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80화 (280/307)

# 280

& 듣는 자 (1)

바이칼은 천천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침대의 상판에 닿을 때까지였다.

그리고 반대로 검은 그림자는 바이칼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멀리 열린 창문에서 새어 나온 작은 달빛이,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하는 순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손이 쑥하고 튀어나와 바이칼의 양발을 잡았다.

바이칼은 몸을 움찔거리며 벗어나려고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차가운 두 손은 그의 발을 족쇄처럼 잡아두고 있었다.

“아버님. 그만두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우리는 주인님들께 복종해야 합니다.”

생생한 반의 목소리에 바이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공포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칼의 발을 잡는 자의 얼굴에서는 딸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제 형제들과 같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드릴까요?”

견디다 못한 바이칼이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해라 가미긴. 제발 그만해.”

애원조의 말에 가미긴이 달빛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달빛이 미끄러지고 있는 그의 얼굴은 검었다.

그리고 분명 반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마치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그 얼굴을, 바이칼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가미긴은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바이칼.”

“….”

“죽었을 때 무엇을 느꼈지? 내게 말해봐라.”

“….”

“어서 말해보라고.”

가미긴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바이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된 지 오래였다.

죽었을 때 무엇을 느꼈냐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내세가 있다던가, 지옥이나 천국이 있어 어디로든 떨어진다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칼이 느껴본 바로는 모두 해당하지 않았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바이칼은 다시 태어났겠지만, 그 주기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다.

게다가 죽어있는 바이칼이 언젠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태어나는 흐름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러므로 바이칼은 가미긴이 살려내고 나서야 자신을 인식했다.

그리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제야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죽으면 돌멩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그의 생각으론 죽음 속에서는 시간도 없고 자신도 없었다.

그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의미인지는 바이칼의 영혼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내가 널 살렸다. 네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잖아.”

가뭄 속의 땅처럼 메마르고 갈라진 말소리에 가미긴이 웃었다.

“바이칼. 너 자신에게 물어봐라. 내가 뭘 시키든. 너는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나? 피를 마셔서라도 살아 있고 싶지 않나?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야? 내가 너의 주인이라고. 그런 나를 떠나 멀리 간다면 네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건 불가능해.”

가미긴은 바이칼이 앉아 있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치 개가 세상을 바라볼 때 고개를 약간 기울여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머리를 기울여 바이칼을 관찰했다.

“넌 개야. 모르겠어? 너는 나의 은혜로 보호받고 있는 거라고. 네 목에 채워진 개목걸이가 곧 너의 행복임을 왜 모르나? 너는 갇혀 있는 게 아니야. 보호받고 있는 거야. 세인? 세인을 믿고 있나?”

가미긴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는 대단하지. 대단한 무기를 가졌고 힘도 강해. 그러나 그는 이길 수가 없어. 모든 걸 따져봐도 이길 수가 없다고. 처음부터 그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왜냐고? 나는 그보다 우리에 대해서 잘 알거든. 우리를 막을 존재는 없어. 넌 지금 확실한 패를 집어 던지고 무의미한 카드에 붙으려고 했던 거야. 그러니 바이칼.”

가미긴은 천천히 손등을 내밀었다.

그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이 개자식아. 내 손등에 입을 맞춰라. 안 그러면 너를 다시 죽여 버리겠어. 드레퓨스의 개들과. 개들의 왕인 너는 나의 것이야. 이 더러운 잡종들아. 그러니 고개를 처박고 낑낑대며 복종이나 하라고.”

그리고 협박하듯이 다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두드려 보였다.

그러자 반의 얼굴, 즉 데드 페이스가 꿈틀거렸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네 딸년과 함께 영원히 고통받게 해주겠어.”

상위 이노센트가 되면 크고 작은 능력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제2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었다.

테러 나이트인 웨폰 마스터가 상대의 무기를 조종하는 기술이 있다면, 가미긴에게는 더 음흉한 능력이 있었다.

