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 듣는 자 (7)
가미긴은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하는 바이칼을 거대화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세인을 찾아내서 죽여. 그러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말하는 쪽은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바이칼이 거짓말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고통의 우리에 갇힌 존재에게 한 가지 선택지만을 던져준다면, 그는 그 부당함에 거부하지 못한다.
그저, 개처럼 그것 하나만을 찾아 뛰기 마련이다.
수십 층짜리 건물들이 모래처럼 허물어지고 나무들이 뿌리째 뽑힌 채 나뒹굴었다.
도로가 물결치다가 압력을 이기지 못해 부서졌고, 그 밑에 감추고 있던 흙더미들을 밖으로 게워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몸을 데우는 열병처럼, 펄펄 끓는 고통이 바이칼을 광기에 찬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가혹한 통증은 바이칼이 죽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바이칼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가미긴은 이미 약속을 한번 어겼다.
그를 헤카테 왕처럼 만들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선, 지금 바이칼의 꼴을 이처럼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바이칼은 가미긴을 원망하기보다는 세인을 찾아 헤매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죽기 싫었고, 죽을 만큼의 고통도 싫었다.
바이칼이 찾는 세인은 성벽을 타고 달렸다.
그러다가 성곽을 밟고 크게 뛰었다.
그가 밟은 성곽이 부서져 나가며 돌 뭉치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소리를 듣는 세인의 몸이 높게 솟아오른 지붕 위에 올라섰다.
그러다가 급경사를 따라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세인은 지붕 끝자락에 도달해서야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있었다.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아주 까마득한 높이에 세인이 서 있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코포니 성의 구조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복잡한 구획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자칫 밑으로 떨어졌다간 한참을 헤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벽을 부수고 전진한다 해도 계속 시야를 가로막는 높은 담으로 인해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데도 아주 멀리 떨어진 바이칼의 모습은 성처럼 거대하고 높게 치솟아 있었다.
수많은 지붕 사이로 허리가 잠긴 바이칼은 두 팔을 높이 올렸다가 내리는 것만으로도 건물들을 박살 내고 있는 중이다.
세인이 보기에 그는 커다란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 구덩이에서 그가 빠져나온다면 첫 번째로 성벽 주변은 그야말로 큰 재앙을 맞이할 것이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분명 성안에도 생존자들이 남아 있을 터였다.
간신히 살아난 그들이 바이칼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방관하느냐를 떠나, 세인은 눈앞의 거인을 죽이고 싶었다.
그는 바이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달렸다.
그에 따라 단단한 합판들이 그의 발밑에서 부서져 나갔다.
반발력 때문이었다.
지붕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수탉 모양의 풍향계가 그의 발에 채여 나동그라졌다.
지붕의 경사각을 따라 굴러떨어지던 청동 풍향계는, 지붕 아래로 떨어져 영영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바닥에 뭔가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세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미 그는 앞쪽으로 수십 미터나 이동한 상태였다.
지붕이 끝나는 구간이면 그는 지붕 끝을 밟고 날아올랐다.
그의 몸 밑에서 여러 개의 담과 정원들이 휙휙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활공하는 도중에 검은 망토가 펄럭이며 부풀어 올랐다가, 건너편의 지붕에 세인이 착지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던 지붕도 끝나는 순간이 왔다.
세인은 사십여 미터 밖에 있는 첨탑을 바라보았다.
그는 뒷걸음질 치더니 앞쪽으로 날아올랐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다고 말하자면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세인의 손이 첨탑에 달린 뾰족한 피뢰침을 잡았다.
그리고 공중에서 이동한 그 과정이, 바이칼의 눈에 띈 것 같다.
헐겁게 끼워 놨는지 좌우로 흔들리는 피뢰침을 바라보던 세인은 이상한 예감에 옆을 보았다.
그러자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거대한 바이칼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칼의 노란 눈은 탁한 대기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했다.
그 빛은 확실히 세인을 주시하는 중이다.
그리고 바이칼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아주 길고 큰 비명을 뽑아냈다.
세인은 두 귀로 바이칼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기묘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세인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세인은 더욱 빨리 바이칼을 향해 움직였고, 바이칼은 그런 세인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땅에 잠겨 있는 하체를 빼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세인이 바이칼의 근처에 도착했기 때문에 땅을 딛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세인의 머리 위에서 바이칼의 거구가 높게 자리했다.
노란 눈을 빛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아주 끔찍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에 기운 자국들이 보였고 깊은 상처투성이였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점은 그의 입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입술이 있어야 할 자리는 평평한 맨살이었다.
