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88화 (288/307)

# 288

& 돌아왔습니다. (2)

드레퓨스 왕성 쪽에서 벌어진 소란은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성벽 너머에서 거인을 봤다는 몇몇 레인저들의 증언도 있었지만,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질 땐 성벽에 가로막혀 안쪽이 보이지 않았고, 성문이 열린 것도 아니었다.

간신히 성벽을 넘어간다 해도 흙먼지 때문에 시계가 불량했다.

레인저들처럼 어찌어찌 목격하게 된다 해도 증거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세인이 만든 검은 영역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인과 바이칼의 싸움을 관전하거나 조사하기엔, 북부의 군대는 당장 눈앞에 닥친 비극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당장 여기서 난리가 났는데, 성벽 너머의 난리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악 지대 하나가 통째로 없어진 마당이다.

각 나라가 흩어졌던 병사들을 추스르고 인원 보고를 하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정찰대가 꾸려진 것은 다시 한참 후였고, 뒤늦게 성벽 안을 보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좀 더 세밀한 조사는 더욱 시일이 필요했다.

현실적으로 북부 연합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선두에 선 글리터도, 드레퓨스 영토의 점령권을 주장하기 위해 뒤늦게 따라붙었던 각국도 막판에 함정에 빠져 막대한 병력 손실이 있었다.

그 자체로만 보면 크나큰 비극인데 어쨌든 승리를 거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비교적 안전한 후방 쪽으로 빠져 있었던 왕들은,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드레퓨스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머리를 잃고 쓰러져 버렸다.

커다란 괴수가 쓰러졌으니, 남은 고기.

즉 전리품은 몽땅 연합국의 차지였다.

앞으로 그들이 얻게 될 땅, 그리고 금은보화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물론 드레퓨스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으니 군 세력도 많이 남아 있었다.

가미긴은 바이칼을 거인으로 만들고, 함정을 파는데 많은 인간을 재료로 썼다.

그렇게 썼어도 워낙 넓은 땅인지라, 남은 사람도 많았고 병사들이야 당연하였다.

그런 군부대들은 드레퓨스의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저항군을 조직하고,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을 점친다 해도, 수도가 박살 난 마당에 잔존한 드레퓨스의 군부대가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머리가 생긴들, 각개 격파당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전쟁터니까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것은 감수해야겠지. 이번 전쟁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패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드레퓨스의 수도를 박살 냈어. 그게 중요한 거지.”

함정의 뒤쪽에 물러나 있던 왕 중 하나인 에릭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왕들도 다들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속으로야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상인 기질을 타고난 에릭센은 현실적인 성향이 강했고 계산도 빠른 편이었다.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그가 주변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현재 살아남은 병력이었고, 그다음에는 글리터의 상태였다.

북부의 나라들은 한결같이 글리터의 동태를 살피느라 시선을 던졌다.

이제껏 상황을 능동적으로 주도하던 것이 글리터였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글리터의 병사들은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한순간에 전체 병력의 7할이 날아가 버렸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이런 글리터의 병사들을 추스른 것이 바로 기사들이었다.

살아남은 기사들의 수는 몇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다독이는 한편 안전지대에 결집한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 중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힐다였다.

모두가 낙심하고 기가 꺾여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을 추슬렀다.

쉽지 않았을 텐데도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평소 힐다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인 세리스 때문이었다.

오래전, 세리스는 힐다에게 첫 번째 기사라는 명예를 주며 말했었다.

“내가 당신을 인정하는 이유는 당신의 무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보면 든든해요. 안정감이 들고 안심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당신이 무력을 상실한다 해도 제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이 글리터에서 첫째가는 기사인 이유는,”

그때 세리스는 힐다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었다.

“제가 느끼는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힐다. 언제나 그것을 명심하세요. 당신의 뚜렷한 장점을.”

그러니 이 난장판이 된 전쟁터에서 힐다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병력을 추스르고, 머무를 곳을 만들게 하는 모습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굉장히 흔들리던 동료 기사들도 차분한 힐다의 모습을 보고 곧 안정을 되찾았다.

힐다는 재빨리 인원 점검을 마치고, 뿔뿔이 흩어진 행방불명자들을 찾는 수색대를 급파했다. 그뿐만 아니라 물자 점검과 부상자들의 파악도 순식간에 끝내 버렸다.

산이 내려앉은 지대로 수색대를 동원하지 않겠냐는 말에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죽었어요. 지금은 산 사람들을 챙겨야 해요. 이쪽의 수습이 먼저입니다.”

그게 이유였다.

