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 술잔 앞에서 (4)
공격 개시한 지 하루가 지났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산처럼 솟아 있는 성벽을 오르라고 해도 반나절이 우습게 걸릴 것이었다.
절벽 오르는데 능숙한 레인저를 써도 말이다.
성벽 위에서 일어나는 저항이 완강한 정도는 아니지만 무시할 정도도 아니다.
게다가 투석기를 쓴 공격은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며 북부 연합군을 괴롭혔다.
투석기 공격은 사실 날아오는 순간부터, 떨어지는 곳을 향해 내리꽂히기 직전까지 눈을 떼지 않으면 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대신 오와 열을 흩뜨리는 효과를 가졌다.
다음날이 되자 뜨거운 기름물이 위에서 흘러내렸다.
그래서 성벽 위쪽은 회백색으로 물들고 미끌미끌한 지대가 되었다.
밤이 되면 불화살이 하늘을 수놓았다.
땅에 떨어진 화살이 주변을 밝힐 때, 돌아다니는 북부의 병사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궁수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째가 되자 아주 멀리에서 주둔 중이었던 드레퓨스의 24개 부대가 북부의 뒤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다행히 북부 연합은 레인저들을 이용해 정찰망을 넓게 잡고 있었으므로, 드레퓨스가 의도한 기습에 대응할 수 있었다.
글리터를 비롯한 여러 개의 기병 부대가 놈들에게 반격을 시도했고, 다음은 보병이 그들을 짓밟았다.
그러자 드레퓨스의 패잔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놈들을 별동대를 운영해 끝까지 추적하는 것도 일이었다.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드레퓨스의 성벽은 아직도 굳건했다.
그걸 멀리에서 바라보던 세인은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말 위에 올라탔다.
고삐를 당기며 말을 걷게 하는 그의 옆으로 맥이 따라붙는다.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지금은 필요 없어. 짐만 될 뿐이야. 내가 직접 가서 살펴봐야겠어. 앞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섣불리 병사들을 진입시키지 말고, 뒤로 빠져 있어.”
커다란 원형 방패와 둥글게 감은 로프를 안장의 양쪽에 부착한 세인은 앞쪽으로 달려나갔다.
세인의 단호한 말투에 더는 말리지 못한 맥은, 그 자리에 서서 세인의 검은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며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세인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세인이 떠나기 전 우려를 표시한 부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드레퓨스는 북부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 스펀지처럼 주위의 병력과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북부의 주변국들은 당장이라도 드레퓨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끝장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남부까지 전쟁터의 범주 안에 넣고 있는 글리터 쪽에서는 좀 더 냉정하게 전황을 관찰해볼 수 있었다.
일단 흡수한 병력이 엄청나게 많을 텐데 아직 외부로 병력을 토해내지 않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그러면 북부의 군대가 이렇듯 쉽게 성벽에 달라붙을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후방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에서야 합류하는 드레퓨스의 군대가 북부를 공격할 때도 그렇다.
잠시나마 작은 성문들을 열고 부대를 내보내면 안팎으로 호응하여 큰 데미지를 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드레퓨스는 너무 소극적이었다.
‘시가지에서 매복하려는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그들이 흡수한 병력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의문은 이것이다.
‘피난민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에 돌변했는지 몰라도, 드레퓨스는 평소 백성을 살뜰하게 챙기는 축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용한 백성의 수가 웬만한 나라의 성도는 가볍게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숫자였다.
성안에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게 꼭 손해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드레퓨스가 수용한 병력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그렇게 많은 백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게 불필요하게 보였다.
엄청나게 늘어난 백성은 곧 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잠자리와 먹을 것이 필요하니까.
천막 안으로 돌아와 갑옷을 챙기는 맥은, 어젯밤 기사들을 모아다 놓고 이야기하던 세인을 떠올렸다.
“나는 이게 함정이라고 본다.”
