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 듣는 자 (5)
초록색의 진흙이 가득 찬 대지.
마경 안에 모인 자들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푹 파묻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입술이 옴짝달싹하지 않아도, 분명 머릿속에는 공포에 찬 신음과 비명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으리라.
앞으로 그들은 얼마나 여기에서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도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밤 같지도 않은 밤.
낮 같지도 않은 낮이 무수히 교차했지만, 그것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질리언은 시종일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앞을 보는 건지 눈만 뜨고 있는 건지 모를 얼굴로 그렇게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지금 그의 얼굴을 봤다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이런 짓을 한 자에 대한 지독한 분노?
아니면 모멸감?
안타까움?
아니면 의아함?
그때 질리언의 얼굴에 의아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그때 뭔가를 본 것이다.
아주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렴풋이 겉모습만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가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상대는 거북이걸음처럼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느릿느릿 움직였다.
질리언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의 생각은 상대의 이동속도처럼 느리기 그지없었다.
‘왜 저렇게 느리게 다가오는 거지?’
* * *
성벽 위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기가 질린 듯이 올라오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런데도 상대는 전혀 방해받지 않은 듯이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정상에 오른 것이다.
성벽 위에 선 세인은 바람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기사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환영은 잘 받았다.”
“당신이 바로 캐슬 브레이커군. 당신 정도 되는 자가 왜 이런 방법을 쓴 거지? 성문을 부술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의 말에 굳이 답변하지 않은 세인은 드디어 성벽 안쪽의 드레퓨스 수도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숲, 산과 높고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수도의 모습은 차라리 장엄하기까지 했다.
온갖 영화가 집중된 도시임이 틀림없었다.
건물들도 건물이지만 아주 높게 떠올라 사방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었다.
세인은 눈에 보이는 광경에 감탄하는 대신 흉중의 확신을 굳혔다.
“너무 조용해. 역시나 함정이군. 병사들도 안 보이고 말이야.”
세인의 말을 들은 기사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목격자가 절대 없게 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상기한 것이다.
그가 검을 든 손을 앞으로 하며 겨누자, 세인이 말했다.
“덤비면 너는 죽는다. 너도 그걸 알고 있잖아? 차라리 도망가는 게 몇 초라도 더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를 지키는 게 나의 임무요.”
그 말을 뒤에서 들은 병사들도 창으로 세인을 겨누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성벽 위로 많은 사람의 머리가 나타났다.
빠르게 이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무래도 달려오고 있나 보다.
세인은 굳이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수도에 함정을 만들기 위해 희생됐을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바람결에 실려 오는 혈향에 코가 맹맹할 정도였다.
성벽에 가로막혔을 때는 몰랐는데, 위에 서보니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피 냄새가 지독하다.
필시 위쪽에서 보았을 때 가려진 건물이나 나무 아래에는 시체들이 엄청나게 쌓여있을 것이었다.
“그래, 좋은 자세다.”
그렇게 말한 세인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 앞에서 기사는 이를 악물고 필사의 검술을 펼쳤다.
평소의 실력보다도 훨씬 더 향상된 빠르기로 검이 움직였다.
그리고 세인은 그의 노력이 허무하게도 그걸 손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작용으로 눈이 커진 기사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머리가 터질 정도로 후려치진 않았으므로, 기사의 몸은 옆으로 급격히 기우는 것에 그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무릎을 꿇었고, 심지어 한 손으로 땅을 짚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세인은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러자 뒤로 주르륵 밀려난 기사의 몸에 병사들이 얽혀 뒤로 나동그라졌다.
쓰러지지 않은 병사들은 세인을 향해 창을 찔러갔는데, 그게 오히려 그들에게는 불행이었다.
세인이 마검을 뽑아 휘두르자 수수깡처럼 창대가 잘려져 나갔다.
그다음은 병사들의 머리였다.
일어나려는 기사의 얼굴이 튀어 오른 피로 인해 피 칠갑 상태가 되었다.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내고 앞을 보자 세인이 기사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세인은 손바닥으로 기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세찬 싸대기에 기사의 이가 날아갔다.
세인이 다시 무릎으로 기사의 얼굴 중앙을 치자, 기사의 몸이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런 그를 걷어차며 세인이 물어보았다.
“이제 임무가 끝났나?”
엄청난 고통 속에서 세인에게 멀어지려 허우적거리는 기사의 몸 위로 다시 피비가 쏟아졌다.
세인이 다른 병사들의 몸을 베어버린 것이다.
팔다리가 잘린 문어 다리처럼 여러 개가 얽혀 날아오르는 가운데, 그중 팔 하나가 기사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 기사의 눈은 공포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 속으로 눈물이 들어차기 직전에, 세인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잠깐! 잠깐만!”
“그쪽이 아니야. 네가 갈 곳은 이쪽이다.”
