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 술잔 앞에서 (3)
북부 연합군은 드디어 원하던 곳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제 드레퓨스의 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는 기회를 누렸다.
그동안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타국의 군사 세력이 드레퓨스의 수도와 마주해볼 날을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분명히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인지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저곳에서도 우리가 보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더이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산을 뒤덮은 인간의 물결이 보였다.
하늘 위에서 보면 수도의 주변에 늘어선 산 위에, 글리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이 보일 것이다.
많은 병사가 강행군도 강행군이지만, 매우 많은 전투를 치르느라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직 쉬는 시간은 아닌듯싶다.
병사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저녁밥을 짓고, 잠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곧 해가 질 것이기 때문이다.
글리터의 진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다른 나라의 군대가 글리터의 양 날개처럼 자리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모여든 군대는 드레퓨스의 수도를 반 바퀴 정도 두른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야 완전한 포위를 하고 싶었지만, 수도 지역이 너무 넓었고 밀집해 있지 않으면 적의 반격이 부담스러운 형편이었다.
밤에 적의 전투부대가 성문을 열고 산을 오르지 말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
“당연히 보이겠지. 더이스. 그보다 이거나 좀 도와달라고.”
바위를 굴려서 모닥불의 경계를 만드는 행크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더이스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밑에 애들 시키시죠.”
“권위 의식에 찌들어선. 야, 인마! 이런 것도 직접 안 할 거면 왜 야전에 나왔냐?”
“아 좀. 기껏 여기까지 왔으면 앞을 보라고요. 저 성벽 너머에 드레퓨스의 군대가 잔뜩 몰려 있을 거라고요.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습니까? 이 순간을 음미해도 모자랄 판에!”
“너무 높아서 보이지도 않잖아.”
“상상을 하라고요! 상상을!”
더이스가 좀처럼 자신의 감정선을 따라붙지 못하는 행크에게 짜증을 내자.
행크는 성벽이 너무 높다고 투덜거렸다.
하긴, 산 위에서 봐도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성벽이었다.
새가 날아가다가 그 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높이에 좌절해서 옆으로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저렇게 높게 성벽을 만들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인력도 많이 필요했을 텐데, 공사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겠군요.”
맥의 말에 부싯돌을 잡고 불을 일으키는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가득 채운 냄비를 들고 있던 맥은 세인이 부싯돌을 교차시키는 걸 보자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나도 손 있어. 잘 올려놓기나 해.”
더이스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식자재를 다듬었다.
그중에는 병사들이 잡아다가 옮겨놓은 멧돼지도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멧돼지의 두 다리만 있었다.
그런데 원래 너무 질겨서 푹 삶아 요리한다고 해도 오늘 내로 먹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결국 멧돼지 다리는 통나무 장작처럼 옆으로 굴러다녔다.
그 밖에도 과일이나 목이 잘린 닭 등이 푸짐히 상위에 차려져 있었다.
더이스는 칼을 들고 닭의 껍질을 벗기고 고기 조각들을 발라냈다.
그리고 옆을 바라보지도 않고 냄비로 던져 넣었다.
고기 조각들은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냄비 속으로 빠져들었다.
퐁당퐁당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 같다.
저녁 식사 자리를 제안한 것은 맥이었다.
본격적으로 바빠지는 전투 전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는 게 어떻겠냐고 세인에게 말한 것이었다.
세인은 물론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면서 되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꽤 우울한 말을 했다.
“이게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런 자리를 갖는 것도 좋겠지.”
“큰 전투를 앞둔 수하들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뒤로 빠져 있지 않고 아예 참여해서 싸울 생각이야?”
“역사에 남을 전투인데 뒤로 빠져있을 수는 없죠. 저희도 끝까지 제 몫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후세에게 고개를 들 수 있죠. 전쟁에서 뒤로 빠져 있지 않았노라고.”
맥의 말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세 명의 기사들이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으면 하는 세인이었다.
“하지만 무훈에 집착하지는 마.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기사들에게 뒤처지는 건 이상한 게 아냐.”
“그거 오히려 분발하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주변의 병사들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기사들과 세인은 편하게 마음먹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둠이 산자락 밑으로 성큼 다가오자 장작더미 위로 불길이 길게 일어났다.
오늘 밤과 새벽을 책임져줄 불이었다.
행크가 모아놓은 돌무더기에 등을 기댄 세인은 느긋하게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 상태로 세 명의 기사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양에게서 갓 짜낸 우유 한잔의 여유와 함께 말이다.
그러다가 행크가 세인에게 물어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술을 입에 대실 겁니까?”
“전쟁이 끝나면 내 위치가 바뀌나?”
“그럼 평생 술을 마시지 않는 겁니까? 그건 너무 재미없는데요. 언젠가는 술도 즐기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어?”
세인이 반대로 물어보자 행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정이 있는 몸이라 뭘 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그냥 여태껏 그래왔던 대로 가장으로서 쭉 살아가는 거죠. 때로는 아내가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짜증이 나지만요.”
그때였다.
갑자기 더이스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통 때 같으면 맥이 눈치를 줬을 텐데, 이번에는 맥도 이 자리가 전투 전에 갖는 의미를 아는지라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맞아요. 맞습니다. 그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마누라는 작은 취미 활동도 못 참는다니까요. 제가 나가서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더이스가 잠깐 맥의 눈치를 살폈는데, 맥은 오히려 더이스가 자신을 바라보자 인상을 썼다.