그가 가진 힘은 죽은 영혼을 가두어 데드 페이스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었다.

물론 어떤 영혼이나 다 가둘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미긴보다 힘이 약하다면 구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급격히 올라가 버린다.

또한, 자신보다 능력이 약한 자를 데드 페이스로 만들어 소유하는 것은 일견하기에 대단한 능력 같아 보인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보통은 인성이 파괴되어 인간 상태로 만들 수가 없으니, 바이칼 같은 대외적인 꼭두각시가 필요할 땐 참 번거로웠다.

데드 페이스를 복종하게 하려면 끊임없이 고통을 줘야만 한다.

고문으로 굴종시키는 것이다.

바이칼은 떨리는 손으로 가미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개를 숙여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춤했다.

그러자 가미긴은 기르는 동물에게 하듯이 바이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다. 걷어차기 전에.”

바이칼은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그러나 괴물이 된 탓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육체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  *  *

의자에 앉아 바이칼을 기다리던 질리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디에선가 발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이칼이 온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관절에 힘을 준 순간, 그를 멈칫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리언?”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정신을 차리는 질리언이었다.

이때 드는 의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는 결사대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질리언은 작은 창문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창 건너편에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질리언.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그때 질리언을 깨달았다.

조금 전 무심코 대답하려 했던 이유는 익숙함 때문이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엉겁결에 대답하려는 시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질리언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그 목소리가 여기에서 들려올 리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들려와서는 안 되었다.

왜냐면 죽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함정이었구나.’

바이칼이 가미긴으로 인하여 뜻을 꺾고 좌절한 것을 알 리가 없는 질리언은 당연히 처음부터 함정이었던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질리언. 누구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창문 너머에서는 계속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상황으로 봐서는 함정이 분명한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천연덕스러웠다.

그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을 부추겼다.

“알고 있잖아.”

“뭐?”

“형은 알고 있잖아.”

그러자 목소리가 말했다.

“질리언.”

질리언은 잭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독 안의 쥐가 되길 자처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이제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

“나는 탑 앞에 있어. 기억나? 아주 옛날, 우리가 함께 있었던 탑 말이야. 거기에 있어. 그런데 넌 어디에 있는 거야? 보이지가 않아.”

질리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철문 쪽으로 다가가 작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충혈된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컴컴한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철문 너머의 통로를 울리는 잭의 목소리는, 마치 그런 질리언의 행동을 전혀 모른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들과 함께 불을 피우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어.”

“거기서 대체 뭘 하는 거야 형.”

“우리? 우리는….”

그리고 잭이 이상한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었다.

고통에 못 이겨 인격이 파괴된 듯한 소리, 끝없는 고통에 이성이 분해되고 본질을 잃어버린 자가 낼 수 있는 괴상한 소리였다.

그 길고 가팔라진 목소리를 듣는 질리언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손으로 철문을 두들겼다.

“그만! 그만하라고! 넌 누구냐? 어디에 있는 거야? 이 망할 자식아 그만해!”

잭이 모욕당한 느낌에 분노를 느끼던 질리언의 이마가 철문에 닿았다.

그러자 질리언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부러 거칠게 숨을 쉬면서 품속으로 왼손을 넣었다.

오른손이야 화상 때문에 검을 쥘 수 없다지만 왼손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의 왼손에 번뜩이는 단검이 들렸다.

‘바뀌지 않는 사실이 있어. 날 영원히 여기에 가둬둘 게 아니라면 철문을 열어야 할 거야. 그래야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철문이 열리게 되면 이걸로 놈을….’

그렇게 철문을 노려보며 비수를 들고 있던 질리언은 숨을 죽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이 숨소리는 분명 그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

어떻게 들어왔지?

하는 의문보다도 순간 질리언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있는 놈을 공격할까?

아니면.

“질리언. 여기는 너무 괴로워. 나와 함께 있자. 여기는 너무 지옥 같아. 제발 나와 함께 있어 줘.”