미련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게 순리였다.

지휘관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호기심을 억누를 줄도 알아야만 했다.

동분서주하느라 먼지투성이가 된 힐다는 성벽 쪽에서 세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야.”

세인의 생환은 세리스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글리터를 위해서도 다행이었다.

구심점이 되는 세인이 돌아온 건 매우 기쁜 일이다.

종이 뭉치들을 추스른 힐다는 지금의 피해를 보고하기 위해 세인의 막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세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산이 내려앉은 곳으로 향하셨다고?”

“예. 그리고 안에 기사들을 위한 편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보초병과 말을 나누었을 때, 다시 지진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주변에서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난리였다.

정작 사람들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충격받을 게 없다는 식이었는데 동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진은 몇십분 간 계속되었고, 각 주둔지의 지휘관들은 사람들을 더 뒤로 물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런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에 지진은 멈추었다.

그 후에 지진의 근원지로 다가간 사람들은 땅속 깊이 파여져 있던 절벽이 사라진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계곡이 붕괴되어 땅이 메워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글리터 사람들에게는 매우 곤혹스러운 결과였다.

특히나 힐다는 극심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녀로서는 땅이 붕괴한 이유가 세인과 관련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시 한번 세인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자연스레 의문도 떠올랐다.

왜 그는 서둘러 계곡 쪽으로 갔을까?

총책임자로서의 자괴감 때문에?

세인의 평소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단 살아남은 사람들을 추스르고 관리하는 게 세인의 성정에 맞기 때문이다.

힐다 같은 기사들보다 더욱 냉정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세인이었다.

이유도 궁금하지만, 아무리 세인이 강하다 해도 저렇게 땅이 무너졌는데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력이 압도적인 재해 속에서 생존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시켜 땅을 파게 해야 하는가?

병사들이 지금 많이 다치고 지쳐 있는데?

“이럴 때 질리언이라도 있다면 의논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는 힐다였다.

그녀는 지금 잭이나 질리언의 빈자리가 매우 아쉬웠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다시 세인의 천막으로 향했다.

일단은 그 편지라는 것을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옷깃을 정돈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실례하겠습니다.”

주인이 없는 천막 안은 매우 아늑했다.

그리고 평소 세인의 성격을 말해주듯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힐다는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세인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물건들을 눈에 담았다.

그중 가장 위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는데 겉봉투에 휘갈긴 글자가 보였다.

“미래를 고정시키기 위해 떠난다.”

소리를 내어 글자를 읽은 힐다는 곧 편지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개의 편지, 가죽 주머니 같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편지 같은 경우에는 미리 써놓아서 제대로 밀봉한 것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편지는 매우 급하게 쓴 듯 휘갈긴 글들로 가득했다.

가장 위쪽의 편지가 기사들에게 쓴 편지인 모양이었다.

그때 힐다의 발에 굴러다니던 펜대가 밟혔다.

힐다는 밟힌 펜대를 줍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금의 그녀가 너무 바빴다.

힐다의 눈동자는 숨 가쁘게 움직이며 세인이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세인의 당부와 그의 부재 시에 기사들이 해야 할 일들이 적혀 있었다.

속독을 마친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침착하게 종이를 내려놓은 힐다는 지시를 당장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장고에 들어갔다.

세인이 남긴 내용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밖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함몰된 곳으로 가서 광범위한 조사를 마친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무너진 땅에서는 세인의 흔적은 물론, 다른 뭔가를 찾아낼 수 없었다.

각국의 왕들은 글리터의 대표에게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수습 방안을 마련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힐다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은 전쟁이 끝난 줄 아나 봐.”

연이어 찾아오는 타국의 전령을 물리친 힐다의 혼잣말이었다.

천막 안에서 생각을 마친 힐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가 여러 개 들려 있었는데, 모두 굉장히 중요한 물건인 듯 쇠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천막의 입구를 들추고 나온 그녀는 세인이 자신에게 남긴 종이를 불태웠다.

그다음에는 생존자 중 하나인 월터를 찾아갔다.

월터 앞에서 선 힐다는 처음부터 반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월터. 여기에서 네가 할 일은 끝났어.”

월터는 주인 잃은 무기들을 수거하는 책임자로서 지금 막 이 근방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온 상태였다.

그러다가 힐다와 마주친 것이다.

월터는 생뚱맞은 힐다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힐다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월터의 꼴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씻을 생각도 하지 못한 월터는 주위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그거야 힐다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데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순간 월터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픈 충동을 애써 억누르는 힐다였다.

그녀는 애써 사무적인 어조를 유지했다.