세인은 기사의 머리카락을 쥐고 성벽 안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긴 비명과 함께 기사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죽음이 벌어지는 장소는 피비린내가 가득한 학살 장소였다.
기사의 몸이 커다란 측백나무에 맞았다가 나뭇잎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을 때 세인이 돌아섰다.
그리고 마검을 휘둘렀다.
그가 휘두른 마검은 갑자기 채찍처럼 늘어나더니 전방의 적들을 휩쓸어 버렸다.
무차별로 휘두르는 채찍질에 성곽마저 잘려나가는 판이었다.
방패와 갑옷을 믿고 앞으로 나서던 기사들은 그 공격에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뒤따라 우르르 달려오던 사람들은 미끈한 피바다 위에서 한바탕 구를 뿐이었다.
그런 병사들에게 다가간 세인은 검을 찔러 넣어 죽음을 선사해 주었다.
다음으로 그가 할 행동은 아주 간단했다.
일단 이곳에서 다시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경고해줄 심산이었다.
성벽 너머에 함정이 있다고 말이다.
세인의 생각에 상대편은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인이 아니었다면 성안이 이렇게 빨리 발각될 리가 만무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여서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위에서 내려다볼 때 움직이는 사람은 전무했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이렇게 지독할 정도면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빨리 여기를 발견한 게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한 세인은 성곽을 잡았다.
그리고 발을 그 위에 걸쳤을 때였다.
그의 몸이 격하게 흔들거렸다.
마치 누가 잡고 흔드는 것처럼 말이다.
세인은 중심을 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바닥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인의 생각은 틀렸다.
가미긴은 세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세인은 드레퓨스의 성들을 빠르게 함락시킨 주범이었다.
그걸 아는 가미긴이 성벽이 오래 버텨 주리라 기대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가미긴의 입장에서는 성벽이 빨리 점령되든 말든, 성 내부의 모습을 알아차리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성벽이 미끼가 되어 주었다면 대환영이다.
위쪽에서 보면 무성한 나무에 투석기가 가려져서 보이진 않지만, 오늘 아침에 투석기 공격을 심하게 퍼부은 까닭이 뭘까?
압도적인 공격에 적들을 뒤로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돌들을 소비해서 상대로 하여금, ‘암석이 무한히 있을 수 없으니, 다 소비될 때까지 뒤로 물러나 있자.’라는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보통은 현명한 생각이었다.
화살 정도라면 몰라도 투석기를 통해 그렇게 돌을 날리면 금방 소진되는 게 당연했다.
연이어 번개가 치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몸을 가누는 세인은 투석기의 용도를 금세 깨달았다.
그 사이에도 지진은 점점 강해졌다.
“거리를 벌리려는 거였군.”
성은 움직일 수 없으니 성에게서 사람들의 거리를 벌린다.
왜?
정답을 깨달은 세인의 눈이 천천히 연합군이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향했다.
저곳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산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인이 성벽 위에 올랐을 때 맥과 더이스 등은 출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석기의 공격도 멈췄겠다.
일단 병사들을 전진 배치할 생각이었다.
세인이 위에서 뭘 확인하고 내려오든, 만일의 사태에 뒤를 받쳐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말들의 동요가 일었다.
뭔가 불안한 듯 제자리걸음을 하며 길게 우는 소리에 맥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다음에는 고개를 들어 산을 떠나는 새 떼를 보았다.
산속에 언제 저렇게 많은 새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그들이 한시에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맥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기 충분했다.
그때 누군가가 맥의 어깨를 잡아 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행크였다.
행크는 말없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켜 보았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맥은 산의 한 귀퉁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해 옆으로 움직이며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함정이다.’
말도 안 되는 광경 앞에서 맥은 당황하기보단, 그렇게 생각했다.
자, 그러면 이제 함정인 걸 깨달았으니 몸을 피하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성 앞으로 가면 적들이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지금 이 위치에서 옆으로 피하면 돌아가는 거라 도망치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그건 곧 낭비되는 시간을 뜻하고 말이다.
그러니 반대쪽으로 가야 할 텐데, 그러면 지금은 산 중턱에서 약간 높은 위치라 정상을 넘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사를 올라야 할….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맥을 바라보던 행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행크가 보기에 맥은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여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크의 웃음소리가 맥을 정신 차리게 했다.
그때 더이스가 비틀거리면서 맥에게 다가왔다.
그가 비틀거리는 이유는 땅이 심하게 흔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네요. 조금 더 힘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더이스의 말에 행크와 맥의 얼굴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드레퓨스의 성벽 정상을 향했다.
“예상은 했었어. 우리는 짐이 될…..”
행크의 마지막 말은 거칠게 흔들리는 땅의 방해를 받아 이어지지 못했다.
더이스는 중심을 잡으려다가 포기하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땅에 대었다.