등 뒤의 목소리가 다가올 때 질리언은 뒤돌아서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수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

그건 현명한 행동이었다.

여기에서 분을 못 이겨 맞서본들, 꼼짝없이 잡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된다면 고문이 이어질 것이다.

고문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의 차이일 뿐, 고통 앞에서 부서지지 않는 것은 없다.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려고 여기를 찾아온 것이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그게 후회스러웠지만, 어쨌든 질리언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수습도 했다.

적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니 이것으로 된 거다.

그렇게 질리언은 생각했다.

하지만 가미긴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질리언의 위로, 가미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그림자는 어두운 방보다도 훨씬 짙었다.

그보다 더욱 검은 것은 상대의 얼굴이었다.

얼굴 없는 뱀.

가미긴.

그는 지금 잭의 얼굴을 그대로 빼다 박은 데드 페이스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잭의 얼굴은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다.

가미긴이 자신의 얼굴을 질리언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질리언의 눈으로 뻐끔거리는 잭의 입이 확대되었다.

잭의 입은 이 순간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괴?로?워.’

가미긴은 잭의 데드 페이스로 질리언의 얼굴을 찍어 눌렀다.

그러자 검은 액체가 질리언의 얼굴을 뒤덮어 버렸다.

그리고 치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억눌린 비명이 방안을 가득 채운 것도 그때다.

가미긴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이는 질리언의 몸을 찍어 눌렀다.

그의 손에 잡힌 질리언의 손가락이 고통에 못 이겨 바닥을 긁다가 부러져 버렸다.

그것만 봐도 질리언이 지금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가미긴은 질리언이 자살하는 것에 대하여 별 감흥이 없었다.

그로서는 얼마든지 상대에게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고통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건 만고의 진리다.

고통을 주는 데 있어 상대의 목숨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피의 강 속에서, 질리언의 억눌린 비명이 잦아들었다.

“….”

*  *  *

질리언은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그의 주변은 안개가 낀 듯 모호했다.

그는 나체 상태였고 붉은 염료 같은 것이 몸에 잔뜩 묻혀 있는 상태였다.

잘 보면 무수한 손바닥 자국이 찍힌 것임을 알 수가 있었는데, 본인은 정작 언제 그런 자국이 생겼는지 알지를 못했다.

그는 최면에 걸린 듯 눈을 반쯤 감고, 넓고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서 계속 걸어갔다.

여기는 동서남북이 없었다.

현실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후세계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마경, 그리고 일종의 감옥 정도가 될까?

그는 이 안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할까?

태양처럼 보이는 뿌연 빛 덩어리가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지 한참이 흘러서야, 질리언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긴 그에게도 낯익은 곳이다.

탑이 있는 들판, 초록색의 땅 위에 둥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질리언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상태였다.

초록색의 땅, 우뚝 서 있는 탑.

모여 있는 죄수들.

어느 것 하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거기에 다다른 질리언은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듯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홀린 듯 중앙에 피워놓은 차가운 불길을 바라보고 있던 옆 사람이, 질리언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옆 사람의 얼굴은 반 이상이 피부가 벗겨져 있었고, 근육도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오늘 여기에 온 질리언은 상대가 잭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 잭이나,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당히 이지를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잭이 준 것을 받아서 내려다보니 뼈로 만든 그릇 같은 것이었는데, 안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이라면 그 액체를 보고 구토할 만큼 기분 나쁜 색이 찰랑거렸다.

질리언은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손등으로 자신의 입가를 스윽 하고 닦았다.

그러자 입 아래로 피의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지금 질리언의 얼굴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다.

뼈로 만든 그릇이 그의 발치에서 뒹굴었고, 곧 움직임이 얌전해지자 정적이 찾아왔다.

가엾은 죄수들 사이로 바람은 계속 분다.

하지만 그 바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질리언의 눈동자 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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