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81화 (281/307)

# 281

& 듣는 자 (2)

어느 날, 왕성의 지하로 내려온 가미긴은 모여 있는 거미들에게 딱 잘라 말했다.

“루시드님을 만나고 싶다.”

그 요구에 거미들도 거두절미하고 현실을 말해주었다.

“가미긴. 그분은 네가 원한다고 해서 뵙는 분이 아니야. 그분이 원해야 하는 거다.”

하지만 가미긴의 고집은 아주 강력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직접 그분과 연결이 되어야 해. 지금 당장.”

그렇지 않으면 월권도 불사하겠다는 말에, 이노센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미긴은 조용히 서서 거미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미들이 죽고 난 재가 한군데로 뭉치더니 커다란 원을 형성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소용돌이치는 원 안에서 작은 번쩍임이 보였을 때, 가미긴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러자 소용돌이 속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 중간중간에는 날카로운 쇳소리 같은 것이 섞여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에 거슬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가미긴에게는 그것마저도 황송할 따름이다.

“가미긴.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

“제게 전폭적인 권리를 주십시오.”

“난 이미 너를 중히 쓰고 있다.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제가 말한 권리는 루시드님의 기사마저 강제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테러 나이트인 웨폰 마스터는 남부를 휘젓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남부는 개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웨폰 마스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성이건 영웅이건 박살 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기세가 좋은데 굳이 지금 그를 다룰 권리까지 달라는 청원은 무엇일까?

루시드는 그걸 궁금해했고, 가미긴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줘야만 했다.

“기회를 노려 적의 중요인물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고문했습니다. 놈이 아주 흥미로운 것을 말하더군요. 루시드님에게 위해를 끼칠 것이 존재한다고 말이죠.”

“나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저는 그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동안 궁금했었습니다. 세인이라는 놈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루시드님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호전적으로 밀고 올라오는 이유가 뭘까? 저는 늘 궁금했었습니다. 루시드님.”

“말해라”

“녀석이 뭘 들고 있든, 무슨 수를 쓰든 놈은 우리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건 루시드님도 잘 아실 겁니다. 놈들은 가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의 하나라는 것에도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과 이노센트를 비교해 보면 이노센트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고대의 악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기존의 몬스터들이 큰 희생을 대가로 소환한 세력이었다.

그들이 제 값어치를 못 한다면 죽음으로서 소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과거에 있던 몬스터들이 인간에 비해 불리했지만, 인간들도 그런 몬스터들을 완전히 몰아내진 못했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강한 이노센트들이 강림하니, 남부가 박살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남부를 박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웨폰 마스터였다.

그런데 가미긴은 그를 내어달라고 한다.

게다가 이유를 들어보면 루시드가 도저히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미긴은 웨폰 마스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다 들은 루시드는 그를 꾸짖는 대신 의외의 말을 던졌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가미긴.”

“예?”

“이렇게까지 몸을 던지는 이유가 뭐지?”

루시드의 질문에 가미긴은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루시드의 질문은 너무 이성적이었다.

“전에 많은 인간을 죽인 남자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칭찬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을 왜 이렇게 많이 죽였냐고요. 그러자 그는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제가 잘못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정작 궁금했던 것은 그의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현재 상태였습니다. 광기에 찬 그의 상태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과거를 주워섬기며 억지로 인과를 만들어놓기 바빴습니다.”

“….”

“저는 과거에 분명 지금과는 다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가미긴은 전생의 토레스와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토레스가 이기자, 그의 아내를 돌려주었다.

적어도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어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분명 선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최악으로 굴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선택적인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것들은 도움이 안 됩니다. 오늘의 저는 과거를 잃어버린 저입니다. 그리고 과거는 세상이 정한 저의 개연성일 뿐, 세상이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저를 맞춘 것일 뿐. 지금의 저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조야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하고 싶었다.

이노센트의 편에 서서 인간들에게 승리하고 싶었다.

