 세인에게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렸다.
“너 혹시….”
그때 세인이 녀석의 두 눈을 잡고 몸체에서 뜯어냈다.
마치 잡초를 한 움큼 잡고 뜯어내듯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쪽에서는 산 채로 눈이 뜯긴 것이었다.
“으아아악!”
동료의 외침에 세인을 주시하고 있던 옆 놈이 그제야 공격을 가해왔다.
쾅!
두껍고 묵직한 팔이 세인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가 부서져서 즉사를 면치 못할 충격이었다.
하지만 세인의 몸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이어서 상대의 집게발이 세인의 목을 조였다.
하지만 집게에 달린 들쭉날쭉한 가시는 세인의 피부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세인은 목을 조르는 집게에 손을 대고 천천히 벌렸다.
그런데 그 벌리는 각도가 상대의 수용 한계를 가뿐히 넘어 버렸다.
뿌드득 소리와 함께 역으로 꺾어진 집게에서 초록색의 액체가 튀었다.
“아아악!”
그뿐만 아니라, 이왕에 상대가 팔을 뻗었으니 세인도 대응을 해주었다.
뻗어있는 상대의 팔을 올려친 것이다.
그 힘에 상대의 접혀지는 관절이 거꾸로 치솟아 오르며 팔이 박살 났다.
“으아악!”
입에서 초록색의 체액을 뱉어내는 문지기가 연달아 비명을 뽑아냈다.
팔 하나가 거덜 났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눈이 뽑힌 녀석은 그 비명을 듣고 팔을 붕붕 휘두르다가 오히려 동료의 몸을 쳐버렸다.
세인은 팔을 휘두르는 문지기에게로 다가가 몸통 박치기를 했다.
그러자 육중한 문지기의 몸이 뒤로 날아가서 성문에 맞았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납작해진 문지기는 성문에 초록색의 물결 같은 자국을 남겼다.
껍질 안쪽의 장기가 곤죽이 되어 즉사한 것이다.
이제 팔이 부러진 놈도 뒤를 따라갈 차례였다.
세인은 위에서 망치처럼 내려치는 문지기의 팔을 잡았다.
그의 등 뒤에서 가해졌던 공격을 그대로 앞으로 넘겼다.
위로 떠 오른 육중한 동체가 땅에 처박혔을 때, 세인의 발이 녀석의 머리를 밟았다.
콰직!
이렇듯 그가 문지기 둘을 해치우는 데는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소란을 눈치챘는지 성벽에서 하나둘씩 빛이 생겨났다.
세인이 고개를 들어 성벽을 보니 무수한 안광이 빛을 발하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문지기와 같은 이노센트들은 성벽에 달라붙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자 성벽 전체에서 물결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인에게는 충격적이고 기가 질릴 장면이었겠지만, 눈을 반쯤 감은 세인은 나른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많은 수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아주 약간 시간이 지체될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와라.”
세인의 말에 수많은 문지기가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사체가 산처럼 쌓여가는 가운데, 세인의 몸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휘말린 문지기들은 껍질 안쪽이 녹아내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숨을 거두었다.
녀석들을 해치운 세인이 성문을 지나자, 아직도 불타고 있는 건물들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가 밟는 딱딱한 바닥은 말라붙은 피로 인해 지나치게 끈적거렸다.
또 젤리처럼 굳은 곳은 깊이가 신발의 밑창 위로 듬뿍 올라올 정도였다.
그때 건물 하나가 신음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그 소리와 진동에, 집들 밖에서 쇠사슬에 매달린 시체의 발들이 반응하듯 흔들거렸다.
세인의 뒤로 그의 발자국이 남겨졌다.
인간들의 피가 만들어주는 족적이었다.
거대한 쇠기둥들이 줄을 서고 거기에 장식된 꽃처럼 매달려 있는 시체들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부서진 집들이 사방에 한가득하였고 허리가 부러진 고층 건물도 보였다.
분수대 쪽에서는 여러 개의 손이 해초처럼 튀어나와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게 시선에 잡혔다.
부서진 거리가 숨겨둔 골목 속에서는 끊임없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불타거나 이미 타고 남아 검게 숨죽인 건물들의 뒤로, 멀리 고함과 비명이 길게 선을 그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쫓는 자의 환희와 쫓기는 자의 사냥 당하는 비통함이 오늘 밤을 어지럽게 수놓고 있었다.