지금 뜨거운 콧김을 뿌리고 있는 바이칼은 입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까의 비명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세인의 눈으로 바이칼의 가슴에 타원형으로 파여 있는 입이 들어왔다.
촘촘한 여러 겹의 이빨들이, 잇몸 역할을 하는 주변의 근육이 수축 이완을 반복할 때마다 가슴근육이 출렁거렸다.
그 움직임을 보면 마치 별개의 생물이 거인의 가슴에 기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입의 안에는 붉은 여러 개의 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중심을 함께하고 사방팔방으로 늘어졌다.
혀가 마치, 한 송이의 홍괴불나무 꽃이나 한 마리의 불가사리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혀에 박혀있는 노란 점들이 타액에 젖어 번들거렸다.
세인을 발견하니 바이칼은 흥분이 고조되는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할퀴는 그였다.
얼굴에 붉은 선을 만든 그가 팔을 양쪽으로 쫙 벌렸다.
그리고 땅을 갈듯이 주변을 뒤엎었다.
유서 깊은 신전이 바이칼의 손 아래에서 무너져 내렸다.
비싼 유리들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고, 비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하얀 대리석들은 바이칼의 손가락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가 땅이 출렁이자 견디지 못하고 밑부분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거인의 손톱에 맞아 부서졌다.
세인은 자신의 좌우로 깊은 고랑이 파이는 것을 보았다.
퇴로를 막고 있는 걸까?
하늘 위에서 노란 눈을 빛내며 세인을 바라보는 그는 어떤 심정일까?
지금 그의 시야는 전지적인 시점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어떤 왕도 그처럼 높고 빛나는 시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었다.
지금의 바이칼이야말로, 별의 눈에 가장 가까웠다.
세인의 얼굴이 시커먼 그늘에 물들었다.
그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하늘을 가득 가린 바이칼의 손바닥이 보였다.
만약 일반인이 세인 입장이 되어 그 손바닥을 봤다면, 천신의 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이나 위에 떠 있는 손은 압도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생명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의 위치에 오른 자가 천벌을 내리려는 듯한 박력이었다.
빠르게 내리꽂히는 손바닥은 풍압으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내리눌렀다.
세인이 있던 자리로 바이칼의 거대한 손이 내리꽂혔다.
콰앙!
굉음과 함께 한차례 천지가 들썩인다.
세인이 올라가 있던 건물은 짜부라져 가장 위층이 땅바닥에 닿았다.
철로 만든 기둥이 휘어지고 납작하게 주변 자재들을 내리눌렀다.
동시에 요란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바이칼의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까지 점령했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일어나는 먼지는 주변을 온통 뿌옇게 만들었다.
그 후로도 바이칼은 세인이 있던 자리를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주먹을 쥐지 않은 까닭은 파괴력보다 범위를 넓히는 게 좋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후에는 먼지 더미 속으로 사라진 세인을 찾으려는 듯 두 손으로 땅을 헤집었다.
덕분에 드레퓨스의 왕터는 아주 풍비박산이 났다.
킹스로드를 만들고 있었던 거대한 다리가 지진을 못 이기고 바이칼의 등 뒤에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바이칼의 관심은 온통 세인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가 세인을 죽일 수 있다 쳐도 이 난리 통에서 그의 시체를 찾을 수 있을까?
“으아아아!”
허탕을 친 바이칼은 화를 내며 주변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일단 지하에서 하반신을 빼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것 같다.
그가 무심코 한 손으로 땅을 짚었을 때였다.
팔을 지지대 삼아 상체가 살짝 들렸을 때.
갑자기 날카롭고 검은 기운이 치솟아 오르며 기둥 역할을 하는 바이칼의 팔을 맞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으므로 바이칼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은 공격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팔을 연타했다.
뿌옇고 노란 흙먼지가 가득한 풍경 속에서 거인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바이칼은 다른 팔을 움직여 균형을 잃은 몸을 지탱했다.
다른 팔은 공격을 당한 팔에서부터 너무 멀었기 때문에 세인으로서도 손쓸 수 없었을 것이다.
바이칼 입장에서야 자신의 몸에 붙은 두 팔이지만, 일반인의 처지에서 보면 두 팔 사이의 거리는 수백 미터였다.
이번 세인의 공격으로 바이칼은 세인의 생존을 확인했고, 그의 위치를 확실히 알아차렸다.
상체를 꼿꼿이 세운 거인은 세인이 있는 곳을 양 손바닥으로 모아갔다.
밑에 있는 세인이 보기에는 커다란 장벽 두 개가 자신을 가둬두려고 달려오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바이칼은 세인을 손바닥 사이에 끼운 후 그대로 압사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바이칼은 자신의 손바닥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검은 구를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손이 닿자 묘하게도 손바닥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그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소용없다.’