가미긴은 다른 이노센트들처럼 순수하게 인간들을 죽이는 것에서 쾌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재미와 기쁨은 이 전쟁에서 이기고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조차 희생된다면 본말전도지만,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불성실해 보여도 고작 그게 답이다.

“그렇게까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허락한다. 가미긴.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라. 그리하여 네가 원하는 승리를 내게 바쳐라. 그 과정조차 네가 원하는 것이니까.”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놈들의 계획을 부수고 놈들이 좌절하는 얼굴을 감상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인이라는 놈의 예정된 패배도 앞당기겠습니다. 그게 저의 몫입니다.”

루시드의 허락 앞에서 가미긴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그는 테러 나이트인 웨폰 마스터를 중앙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하게 된다.

다른 이노센트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정말로 상황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타난 웨폰 마스터 앞에서, 가미긴은 자신의 계획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웨폰 마스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물었다.

“번거롭게 이것저것 할 것 없이 그냥 세인이란 놈을 죽이면 안 되나?”

“너는 네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지?”

“강력한 힘?”

하지만 가미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웨폰 마스터는 남부를 짓밟을 정도로 강하다.

그가 선봉장으로 나서면 적의 거점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웨폰 마스터가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세인과 비교해 보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쉽게 말해 세인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 그 모든 장점이 필요하게 될 것 같다.”

그 말에 웨폰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미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루시드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웨폰 마스터는 그런 가미긴을 혐오하고 싫어했다.

‘대체 왜 이따위 녀석을 아끼시는 거지?’

그러나 어쨌든 그에게 협력하라는 게 루시드의 명령이었다.

테러 나이트로서, 테러 로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웨폰 마스터의 지휘권을 얻은 가미긴은 이제 시선을 바이칼에게 돌렸다.

바이칼은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미긴에게 완전한 굴종을 하고 있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게 없지. 고작 그게 그들의 최대 가치야. 인간은 죽음이 다가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되어 있어.”

기가 꺾인 바이칼은 이제 그의 개였다.

가미긴은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내 말만 들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이다.

바이칼은 그게 정말 거짓말이란 걸 몰랐을까?

아니다.

바이칼도 사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미긴도 바이칼이 진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믿고 싶어 하는 선물을 주었을 뿐이야.”

가미긴의 요구에 따라 바이칼은 군대를 재배치했다.

일단 북부 연합군에게 첫 시련을 주었다.

물론 그건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이었다.

다음은 성에 지원을 끊어 적이 쉽게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가미긴은 지도를 보며 때론 아는 것도 모른 체하며 글리터에게 거점을 가져다 바쳤다.

인간이라면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미긴에게는 어차피 이건 목적을 위한 게임이었다.

드레퓨스 백성들의 생명은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뿐이다.

바이칼은 가미긴의 그런 행태를 보면서도 백성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이칼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였으니까 말이다.

“가미긴. 이것 하나만 약속해줘. 나를 헤카테 왕처럼 만들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래.”

“정말이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거짓말할 가치도 없는 놈에게 말이야.’

오늘날의 바이칼을 보라.

한때 그는 정복 야욕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위기를 디딤돌 삼아 정복의 야욕을 불태웠고, 실제로 넓고 높은 곳을 자신의 소매 안에 넣었다.

그는 자신을 황제로 만든 남자였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 따위는 증발해서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가 정복한 문명을 보면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권력의 정점에서 대륙 중앙의 황제가 되어 호사를 누렸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와 시를 합친다면 수백 채의 대형 도서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과거 세인에게 대패했으며 상대의 동정심에 기대서 도망쳐야만 했다.

자신의 딸에게 수치를 당하고 독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은 괴물의 개다.

더구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괴물에게 매달려 괴롭히지 말하고 간청하고 있었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신을 거인 같은 괴물로 만들지 말아 달란다.

어차피 피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괴물인 주제에 말이다.

그가 거느린 성과 땅.

군사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일어날법한 일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이칼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미긴은 그를 개처럼 부렸다.