“월터.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더는 네가 여기에서 할 일은 없어. 그것보다도 이제 네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고 해. 나는 네가 이 임무에 전력을 다해 완수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건 네게 주어지는 마지막 임무니까.”

“그게 무슨….”

“너에게 포장한 물건들을 주겠어. 물건은 여러 개지만 그중 하나는 정말로.”

그리고 힐다는 거듭 강조했다.

“정말로 중요하다. 그러니 너는 이 서신을 포함한 물건들을 기필코 글리터에 전해야 한다. 수취인은 세리스님이야. 받는 분의 신분을 봐도 알겠지만, 이게 어느 정도로 중요한 사안인지 감이 오지? 단순히 여기 상황을 전달하는 게 목적의 전부가 아니야. 이 안에는 세인님이 세리스님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원래는 내가 직접 가야 하지만, 나는 여기의 최고 책임자로서 아군을 추스르고….”

그리고.

“어쩌면 다음 전투도 대비해야 하겠지.”

힐다가 소나기처럼 쏟아내는 말에 월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힐다가 내미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얼떨결에 가죽 주머니를 받아들고 나니 ‘정말로 이대로 떠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부상자들 천지다.

여기에서 몸을 빼내는 임무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무조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에서 빠지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월터는 왠지 억울하기도 하고 힐다의 명령이 너무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나오는 힐다의 말을 들으니 더욱 그러했다.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여기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전우들을 버리고 저 혼자 훌쩍 떠나라고요?”

월터의 대답에 힐다가 처음으로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하지만 월터. 네가 이 서신을 글리터에 전달할 수만 있다면, 너는 세상의 긍정적인 흐름에 크게 기여하는 거야. 그 시점에서 너는 글리터의 기사로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솔직히 그 외에 네게 기대하는 것은 없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 꼭 네가 직접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버리길 바란다.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기필코 임무를 완수해라. 알겠나?”

그때 보여주는 힐다의 눈동자는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어쩌면 월터를 철과 돌처럼 믿었기에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일 거다.

그제야 월터는 그걸 깨달았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는 그의 음성이 약간 떨렸다.

“제가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믿으십니까?”

“누군가가 나를 굳게 믿어 줬어. 그렇다면 나도 그동안 지켜본 너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국제적인 정서나, 관계. 이 모든 것을 떠나 중요한 게 우리에게 있다. 궁극적으로 우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다. 월터. 글리터의 기사로서 마지막 임무를 완수해다오. 너라면 할 수 있다.”

이제 월터는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힐다는 그런 월터의 뒷모습을 한번 보고나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건 그만큼이나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월터에게 일을 맡겼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힐다도 다른 기사들처럼 월터의 뜻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그의 곁에서 그를 보고, 마음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 사람에 따라서 짧다면 짧다고 말할 수도 있고, 길다면 길다고 말할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누군가를 믿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월터를 떠나보낸 힐다는 자기 일에 집중했다.

드레퓨스의 수도를 함락 시켰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이야 말로 안이한 생각이다.

여전히 남부에서는 괴물들이 날뛰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쪽에서 여기로 치고 올라올 수도 있다.

또는 드레퓨스 각지에서 저항군을 조직하여 약해진 북부 연합을 치고 올라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회군할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바보짓이었다.

그건 공을 이루고도 걷어차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를 굳건히 지켜야만 했다.

월터에게 일을 맡긴 이유도 그 때문이다.

힐다 본인이 하지 못한다면 정말 믿을 수 있는 기사에게 일을 맡겨야 하는데, 그녀에게 있어서는 월터가 바로 적임자였다.

힐다는 여기에서 방패가 될 생각이었다.

앞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어떻든 여기에 뿌리를 박고 글리터의 중요거점으로서 사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곳에서 그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세리스의 명령이나, 죽음밖에 없었다.

*  *  *

드레퓨스의 수도를 떠난 월터는 길을 재촉했다.

그가 빠르게 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 마리의 말을 함께 끌고 떠났기 때문이다.

타고 있는 말이 지치면 말을 바꿔 탔다.

그런 식으로 번갈아 타면서 달렸기에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보급선을 유지하느라 만들어진 글리터의 루트를 고집하지 않았다.

병참선이라고 해서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병참선이기 때문에 습격 받을 이유도 존재했다.

현재 드레퓨스의 영토라면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월터는 너무 원래 방향에서 벗어났다.

지도상으로 보면 미묘한 비틀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각도가 벌어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글리터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분명 글리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타고 있었다.

그는 글리터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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