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 돌아왔습니다. (8) -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드레퓨스의 수도까지 밀고 내려온 북부의 군대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토지와 재산을 차지하게 되었다.
번우드와 글리터의 전투도 테러 나이트의 죽음으로 인해 승기가 완전히 북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다면 남부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을까?
테러 나이트가 빠지니 남부는 어찌어찌 잘 막아내는 듯 보였다.
아무리 강자들이 웨폰 마스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해도, 그 넓은 땅의 강자들을 전부 테러 나이트가 다 찾아다니며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도 살아남은 강자는 많았고, 그들은 성국의 홀리 레이크나 바이테스의 왕성에 집결해 이노센트들을 막아냈다.
그래서 이노센트들의 흉악함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품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중요 시설들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함락당하는 성의 성주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대대적인 반전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전혀 근거 없는 생각은 또 아니었다.
남부는 중부만큼 오랜 세월 동안 드레퓨스에 의해 시달려온 곳이 아니었다.
남부는 지금까지 매우 풍족하게 살았고 대대손손 부와 힘을 축적해 왔다.
땅은 기름지고 아주 넓었으며, 곡식들도 넘쳐났다.
그건 곧 일부분이 밀려도 병참이 쉽게 거덜 날 일은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인재들도 많았다.
“곧 수도에서 반격이 있겠지. 대대적으로 병사들이 동원되어서 이놈들을 쓸어버릴 거야.”
그게 모두의 예상이었고 모두의 바람이었다.
아무리 흉악하고 강한 악이라 하더라도 대반전이 일어나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정말 대반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건 인간 측에서 일어난 반전이 아니라 이노센트 쪽에서 벌어진 반전이었다.
갑자기 루시드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 땅 위에 강림한 것이다.
하늘과 땅이 숨을 죽인 가운데 루시드가 입을 열었다.
“왜 아직도 도시가 건재하지?”
마치 금속으로 빚어 만든 거대한 인형처럼 버티고 서있는 루시드의 몸은 온통 근육질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승모근과 팔뚝은 강철로 된 봉을 구부려 몸에 박아 넣은 것만 같았다.
파충류처럼 섬뜩한 노란 눈 그리고 온몸에서 뿜어지는 투기도 투기였지만, 압권인 것은 그의 등에 달린 여러 장의 날개였다.
완전한 타락으로 물든 날개는 하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띠 같은 무늬가 잔뜩 박혀 있는 날개는 위로 솟구치다가 아래로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관리가 전혀 안 된 야생 동물의 털처럼 말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도시를 함락시켜라.”
루시드의 준엄한 호령.
그 안에 녹아들어 있는 따끔한 질책에 많은 이노센트가 기겁을 하고 움직였다.
도시를 통해 탈피를 거듭한 그들은 여러 장의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거듭났다.
인간의 피와 루시드의 명령이 촉매가 되어 탈바꿈한 것이다.
전투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렸고 특히 비행 능력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넓은 도시가 초토화되고 난 후에 인간의 생존자는 전무.
그것을 바라보는 루시드의 눈에는 한 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태어난 지 긴 세월이 흐른 인간의 경우, 뇌가 노화하여 일부 기능을 상실하면 더 이상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결국 동물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루시드의 경우에는 뇌가 튼튼했으면 튼튼했지 상실된 부분이 존재할 리 없으니, 분명 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 뇌처럼 복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다면, 루시드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정지되어 제 기능을 상실했을지도 모르겠다.
탐욕스러운 눈빛을 흘리며 검은색의 혀로,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을 핥는 루시드.
그의 지금 모습은 원래의 자아뿐만 아니라 완전히 영성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그는 한때 자신이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한 존재였는지를 망각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한낱 괴물들의 수장인 루시드였다.
그는 부하들의 욕망에 부응하느라 이제는 더욱 커다란 욕망으로 화했다.