가미긴의 게임에 따라 대군이 능선을 넘어 움직였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다가 북부의 군대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가미긴은 이것을 ‘적에게 먹이를 준다.’라고 표현을 했다.

“강한 놈들은 최선을 다해 강한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항상 필사적으로 이기기 위해 노력해. 북부가 강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게 강한 놈들이 필사적으로 구는데 어떻게 이쪽에서 그걸 누그러뜨리겠어? 명장? 날래고 튼튼한 군사? 아니야. 아니지.”

고급스럽게 장식된 작전통제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가미긴이 뒷짐을 쥐었다.

“나는 전투에 이기기를 원하지 않아. 작은 전투에서 죽자살자 달려들어 승리해봤자 큰 가치가 없으니까. 나는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이기기를 원하고, 그건 단 한방이면 족하다. 그 한방을 위해 원하는 게 있어. 거기에 전력투구할 테다. 녀석들이 전투에 이기기를 원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지. 실컷 먹이를 주마. 그건 북부의 군대가 원하는 거니까 말이야. 다만 나는 그 포식의 대가를 받아내야지.”

그리고 왕홀을 들어 지도의 한구석을 찍었다.

그러면 다시 드레퓨스의 군대가 어김없이 그쪽으로 이동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충성스러운 드레퓨스의 군대는 박살이 났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북부의 사기도 올랐다.

문제는 현재 가미긴은 어떤 군사적 지위도 없다는 점이다.

가미긴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든지, 그는 전쟁에 개입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런데 그의 지휘에 따라 수많은 병사의 목숨이 허무하게 산화했다.

정신 상태가 어떻든 그들은 나라에 충성심을 가지고 혈기를 바치는 젊은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가미긴의 손짓에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달려갔고, 북부군에 패해 시체가 되었다.

커다란 구덩이.

아주 커다란 구덩이에 시체가 점점 쌓여 높은 산을 이루었다.

“필사적으로 강한 것을 약하게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강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필사적으로 강해지려는 그 뜻이, 너희를 지나치게 강화하길 바란다. 너무 강하면 기필코 깨지기 마련이니까. 연이은 승리에 경계심이 느슨해지고, 자만심이 너희들의 머리에 흠뻑 배이길 바란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된다.”

가미긴은 자신의 혀로 입술을 탐욕스럽게 핥았다.

“기세를 타고 타올라라. 너희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북부의 연합군이 보기에 전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적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전투 끝에 그들이 이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다가 너무 쉽게 연전연승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당연히 자신감이 뒤따라 붙었다.

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북부의 왕들은 드레퓨스를 무찌르고 영토를 차지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남부가 개판이 되든 말든 당장 땅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을 강하게 고양시켰다.

글리터의 만행에 성을 내며 왔던 자들도, 어쨌든 세인이 열 배로 갚는다고 하니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시비를 가리면 될 일이었다.

결국 잡음도 없었다.

여기에서 누가 혹시 모를 위험을 조심하자고 했어도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지가 눈앞에 보이면 무조건 점령해야만 한다.

적이 무너지면 쫓아가서 승리를 쟁취하고 전리품을 획득해야 한다.

이건 전쟁의 규칙이 아니라, 그 이전에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 수레바퀴는 멈출 줄 몰랐고, 그 때문에 가속도가 붙어 점점 빨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드레퓨스 각지에서 모인 피난민들은 수도권으로 계속 이동했다.

북부를 막기 위해 차출된 군대를 제외하면, 다른 부대들도 모두 수도권으로 이동했다.

전황을 검토하는 드레퓨스의 지휘관들은 조국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거야 북부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은 서로에게 끌리는 것처럼 점점 다가갔다.

기상도로 표현하자면 두 개의 거대한 폭풍이 서로를 끌어안으려고 손을 벌리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글리터가 수도권을 빙 두른 드레퓨스 수도 방위대와 충돌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미긴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그동안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던 웨폰 마스터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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