“드레퓨스가 아무리 미쳤다지만, 수도의 왕성을 이용해서 함정을 팠을까요? 그건 곧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는 소리인데요. 수성만 해도 안전이 보장됩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난데, 함정을 만들어서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그들이 많이 휘말릴….”
말끝을 흐리는 행크 앞에서 세인이 좀 더 자기 생각을 풀어 놓았다.
“큰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너무 쉽게 왔어. 드레퓨스는 중부를 점령한 나라다. 이렇게 모래성처럼 무력할 정도인 게 이상한 거야. 눈앞에 보이는 성벽은 너무 넓고 높아. 안에서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지. 단지 우리는, 우리 가설을 받아들이기 싫을 뿐이야.”
왜냐면 이 추론은 끔찍한 내용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드레퓨스의 우두머리는 괴물과 한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괴물들의 생리도 염두에 넣어야 한다. 그게 당연한 거지. 또 우린 그렇게 생각하고 싸워왔다. 상대가 괴물들이라면 어떻게 할까? 끌어모은 사람들을 말이야.”
놈들이라면 흡수한 사람들을 제물로 써서 미친 짓을 할 수 있었다.
안쪽에서 좀비가 돌아다니게 하든, 피를 촉매로 폭발을 일으키게 하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게 괴물의 생리였다.
그놈들은 상대의 고통과 절망을 위해서라면 자살도 기꺼이 하는 놈들이다.
다만 이런 추측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제물로 바쳐져 있다는 상상을 해야만 한다.
그건 정말 욕 나오는 일이었다.
“성벽 안에 피바다를 숨기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소극적인 것도 이해가 안 돼. 그동안 지켜보니 문만 걸어 잠그고 있을 뿐이야. 이 시각에도 빠르게 식량이 소모되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럴 수밖에 없지. 얼마나 많은 비전투 인원이 저 안에 들어갔는지 생각해보면 말이야.”
어젯밤 세인이 하고픈 말은, 성벽 안에 끔찍한 함정이 숨겨져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늘의 그는 성벽 내부를 확인하러 직접 나섰다.
말 위에 타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뒤로 젖혀졌고, 말발굽 소리는 지칠 줄 모르고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말은 이따금 세인의 지시에 따라 앞에 보이는 장애물을 펄쩍 뛰어넘었다.
그 장애물이란 북부 연합군의 시체였다.
말이 달려가는 옆으로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잔뜩 보였다.
심한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모래 먼지가 가득한 가운데,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흐릿하게 잡혔다.
세인이 다시 시체를 짓밟지 않기 위해 말을 뛰어오르게 했을 때 주변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온다!”
동시에,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세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처럼 커다란 돌이 날아오고 있었다.
달리는 세인의 말 주위로 스쳐 지나가는 병사들은 돌을 보고 피하느라 바빴다.
그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사이에 돌은 생각보다 빨리 지면과 가까워졌다.
세인이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있었다면, 아주 쉽게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지금 말을 타고 있었고, 말에게 돌이 떨어지는 지점을 예측해서 피하라는 주문은 다소 무리한 요구였다.
비스듬히 날아온 돌이 아슬아슬하게 말의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반 마신 차이였다.
말이 거기에 놀라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면 괜찮았을 텐데, 놀란 말은 급히 정지하며 달리던 힘을 이기지 못해 상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덕분에 높이가 높아졌고, 날아오는 돌의 밑부분에 머리를 직격당했다.
피 분수가 터져나가고, 스러지는 말의 동체에서 빠져나오는 세인은 운이 참 없다고 생각했다.
거의 같은 궤도로 두 번이나 돌이 날아온 것이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생각처럼 운이 없는 게 아니었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돌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치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돌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다.
말에게서 로프를 빼낸 세인은 피에 젖은 말의 몸체 아래로 손을 넣어 방패까지 빼내려 했다.
그러다가 날아온 돌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콰쾅!
골이 띵해지는 충격과 함께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덩어리 중 하나를 밟고, 달려가는 자세 그대로 넘어지는 병사도 눈에 들어왔다.