그리고 다시 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런 악순환 아래, 루시드라는 군주는 악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피에 젖은 이노센트들이 날아와 그의 앞에서 차례대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뒤통수와 넓은 등을 보이는 이노센트들이 사방을 계속 메웠을 때.
루시드가 명령을 내렸다.
“바이테스의 중심을 파괴하겠다. 내 기대에 부응하라.”
왕좌에 앉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바이테스의 황제는 루시드가 나타난 날을 기점으로 연이은 패퇴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동안 이노센트들은 뿔뿔이 흩어져 무차별 학살을 벌이는 것에 가까웠다.
테러 나이트인 웨폰 마스터가 사라진 이후로는 그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각개전투를 하며 한숨 돌릴 수 있었던 것인데 이노센트들이 하나의 군체로 결속되어 버렸다.
그들의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통에 바이테스의 황제는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해야만 했다.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느냐?
아니면 강자인 영웅들을 모아 최후의 결사대로 공격을 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지도를 바라보는 황제는 시름이 깊어갔다.
지금의 그는 현인처럼 지도를 내려다보며 최적의 방안을 찾고자 했지만, 누군가는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듯한 현실을 육안으로 직접 감상하고 있었다.
그게 하나의 현실을 동시간대에 바라보는 두 군주의 차이였다.
“좋은 둥지다.”
루시드는 바이테스의 성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수도 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두드렸지만,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열기를 식혀 주진 못했다.
루시드의 입가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미소가 머물렀고, 그건 곧 이노센트의 공격 신호가 되었다.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으며 날아오르는 이노센트들은 오늘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이테스의 수도는 남부의 문화가 모이는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성국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색채 때문에 자극적인 문물이나 화려한 양식이 도입되기는 힘들었다.
그와 비교해 바이테스 전체에서는 부와 명예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문화가 밑바탕에 진하게 깔려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소유한 문화재나, 건물의 크기, 화려한 자태가 보여주는 수위가 대단했는데.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위대했다.
시가지의 화려함도 화려함이지만, 성벽 자체가 여러 개의 고성으로 이루어진 연속이자 하나의 커다란 예술 작품이었다.
수도의 젖줄인 키그리파 강은 중앙을 가로지르다가 높고 뾰족한 성벽 밑에서 천혜의 해자가 되어 주었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성의 총 개수는 12개.
높이는 수 킬로미터였고, 온갖 조각상들이 성벽 위와 성벽 표면에 장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 조각상은 유사시에 무서운 병기로 둔갑했다.
그뿐만 아니라 성벽 곳곳에는 이곳을 오르려 하는 터무니없는 자를 해치기 위한 암기가 한가득 장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일단 성벽에 발을 내디뎌야 작동할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 기관도 결국 인간들이나 능력에 한계가 명확한 몬스터들의 침입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노센트의 경우에는 등에 달린 날개로 높은 성벽을 훌쩍 넘어 버렸다.
성곽에 다다랐을 때 인간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활공하며 성벽을 넘어가 버리니, 시민들이 이노센트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원래도 만만치 않았던 이노센트들의 능력은 루시드가 나타나니 한계치까지 강화되어 버렸다.
치솟아 오른 사기야 언급할 것도 없었다.
설령 그들이 죽는다고 해도 루시드는 이노센트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음이었다.
결국 이 전쟁은 그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인 것이었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 민가 위로, 별이 추락하듯이 떨어진 이노센트들은 이빨을 드러냈다.
이노센트의 개성에 따라 덧니를 몇십 겹이나 두른 녀석도 있었다.
이렇듯 종류가 여러 개인 입이지만, 그들이 게걸스레 탐하고자 하는 것은 한결같았다.
바로 인간의 살과 피였다.
“꺅! 꺄아악!”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은 일차 표적이 되었다.
병사들의 창과 방패를 뚫고 달려든 이노센트들은 기어코 표적의 목숨을 입안에 넣었다.
사람들은 질린 얼굴로, 사자의 머리를 한 이노센트가 입안에서 인간의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탕처럼 굴러다니는 머리는 목구멍 너머로 꿀꺽하고 사라졌다.