그들의 신음과 울음은 밤사이를 뛰어다니는 불규칙한 낙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실컷 죽이고, 이제는 미로처럼 변한 시가지에서 생존자들을 상대로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인가?’
세인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그의 옆에 있는 삼층집의 지붕에서 몸을 드러내는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풍성한 회색 갈기를 등까지 보이는 놈은 꽤 강해 보였다.
붉은 눈을 가진 이노센트는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 세인을 내려다보았다.
동료들의 유흥에 참가하지 않은 녀석은 지루할 만큼 시간을 들여 세인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즐겁지?”
“뭐?”
“왜 웃고 있냐는 말이다.”
그러자 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몸이 흐려진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회색 갈기를 가진 이노센트는 순간 시야에서 세인을 놓쳤다.
하지만 어디로 갔나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옆으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의 주인은 숨결도 가지고 있었다.
넓디넓은 바이테스의 수도에서 유일하게 안정적인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의 숨결이다.
세인의 손이 이노센트의 팔을 부쉈다.
사실 이노센트는 세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알고서 방어하려고 팔을 얼굴 옆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그의 굵은 팔은 맥없이 부러지며 세인의 공격을 허용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세인의 손은 힘과 속도를 줄이지 않고 이노센트의 머리를 관통했다.
“커흑!”
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노센트의 목을 관통한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 보았다.
피에 젖은 자신의 손은 이노센트의 피로 물들어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부치고는 꽤 쌀쌀한 밤이다.
불이 났는데도 말이다.
“이제부터 너희들을 죽일 것을 생각하니 즐거워서.”
그가 손을 뽑아내자 숨이 끊어진 이노센트가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회색 갈기를 가진 이노센트도 평소 한가락 하는 놈이었는데, 녀석이 지닌 무력을 생각하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났을 때 세인은 지붕 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검은 선을 그으며 앞으로 이동했다.
그 동선에 있는 것은 건물과 불, 그 무엇도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그거야 이노센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인이 수도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그때, 아주 멀리에 있는 고풍스럽고 높은 첨탑에서는 즐거운 고문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위 귀족들을 몇 놈 잡아다가 쇠가시가 박힌 관에 넣고 흔드는 놀이였다.
유쾌한 기분으로 고문을 즐기고 있던 테러 나이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둥근 눈이 향한 곳은 세인이 이동하고 있는 쪽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부하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웨폰 마스터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목을 길게 밖으로 뺐다.
밖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 * *
세인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이노센트들은 세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한 이노센트는 높은 첨탑 위로 올라가 개구리처럼 목을 부풀리며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동료들에게 강력한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불에 타닥이는 소리를 내는 건물 위의 야공을 길게 찢었다.
그러자 뒤척이듯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생쥐를 쫓는 것처럼 인간들을 몰아내던 이노센트들이 기지개를 켜며 날아오르는 소란이었다.
알림이 끝났을 때 주위에 살아있는 이노센트는, 부풀린 목을 가라앉히는 이노센트밖에 없었다.
닭의 머리를 닮은 이노센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인을 보았다.
피에 젖은 세인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두르자 공포에 질린 닭의 머리가 밤하늘로 날아갔다.
그때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던 이노센트들이 급강하하며 세인을 덮쳤다.
내리꽂히는 충격파가 연달아 첨탑을 때렸다.
처음에는 그래도 몇 방을 견디던 첨탑은 점점 흔들거리더니 위쪽이 부서져 나갔다.
균열이 일어나며 층들이 내려앉았고 자욱한 먼지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세인은 폭삭 내려앉은 첨탑 속에서 눈을 붉게 밝히고 달려드는 이노센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흥분 상태인 듯 신나는 소리를 질러대며 내리꽂히는 이노센트들은 세인의 주먹에 맞아 터져나갔다.
날아오던 기세 그대로 상체가 터져 나간 채 하반신이 빙글빙글 돌아 벽에 부딪힌다.
그 위로 내리꽂히던 이노센트는 세인의 발차기에 맞아 피의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노센트의 파편들이 달구어진 철판 위의 물방울처럼 요란하게 튀겼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몇 마리의 이노센트가 공중에서 불을 뿜어 보았다.