과부가 된 지 오래인 자신의 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 비싼 책을 본다고 구박을 하니까요. 뭐 항상 우리는 공동체라면서, 저 혼자 과하게 지출하는 건 죄악이라고 흉을 봐요. 아니 대체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냐고요!”
그러자 행크가 더이스를 놀리듯 입을 열었다.
그런 행크의 행동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 더이스. 평소, 가정에 불만이 많았는데? 그런데 솔직히 그건 맞는 말 아냐? 너 혼자 돈을 그렇게 쓰면 좀 이기적인 거지. 식구들 생각은 안 하냐?”
그때 의외로 맥이 그건 아니라며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설전을 벌이는데, 세인은 입에서 침을 튀기는 세 명의 기사들을 보며 ‘이 사람들이 평소에 가정에 쌓인 게 많았구나.’라는 생각을 가져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삿대질까지 오가는데 더이스가 세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가정이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고기 탄다.”
더이스가 재빨리 모닥불로 다가갔을 때 세인이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가정에 충실해 봤어야 뭘 알지.”
“….”
세인의 자학스런 말에 더이스는 할 말을 잃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하다.
세인은 가정에 충실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게 고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쨌든 그들은 그날 밤을 먹고, 마시고, 놀고 즐겼다.
그래 봐야 터놓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대화가 주였지만 말이다.
밤이 아주 깊어가자, 약간 민감한 이야기도 나왔다.
“질리언을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한참 전부터 말이 없던 세인에게 맥이 물어보았다.
그의 얼굴은 약간 불그스름한 게 술을 마신 여파가 드러나 있었다.
그런 맥의 옆에서는 더이스와 행크가 이제 용돈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싸우기엔 꽤 하찮은 주제였다.
“그래.”
세인의 짧은 시인에 맥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별 위로는 안 되겠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봐 맥.”
“예?”
“나에게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나?”
맥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죠.”
이제 세인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성벽은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감추고 있었다.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곳을 정리하고 나면 남부가 남아있었다.
고된 행군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젊음이 사라져 갈까?
그런 것을 고려하면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그의 계획 외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지?”
세인의 질문에 맥은 주저 없이 낚시라고 대답했다.
“낚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여유를 즐기고 싶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은퇴해서 느긋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아무도 저를 귀찮게 하지 않는 곳에서 말이죠.”
“그 말도 아까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로 들려. 결국 집을 나가 있겠다는 소리잖아. 유부남들은 책으로 도피하든, 호숫가로 도피하든 일탈을 꿈꾸는 것 같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맥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때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주변의 나무를 약간 흔들어 놓았다.
그 바람에 나뭇잎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병사들을 쉬게 하고 군대를 재정비한 북부 연합은 드레퓨스의 성벽 앞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깃발이 펄럭거리고 뿔 나팔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한 행진이었다.
성벽 앞을 새까맣게 메운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드레퓨스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성벽 위에 드레퓨스의 궁수들이 늘어선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성문을 열고 군사들을 쏟아낼 법도 한데 말이다.
수도의 북문을 제외한 성문에 북부 연합의 나라들이 나누어 달라붙었다.
글리터는 그중 정면의 남쪽 성문을 맡았다.
성벽을 넘어간다는 게 절대 쉬울 리가 없었다.
그리고 한쪽 성문이 먼저 뚫린다 해도 넓은 곳에서의 시가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상호 협력하에 공략을 하는 게 중요했다.
아니면 한쪽이 성문을 돌파하여 침투한 후 내부에서 다른 성문 쪽으로 이동에 문을 열어주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의 크기가 엄청나게 넓은데, 안쪽에 매복 같은 것이 되어 있다면 일방적으로 난타당할 우려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한쪽 성문을 돌파하면 사기가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시가전이 2차 전쟁터나 다름없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외성이 1차고 내성이 2차 격전지였다.
크게 보고 전투를 3단계로 나누는 것은 지휘관들이나 가능한 것이다.
“여러모로 길고 힘든 싸움이 될 거야. 그동안의 전투가 어렵지 않았던 건 주변의 군대를 수도에 집중시켜서 그런 거야. 지금까지 쉬웠던 만큼 여기에서 곤란을 겪게 될 거다.”
이게 바로 각 나라에서 기사들에게 전달한 내용이었다.
북부 연합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드레퓨스의 성벽 위에서 반응이 있었다.
화살들이 곡선을 그리며 쏘아진 것이었다.
병사들이 그것을 어찌어찌 막아내자 이번에는 바위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내부에서 투석기를 운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공격이 강하지 않은데?”
후미에서는 여유롭게 잡담을 주고받았고, 사정거리 안에 있는 기사들은 산개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단 빽빽하게 모여 있으면 날아오는 돌의 방향을 읽는다고 해도 몸을 빼내기가 어려워지니까 말이다.
큰 방패를 들고 앞으로 걸어간 병사들은 성벽의 그늘이 자신들의 머리 위를 뒤덮자 방패를 등에 걸었다.
그리고 사다리를 걸쳤다.
성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꽤 긴 사다리는 중간 지점에도 닿지 않았다.
결국 위의 공격을 피하며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간다 해도, 밧줄과 갈고리를 이용해 위험한 곡예를 벌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