다음은 관중들의 차례였다.
날개 달린 사자는 힘차게 도약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굴뚝이 부서져 내리고, 벽돌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넓고 높은 신전 안에는 이미 피에 젖은 이노센트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갈취하고도 괴물들은 만족을 몰랐다.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가운데 뱀의 머리 수십 개가 일제히 위로 떠 올랐다.
그들은 말미잘처럼 주변의 흐름을 읽으려는 듯 흔들리더니, 일제히 휙 하고 한쪽으로 향했다.
그 머리가 향하는 쪽은 왕성의 문이 열리는 방향이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이 시대의 초강자들.
이미 큰 업적을 여러 번 세운 바가 있어 공을 인정받은 영웅들이 말을 타고 뛰쳐나왔다.
여기가 바이테스의 수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동시에 수십 명이나 넘는 강자의 출현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자들은 한결같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무기가 제각각이었다.
그들이 말 위에서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대로 위를 돌아다니고 있던 이노센트가 쓰러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강자들의 몸은 적의 피로 흠뻑 젖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야말로 구세주였다.
“성도 수비군이 올 시간을 벌어야 한다. 세 개 조로 나누어서 종탑을 지키자!”
나이 지긋한 여자의 말에 따라 강자들은 세 갈래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뒤로 구름과도 같은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성벽 쪽의 군대만 안쪽으로 들어와서 압박해 주면 된다. 모두 힘내라!”
아까부터 리더 역할을 하는 여자가 그렇게 외치자 모두의 사기가 충천하며 결연한 표정이 되었다.
높게 치솟아 있는 성벽을 넘어온 이노센트들은 끔찍하게 강했다.
게다가 어떤 놈은 날개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천사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괘씸하게도 말이다.
그게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채질했고 더욱 분발하게 했다.
그때 바이테스의 수도를 두른 성벽 밖에 서 있던 루시드가 몸을 움찔거렸다.
테러 나이트인 웨폰 마스터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내 기사를 죽일 수 있지?’
그렇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기사야 다시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그는 근처로 이노센트 하나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기사로 변신시켰다.
그의 능력과 모습은 전의 웨폰 마스터와 동일했다.
남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웨폰 마스터가 이렇게 쉽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 또한 루시드의 권능 중 하나였다.
비록 유지할 수 있는 숫자는 하나뿐이지만, 그 개체가 죽는다면 이런 일도 가능하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전투를 하고 있지 않으니 테러 나이트를 만드느라 빠져나간 힘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다면 다시 회복될 것이고 말이다.
루시드는 고개를 조아리는 웨폰 마스터에게 명령했다.
“내성으로 향하는 길을 뚫어라.”
고개를 끄덕여 보인 웨폰 마스터는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이노센트들을 잔뜩 끌어모은 테러 나이트는 막강한 힘을 발휘해 반나절도 안 돼서 성문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서는 인간의 강자들과 군대가 모여 있는 방향으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이노센트들을 잔뜩 끌고 간 그가 거기에서 살육의 축제를 벌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제 루시드에게 남은 것은 여유로운 산책뿐이었다.
바이테스 왕성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려면 원래 수차례의 공성전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테러 나이트는 그런 루트를 너무나도 쉽게 뚫어 버렸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힘도 힘이지만 바이테스의 처지에서는 안팎으로 흔들리는 통에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루시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역시 여기를 나의 본성으로 삼는 게 좋겠어.”
그때 인간의 피로 흠뻑 젖은 테러 나이트가 그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선두에서 인간들을 해치우고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돌아온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
테러 나이트의 말을 들은 루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간 가장 무거운 책임감과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바이테스의 황제였다.
사방에서 밀리고 있다는 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 순간 이노센트들의 기세가 갑자기 수직 상승하며 판이 뒤집혀 버리는 바람에 그로선 손쓸 여지가 없었다.
황제라고 어떻게 루시드의 출현을 점칠 수 있었을 것인가?