고통 속에서도 바이칼은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검은 구는 세인이 일으킨 기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게 사실이었다.
세인은 시간을 멈춤으로써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두 개나 존재했다.
첫 번째로는 그 기적의 영역조차 위에서 내려다보면 작디작은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멈추는 영역은 바이칼의 전부를 가둘 수가 없었다.
그 힘은 바이칼의 거대한 두 손을 멈추는 것으로 끝냈다.
물론 범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대단하긴 하지만, 완벽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세인! 지난날의 설욕이다.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두 번째로 문제인 것은 바이칼의 공격 수단이 두 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이칼의 노란 눈이 황금빛을 발했다.
동시에 그의 흉부에 위치한 입이 아주 큰 소리를 내질렀다.
입이 내뱉은 것은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액체들이 입 밖으로 화살처럼 튀어나왔다.
그 액체는 금세 검은 구의 위를 뒤덮었다.
붉은 액체의 정체는 거대한 바이칼을 일으키기 위해 제물로 쓰인 사람들의 피였다.
원한에 가득 찬 피.
그 피는 강력한 침투력과 부식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핏줄기들이 검은 구체를 노리며 날아든 것이다.
바이칼이 쏘아낸 핏줄기는 검은 구체, 즉 정지된 시간 안쪽에 닿을 수 없었다.
대신 검은 구체 주변을 가득 메워버렸다.
거대한 바이칼이 쏘아낸 피는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으니까 힘든 일도 아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인의 힘도 끝없이 계속 발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검은 구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부식성이 강한 액체가 빈 곳을 가득 채울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사기적인 영역을 만들던 소용이 없었다.
지금 바이칼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산성 액체나 마찬가지인 피의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세인이었다.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두 손으로 땅을 짚은 바이칼은 보란 듯이 핏줄기를 아래로 난사했다.
무서울 정도로 많은 피가 땅 위를 뒤덮었다.
검은 구는 그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피로 만든 호수 같은 영역이 생성되었다.
이제는 무쇠도 녹일만한 피가 한가득이었다.
이제 바이칼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세인의 힘이 다하는 순간을 말이다.
“…?”
그 순간, 기고만장한 바이칼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뭔가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물체.
그것에 집중하기 위해 바이칼의 노란 눈이 흔들렸다.
그의 동공이, 바로 앞에 있는 물체를 정확히 잡으려 수축했다가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거짓말처럼 바이칼의 면전에 나타난 것은 세인이었다.
분명 밑에는 아직도 시간이 멈춘 공간이 남아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저 현상의 주인공은 세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바이칼의 눈 부근에 있는 세인이 한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밑의 정지된 공간이 소멸했다.
사라진 공간을 점하는 핏물들이 홍수를 만들 때, 그 속에서 날카롭게 솟구쳐 오르는 것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시간을 정지시켰던 마검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흙 알갱이들을 튕겨내며 날아온 마검은 세인의 손아귀에 안착했다.
바이칼의 두 손바닥이 세인을 가두려 다가왔을 때, 그 시점에서 이미 세인은 바닥에 검을 꽂아 넣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정지시켰고,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거대한 바이칼은 디테일한 변화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사방은 흙먼지로 가득했고, 세인 외에도 작은 물체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기에 처음에 세인의 모습을 놓쳤던 것이 아닌가 말이다.
오히려 바이칼의 크기가 작았다면 이런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검은 구체에 정신이 팔린 바이칼이 의미 없는 짓을 할 때, 세인은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약점이나 마찬가지인 머리에 닿은 것이다.
거인이든 뭐든 뇌가 있어야 육체에 명령을 전달할 수가 있었고, 거기를 공략하면 핵심이자 약점을 공격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인은 주저 없이 바이칼의 얼굴에 다다랐다.
그가 바이칼의 눈앞을 선택한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거기는 뼈로 보호받지 않는 부위니까.
흉성이 가득한 노란 눈앞에서, 세인이 손에 쥔 마검을 크게 몇 번 휘둘렀다.
그 움직임은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에 대한 몸풀기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린 바이칼의 거대한 손이 움직였다.
그렇게 세인이 있는 자리를 후려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으아악! 아아악!”
바이칼의 뒤통수에서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마검의 힘이 바이칼의 노란 눈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세인은 연거푸 바이칼의 한쪽 눈에 마검의 힘을 투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통해 바이칼의 뇌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실컷 유린당하는 바이칼의 비명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피가 잔뜩 쏟아지는 머리로 그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거대한 충격파가 안면을 휩쓸었지만, 세인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거대한 손이 도착하기도 전에, 세인은 자신이 낸 구멍을 통해 안으로 침투했다.