폭염 속에서 일렁이는 모습으로 잠시 서 있던 세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줄기가 일어나자 갑자기 이노센트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양쪽이 어긋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반으로 잘린 몸이 부서진 건물의 잔해에 맞아 이리저리 튕길 때 세인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런 그에게 달려들어 힘을 겨루려던 이노센트의 몸을 찢어내는데,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노센트의 발차기가 세인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세인의 몸은 검은 선을 그으며 회색빛 회관을 뚫고 땅에 처박혔다.
그런 세인의 뒤를 따라온 황금색의 이노센트는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강한 힘만큼 자만심을 가진 녀석은 발로만 세인을 상대해줄 요량이었다.
“바이테스의 강자여. 덤벼봐라. 3번의 공격을 양보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여유를 부리던 놈은 누워있는 세인의 발차기에 정강이가 부서져 나갔다.
그 바람에 몸이 기울어지며 아래로 주저앉은 그의 얼굴이 그제야 세인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발견한 세인의 보라색 눈은, 괴물인 이노센트의 영혼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아주 차가웠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흉포해 보였다.
세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이노센트의 몸을 다시 걷어찼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노센트가 황금색의 선을 만들며 뒤로 날아갔다.
건물을 두 채나 뚫고 날아간 녀석이 바이테스의 위인을 조각한 흉상에 처박혔을 때, 뒤따라온 세인이 말했다.
“좋은 소리다.”
“뭐?”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이노센트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에 대한 답은 세인의 발차기였다.
박살 나는 이노센트의 몸이 무수한 황금색의 파편을 만들어 냈다.
세 번째의 공격 만에 그는 박살이 났다.
그리고 박살이 나면서 내는 그 소리가 세인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지금 이 소리 말이야.”
먹구름을 벗어난 달의 옆으로 검고 긴 기둥이 생겨났다.
그 기둥은 이노센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기둥은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작게 축소되었다.
근육을 수축시켜 단단히 압축한 기둥은 그 상태 그대로 세인에게 떨어져 내렸다.
굉음과 함께 일자형의 폭발이 일어났다.
기둥에 직격을 당한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불길이 좌우로 나뉘며 불티들을 뱉어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둥은 한 마리의 뱀이 되어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세인을 찾아서 말이다.
불타는 집을 뚫고 나가자 뱀의 몸에 불이 붙었다.
불타는 뱀은 계속 세인을 찾아다니며 난동을 부렸다.
그러다가 뱀의 동체에 세인이 부딪혔다.
“으음….”
뒤늦게 날아온 웨폰 마스터는 밤하늘 속에서 세인을 내려다보았다.
어지간하면 위축되지 않는 그도 지금만큼은 질린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래에 있는 세인은 뱀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 난폭한 폭력 아래에서 유린당하는 이노센트들의 비명이 메아리쳐서 웨폰 마스터의 발치까지 와닿는 기분이다.
불바다 속에 서 있는 세인은 이노센트들의 시체에 검은 연기를 붙였다.
검은 연기의 확장에 주위의 불길이 물러나며 최후의 저항처럼 몸부림을 쳤다.
그건 살아남은 이노센트들의 비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정하게도 검은 연기는 그들을 휩쓸며 검은 재로 만들어 버렸다.
보다 못한 웨폰 마스터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아래로 향하며 날개를 접었다.
빙글빙글 돌며 땅에 내리꽂히는 기세는 땅 위의 모든 것을 박살 낼 듯 강력해 보였다.
다른 이노센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와 힘에, 검은 연기마저 뒤로 물러날 정도다.
쾅!
불에 타는 나뭇조각들과 흙이 위로 떠 올랐다.
그 사이에는 뿌리째 뽑혀 나간 불타는 나무들도 있었다.
검은 재가 걷히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는 세인이 나타났다.
그는 충격을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날개를 좌우로 활짝 펼친 웨폰 마스터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세인은 웨폰 마스터를 머리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넌 뭐냐? 루시드의 장난감?”