무섭게 불어나며 탈바꿈한 이노센트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그의 왕좌 뒤에는 비밀통로가 있었지만, 본인은 끝까지 그곳을 이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황제는 제국의 주인으로서 몰염치한 모습을 제국민에게 보일 수 없었다.
비밀통로는 그의 친족들만 피신시키는 용도로 쓰였을 뿐이었다.
왕족을 살려야 바이테스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 비밀 통로는 긴 석굴을 지나 왕성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그들은 살고, 황제는 오늘 여기에서 죽는다.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의 중얼거림에, 주변에 늘어서 있던 신하들의 얼굴 위로 침통한 빛이 스쳐 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황제는 세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정문을 박차고 들어올 괴물들을 기다렸다.
그때 작은 반전이 일어났다.
황제의 예상대로 문이 열리고 이노센트가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 열린 문은 기사들이 잔뜩 모여 지키고 있는 정문이 아니었다.
쿵!
황제는 놀란 눈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비밀통로가 활짝 열리며 거센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자 통로 안에서는 확 하고 바람이 새어 나왔는데, 음습한 바람 속에는 진한 혈향이 뒤섞여 있었다.
주위로 확산되는 지독한 피비린내에 황제는 물론이고 신하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리고 정문 쪽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황제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통로 안쪽에 있던 루시드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통로보다 출입구가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몸을 숙인 것이다.
물론 출입구는 성인의 머리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크기였다.
루시드의 몸이 출입구를 통과하고, 그의 날개가 망토처럼 질질 끌리며 그 뒤를 따랐다.
거친 날개는 평평한 통로 바닥에서 잔뜩 끌리는 소리를 내다가 대전의 양탄자를 만나 숨을 죽였다.
황제는 루시드의 무서운 모습보다도, 그의 손에 들린 사람의 머리에 시선을 주었다.
루시드가 현재 들고 있는 것은 필립스의 머리였다.
피에 젖은 필립스의 얼굴은 힘이 풀려서인지 꿈을 꾸는 듯했다.
나른하고 멍한 표정, 그의 콧방울 아래에서는 붉은 피가 주르륵하고 흘러내렸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루시드는 보란 듯이 필립스의 머리를 바닥에 굴렸다.
푹신한 양탄자의 복잡한 무늬 위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필립스의 머리가 달려온 기사들의 발치에 닿았다.
“괘씸한 놈!”
근위대장이 그렇게 외칠 때 기사들이 루시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루시드도 아닌, 그의 등 뒤에서 그를 보필하고 있던 이노센트들에게 뭐가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갈려나갔다.
한바탕 요란한 피비가 뿌려졌고, 그 흔적은 왕좌의 바닥까지 와서 닿았다.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신발을 적신 피를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끔찍했다.
죽음의 전조를 황제의 발에 뿌린 루시드는, 죽어나간 인간의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는 황제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너의 부하들은 네 앞에서 해체될 것이다.”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분명 이놈들의 왕이겠지.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물어 마땅할 자를 찾지 못했었어. 그런데 당신은 충분히 답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답해 주겠는가?”
“뭐지?”
“왜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 당신들은 꼭 우리들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한쪽의 우세를 떠나 공존을 꿈꿔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쪽 욕구를 참을 수만 있다면 보다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황제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루시드는 약간 의외라는 눈빛으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루시드는 본인 스스로 왜 이러는지를 몰랐다.
고작 이유를 말해봐야 ‘그냥 이렇게 하고 싶어서.’ 정도가 될까.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에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마음이 동해서 너희들을 침략하고 쥐 잡듯이 잡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욕구를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너무 김이 빠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루시드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
“나는 이미 너희들과의 공존을 꿈꾼다. 공존을 배제하는 게 아냐. 다만.”
루시드는 자신의 부하들이 바이테스의 기사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문관들에게 다가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너희들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는 거야. 닭장이나 축사처럼. 우리에 들어가 있어야지.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교육을 하는 거다.”