깊이 들어가 뇌를 아예 휘저어 놓을 심산이었다.
겉에서만 타격을 준다면 엄청난 덩치인 거인이 충격은 받았어도, 치명타는 피했을 것이다.
눈에 구멍을 내놓았지만, 재생 능력이 없으리란 법도 없다.
하지만 안쪽에서 강한 힘을 터트리면 어떻게 될까?
들어온 거인의 내부에는 근육 외에도 단단하고 붉은 기둥들이 가득했다.
그건 바로 드레퓨스의 피난민들, 그리고 수도에 있는 사람들로 만든 결정체였다.
세인은 기둥의 틈을 통해 안쪽으로 움직였다.
이따금 주변이 흔들리며 밖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바이칼이 세인을 잡을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 들어와 있으니까 말이다.
단단한 기둥들 속으로 계속 들어간 세인은 의외의 광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두개골의 중앙에는 뇌 대신 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바이칼이다.
알몸인 바이칼은 거대한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그를 고정하고 있는 것은, 검붉은 촉수 같은 것들이었다.
신경 다발이나 마찬가지인 그것들이 바이칼의 육체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두 개의 굵은 줄기는 눈을 관통한 것 같다.
일견하기에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과 하나가 된 바이칼의 모습인 것이다.
“바이칼.”
바이칼은 외부에서 침투한 세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헐떡이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지금의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옛 버릇이었고, 결국 시도에 그쳤다.
왜냐하면 그의 입안에도 눈과 연결된 것처럼 굵은 신경 다발들이 한가득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처럼 도망가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렇게 구차하게 도망가서도 개처럼 살았더구나. 이래서야 자비를 베푼 의미가 없잖아. 지금은 왕도 인간도 아닌 역겨운 모습이군.”
“….”
그때 바이칼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말 대신 타액이 한가득 흘러내렸다.
그걸 보는 세인은 무덤덤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지금 바이칼이 하는 말이 나오는 듯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그의 가슴이 내고 있을 그 괴성은 두개골 밖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어찌하겠는가? 드레퓨스의 복은 거기까지였음을.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하의 왕을 만나 이렇게 멸망하는구나.”
세인은 바이칼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귀로 세인의 기척을 읽은 바이칼이 몸부림을 쳤다.
상대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살려줘! 제발!’
세인은 주저 없이 바이칼의 목을 베었다.
그 행동은 아주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깔끔하고 완전히 베어낸 것은 아니었다.
4분의 1 정도가 잘렸다.
목에서 피를 흘리는 바이칼이 몸을 요동치자, 세인은 잠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픈가?”
피에 젖은 검을 다시 들어 올린 세인은 난도질하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에 따라 바이칼의 몸이 마치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검을 휘두르던 세인은 크게 휘청이다가 한 손을 바닥에 대었다.
바이칼의 고통을 공유하는 거인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몸을 일으킨 세인은 바이칼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에 마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힘을 개방했다.
동시에 거인의 머리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는 분수처럼 흘러나와 거인의 상체를 검게 물들였다.
가미긴이 바이칼에게 준 고통, 그리고 본체가 난도질당한 고통, 검은 힘으로 거인의 몸이 부서지는 삼중고가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바이칼의 마지막은 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것이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바이칼은 남이 경험하기 힘든 격통 속에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고통에 못 이겨 머리로 가져다 대는 거인의 두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손목에서 균열이 일어나더니 팔에서 분리되어 아래로 추락했다.
그다음은 재가 되어 땅바닥 위를 구르는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제 흙먼지에는 검은 기류와 함께 재로 화한 바이칼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거인이 천천히 무너짐에 따라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먼지가 파도처럼 일어났다.
그 연쇄 작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멈추기는커녕 가속화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대를 휘감은 검은 폭풍은 초토화된 주위를 다시 휩쓸면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외성 너머의 사람들도 충천하는 검은 회오리를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검은 영역은 더욱 확장되며 한 사람의 귀청을 때렸다.
천천히 아래로 허물어지는 거인의 뼈대 위에서, 세인은 잠자코 서 있었다.
검은 바닥이 아래로 가라앉음에 따라 땅이 점점 가까워졌다.
세인의 한쪽 발이 드디어 땅에 닿자, 거인의 잔재들이 퍼석거리며 부서졌다.
검은 재가 가득한 세상에서 세인은 홀로 걸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 그리 낯선 경험도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걸어 외성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