그 상태로 세인이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더이스는 세인이 걱정되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상대는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최악인 것은 놈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는 거야 이미 한번 죽어봤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가족에게 충실했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리고 세인을 믿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모든 걸 바쳤다.
후회는 없는데, 다만 안타까웠다.
그저, 남겨질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더이스가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땅이 무너져 내렸다.
* * *
가미긴은 처음부터 성 밖에 함정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성안으로 적을 끌어들여 친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 생각에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세인이라는 놈이 너무 빨리 치고 들어온다면 다 들통나는 거야. 그러니 성안에 덫은 쳐놓겠지만 그것에 기대면 안 되지.”
그러므로 가미긴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덫은 성 밖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위치는 외성과 맞닿아 있는 공지다.
그런데 외성의 바로 앞은 너무 대놓고 벌이는 수작인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지휘부는 보통 전투하는 자들의 뒤에 있기 마련이다.
지도를 보고 고민하던 가미긴은 산을 선택했다.
지휘관들은 끊임없이 전황을 살펴야 하므로 바보가 아니라면 산 뒤쪽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바보일 수도 있다고 치자. 인간들은 미개하니까.”
그래서 가미긴은 아주 넓은 영역을 함정으로 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투덜거렸다.
산에 함정을 만드는 건 정말 고역이다.
누가 봐도 평지에다가 만드는 게 제일 쉬웠다.
그러나 그는 노리는 게 있었다.
그걸 위해 인간의 분비물을 이용해 함정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분비물이란 바로 인간의 피였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이 함정 때문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게다가 이 함정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미긴이 생각하기에 말이다.
생각해보면, 가미긴에게 있어 인간의 군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노센트들의 기사인 웨폰 마스터를 생각해 보자.
그는 엄청나게 강하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어떤 성이든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노센트들은 기본 자체가 인간들보다 엄청 강했다.
결국 인간 군대를 몰살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란 소리다.
그렇다면 가미긴이 이렇게 능선을 무너뜨리는 것을 중요치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북부 연합을 박살 내버린 게 승리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인 걸까?
물론 그는 따로 노리는 게 있다.
그래서 인간들을 몰살시켰다.
그러니까 방금 벌어진 수많은 죽음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수단이었다.
성벽 위의 세인은 드레퓨스의 수도를 포위하듯 늘어서 있던 능선이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인간들이 학살당하는 광경도 눈에 담았다.
지금 그의 심정은 어떨까?
과거 그는 가이더의 영주로 있을 때, 영지민의 죽음에 책임을 통감하고 자살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인간들이 무너지는 땅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광경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고, 마치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했던 듯 평온을 유지했다.
전혀 충격받지 않은 모습이다.
“그래. 글리터를 떠났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했다. 너희들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지. 이미 알고 있었다.”
붉게 변한 땅이 용암처럼 변해 아래로 푹 꺼지는 것을 보며, 전방에서 쏟아지는 빛에 얼굴이 붉게 물든 세인은 이노센트들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다시 한번 기필코 이겨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미긴의 수작질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세인에게는 학살에 대한 단상조차 가질 시간이 부족했다.
그의 등 뒤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외성 밖에 함정 하나만 팔 것 같았으면, 굳이 외성 안에서 학살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천둥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는 거대한 무언가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성대는 울림통이 되어 누군가의 공포와 절망, 괴로움을 생생히 담아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이건 옳지 못하다고, 그걸 하늘에다 대고 규탄하고 있었다.
* * *
마경 안에 있던 질리언은 방문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모습만 확인했을 뿐이다.
마경 안에 들어온 자는 모닥불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몸에는 잔혹한 고문을 당한 듯, 무수한 상처 자국이 뒤덮여 있었다.
새로 합류한 자는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염원이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자 방문자가 돌아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질리언에게 다가왔다.
그때, 이상하게도 질리언에게는 상대를 원망하는 작은 감정이 생겼다.
‘그때 나를 만나줬었더라면.’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리고 방금 든 생각의 이유도 몰랐다.
더구나 그는 상대를 식별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새로 나타난 자는 목이 잘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흉터가 가득한 몸은 머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발걸음이 느렸던 것이다.
또 그래서 질리언은 새로 나타난 자가 바이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살아 있을 때 그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얼굴이 있어야 확인할 거 아닌가?
가뜩이나 생각도 힘든 판국에.
비틀거리던 바이칼의 몸은 잭과 질리언의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그게 끝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다시 망자들 사이에서는 침묵이 감돈다.
* * *
“우아아! 으아아아!”
세인이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손이 땅거죽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높게 떠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은 주인의 고통을 표현하려는 듯이 제각기 심하게 비틀려 있었다.
“우아아아! 으악! 으아아!”
거대한 바이칼이 땅속에서 계속 비명을 질렀다.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불태우고 있었다.
바이칼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바람과 함께 세인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그래서일까?
성벽 위에 서 있는 세인의 한쪽 눈가가 실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