그리고 루시드는 방금 말한 닭의 모가지를 비틀기 위해 황제의 턱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황제의 턱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황제의 비탄과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이 루시드의 손금을 적셨다.
루시드는 측은지심을 품는 게 아니라, 손에 와 닿는 황제의 눈물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황제가 마지막 유언을 내뱉었다.
“당신이 여기로 난입해 던진 머리는 내 아들이었소. 당신은 오늘 부자를 한꺼번에 죽이는 것이오. 과연 그런 생명체가 하늘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당신은 분명 천벌을 받겠지. 내 나라에 지은 죄만으로도 이미 지옥에 떨어지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필립스가 황제의 숨겨놓았던 자식이란 것이 아니었다.
황제에게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루시드는 눈을 깜박였다.
운명이란 참 기구하다.
한때 루시드는 운명에서 자유로운 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그 운명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운명을 따라 입술을 달싹였다.
“가미긴 란셀?”
‘네 마음껏 살다가, 네가 위기에 처하면 내가 너를 부르리라.’
루시드는 한쪽 팔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공명이 일어나더니 하얀빛의 파장이 나타났다.
그 파장은 일종의 게이트였다.
루시드의 옆에 보이는 것이 첫 번째였고, 그로부터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두 번째가, 다음은 1킬로미터의 거리에 세 번째가.
그다음은 100킬로미터 밖에서 나타나는 식으로 게이트가 열린 것이었다.
그 게이트는 단 하나를 소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바로 ‘가미긴 란셀’이었다.
루시드가 가미긴이라는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미긴의 시체가 여러 개의 게이트를 통과해 루시드의 옆에 나타났다.
죽은 가미긴의 시체는 하나의 납작한 덩어리로 응축되어 루시드의 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나타난 검은 크기가 성인의 신장과 맞먹었고, 삐쭉 빼쭉한 모양의 날을 가지고 있었다.
뼈로 장식된 대검 아래, 검 자루 부분에는 잔뜩 찌푸린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 박혀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는 눈알과 커다란 입이 붙어 있었는데, 눈은 눈꺼풀을 가지고 있어 깜박일 수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붙어 있는 입안에서는 보라색 혀가 아래로 삐져나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혀는 투명한 타액으로 절여져 있는 상태다.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들은 그렇게 오늘 이 자리에서 조우했다.
“으으아아! 으아아아”
검에 붙어 있는 입에서는 괴로움 탓인지, 아니면 황홀경 때문인지 모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둘이 뒤섞인 것도 같다.
루시드는 왠지 손에 익은 마검을 한차례 휘둘러 보았다.
그러자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갈라졌다.
마검 가미긴은 대검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이 가벼웠다.
루시드는 검날을 얼굴 앞에 가져가 검에 붙어 있는 눈알을 보았다.
여러 개의 붉은 가시가 들어있는 수정체에 루시드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이 검은 뭐지? 손에 익은데?’
그렇게 홀린 듯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고 있던 루시드는 황제의 앓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나 보다.
황제의 턱이 탈골되기 직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있었지.’
루시드는 천천히 황제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건 자비 때문이 아니었다.
“천벌이라고 했나?”
그는 자비 대신 가미긴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런 루시드의 행동을 막아야 할 인간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화한 지 오래다.
지금 처형을 하려는 루시드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피에 젖은 이노센트들뿐이었다.
부하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루시드는 거리낌 없이 검으로 황제의 목을 내리쳤다.
“내가 바로 하늘이다.”
왕좌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간 황제의 머리가, 필립스의 머리를 맞췄다.
* * *
같은 시각, 세인은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하얀 물결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가미긴을 소환한 루시드의 게이트였다.
지금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의 문은 시간이 지나면 닫힐 것이다.
세인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하얀 물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빛의 문은 거리낌 없이 세인의 손을 집어삼켰다.
그다음은 세인의 얼굴과 가슴을 비롯한 몸 전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