“바이테스에 너와 같은 강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미 황제는 죽었어. 항복하는 게 좋을 거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웨폰 마스터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인의 기운에 짓눌렸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노센트와 궤를 달리하는 강자가 바로 웨폰 마스터니까, 그는 세인이 얼마나 강력한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세인 정도라면 회유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루시드님의 느낌이잖아.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그때 세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때 웨폰 마스터의 본능은 어서 도망치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위를 생각하면 등을 보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를 악물고 덤비는 수밖에 없었다.
웨폰 마스터가 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웨폰 마스터의 주먹은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숨 가쁘고 격렬한 난타가 소나기처럼 세인의 가슴으로 쏟아졌다.
이 정도 타격이면 제아무리 강자 수준이라 해도, 갈비뼈가 흐물흐물해지고 등가죽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난타 속에서 세인은 흥미롭다는 듯 웨폰 마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앞으로 움직였는데, 그것을 본 웨폰 마스터는 필사적으로 몸을 빼내어 십여 미터 정도 물러났다.
공포감이 등골을 찔렀기 때문이다.
‘잡히면 죽는다.’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세인의 비아냥이었다.
“그렇게까지 몸을 사릴 필요는 없는데.”
웨폰 마스터가 다시 앞으로 나서려 할 때, 이번에는 세인 쪽에서 움직였다.
그의 망토가 직선으로 궤적을 그렸고, 주먹은 그 직선의 끝에 있었다.
“크악!”
웨폰 마스터의 팔이 터져 나가며 허공에 피가 흩뿌려질 때, 세인의 손이 웨폰 마스터의 다른 쪽 팔을 잡아챘다.
으드득!
뼈가 탈골되는 소리가 먼저였고, 이어서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엄청난 낭패를 본 웨폰 마스터는 나머지 팔마저 포기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세인은 하늘로 떠 오르는 웨폰 마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는데, 웨폰 마스터가 있는 방향이 아니라 옆을 향해서였다.
세인의 손끝에서 커다란 울림이 일어났다.
그 울림은, 주변을 일렁이는 파장으로 오염시키며 검은 물질들을 만들어 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지금 뭘 하려는 것일까?
이런 행동을 하는 사이, 웨폰 마스터는 달아나려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인의 옆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공간의 흔들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인의 마검이었다.
그는 루시드가 가미긴을 소환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는 억지로 마검을 소환한 것이다.
연기를 머금은 마검이 크게 반 바퀴를 돌고, 그 끝이 웨폰 마스터를 향해 겨누어졌다.
“….”
그때 세인은 잠시 고민했다.
‘주인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을까?’
그렇다면 웨폰 마스터를 쫓아가기만 해도 금방 루시드에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테러 로드는 권능을 믿으니 분명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쉽게 도주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니 일부러 하수인을 놓아줄 필요는 없었다.
눈에 보이는 족족 죽여 없애는 게 좋다.
이노센트들은 세인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그때 하늘에 떠 있는 웨폰 마스터가 세인이 든 검을 발견했다.
그때 그의 뇌리에는 검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냐는 것보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다는 것이 각인 되었다.
웨폰 마스터는 그래서 약간 망설인 것이다.
‘저 무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저 검을 움직이게 해서 녀석을 자해하게 만들면?
그런 생각이 웨폰 마스터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물론 마검이 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니 승산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포기하고야 만다.
상대와 수준 차이가 이렇게나 나버리면, 상대의 무기를 움직일 수 있다 한들 무소용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루시드에게 놈의 강력함을 고발하는 게 현명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잠시 망설인 시간은 웨폰 마스터에게 있어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강적을 마주한 채 한눈만 팔아도 생사가 갈릴 판인데 아예 딴생각을 해버렸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웨폰 마스터의 눈에 세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무심코, 자신을 향해 검 끝을 겨눈 채 세인이 하는 말을 따라 했다.
“죽?어?라?”
그리고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웨폰 마스터가 맥없이 추락했다.
눈과 부리에서 피를 뿜으면서 말이다.
검을 내린 세인은 땅에 부딪힌 웨폰 마스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크윽? 이게 무슨….”
웨폰 마스터는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지만, 세인은 그런 웨폰 마스터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며 상대의 머리를 밟아 터트렸을 뿐이다.
콰직!
검은 액체가 잔뜩 흘러나와 세인의 신발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