세인은 먼지투성이가 된 상태로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려 소리를 내뱉었다.
“아. 아.”
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그렇게 몇 번 더 해본 그는 방패를 꺼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주변에서는 계속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돌의 그림자가 그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세인은 재빨리 한쪽 팔을 올려 부딪히는 돌을 막아냈다.
그러자 돌의 각도가 꺾이며 땅에 스치듯이 날다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때 그 돌이 누군가를 맞췄는지 비명이 들렸고, 세인은 잠시 미안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그때 뒤쪽 진지에서는 병사들을 물리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호각 소리와 함께 퇴각 깃발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걸 보고 들은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에서 멀어졌다.
성벽 안쪽의 투석기는 그런 후퇴를 모르는지 꾸준히 돌을 날려 보냈다.
그중 몇 개가 세인의 몸에 부딪혔지만, 세인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만 세인은 돌조각들이 얼굴과 가슴을 때리며 먼지를 뒤집어쓰는 게 달갑지 않을 뿐이었다.
적들의 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벽까지 걸어간 세인은 벽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갑고 딱딱했다.
그리고 위를 바라보니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돌이 보였다.
‘갑자기 왜 공격을 퍼붓는 거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거야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는 한쪽 어깨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로프를 풀었다.
그리고 끝의 갈고리 상태를 확인한 후 위로 힘차게 집어 던졌다.
원래는 화살이나 그런 것을 사용해서 올려야 하는 건데 수작업으로 때운 것이었다.
그런 것치곤 효과가 아주 좋았다.
드워프라도 드레퓨스 규모의 성벽을 완전한 직각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아주 넓고 높게 설계된 거니까 당연히 경사각이 존재했다.
세인이 던진 로프 끝은 비스듬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벽에 명중했다.
그 상태로 깊게 파고들었다.
밑에서 로프를 몇 번 당겨본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으로 잡아당기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성벽과 수직이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팔에 많이 무리가 가겠지만, 세인의 경우에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성벽의 4분의 1을 지나왔을 때만 해도, 위쪽에서는 세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로프가 끝나가는 시점이 되자 위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이렇게 먼데 제대로 맞을 리가 없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화살 두 발이 세인의 어깨를 맞췄다.
세인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손을 성벽에 박아놓고 로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갈고리 상태를 확인한 후 약간 위쪽으로 튀어나온 성벽 부근을 향해 힘차게 끝을 던졌다.
그 후로는 지금까지 해왔던 일의 반복이었다.
위에서는 세인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오자, 고함을 치며 기름물 등을 부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세인이 화상을 입을 리도 없었고, 정 미끄러우면 벽에 손을 박아 넣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쪽이 더욱 빠르고 수월했다.
성벽의 반쯤을 오르자 멀리 모여있는 북부 연합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드레퓨스의 수도를 두르고 있는 야산과 그 너머 강줄기, 넓고 기름진 땅과 맞닿은 하늘도 볼 수 있었다.
그 풍경을 눈에 담은 세인은 문득 멀리 보이는 평화로움에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의 발아래를 스치며 날아가는 제비로 인해 금방 깨어졌다.
다시 기울어진 벽에서 갈고리를 빼낸 세인은 힘차게 위로 던졌다.
그러자 뭔가에 맞은 듯 덜컥 걸리는 느낌이 줄에서 전달됐고, 그는 다시 줄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걸리는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힘을 잃은 줄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으아아아악!”
세인의 정수리 위로 남자의 고함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벽에 몸을 밀착시킨 세인은 갈고리에 가슴을 맞고 밑쪽으로 떨어지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는 지독히도 운이 없는 남자였다.
“….”
아마도 세인의 위치를 확인하려 상체를 내밀었다가 갈고리 끝에 맞은 것 같았다.
세인은 아래로 빠르게 사라지는 로프를 보다가 뭉치째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이용해 성벽을 뚫고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