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 술잔 앞에서 (8)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어 보여.”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냥 좋게 봐 주시는 것일 뿐이죠.”
거대한 조각상이 기울어져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 둘은 서로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까 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가 궁금해.”
세인은 드레퓨스를 밀어 버리고 있었다.
거기에 인간애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아까 회의장에서 보여준 장면은 야만의 극치였다.
하지만 레드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때론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 사냥하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기억 속의 당신은 평소 신중한 편이었는데, 지나치게 과감해지는 때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글쎄.”
“과감해져야 할 때입니다.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잡아야 하는 자기 자신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도요. 그리고 그럴 때엔 어김없이 사냥감을 잡았습니다.”
“그랬던가.”
세인은 눈보라 속에서 사냥했던 추억을 더듬어 보려 했다.
하지만 중간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래서 너무 희미한 잔재처럼 느껴졌다.
“레드. 나는 나의 미래를 결정했어. 하지만 나는….”
레드가 말꼬리를 흐리는 세인을 보며 평소의 세인답지 않다고 느낄 때였다.
상인이 다가와 쇼퐁 크림을 얹은 과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상인은 주문하지 않은 술잔까지 곁들이며 서비스라고 말했다.
레드는 상인이 놓고 간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세인은 아니었다.
그는 술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여전히 술은 안 하십니까?”
“그래. 술의 유혹에 빠져 책임을 등한시하기 싫어서.”
세인은 술이 몸에 안 받는다던가 해서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면 감각이 둔해지고 마음이 느슨해지기 쉬우니 일부러 멀리하는 것이었고, 레드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이런 것만 봐도 세인은 전과 변함이 없었다.
레드는 손안에 있는 술잔을 옆으로 돌렸다.
애꿎은 술잔만 옆으로 계속 돌아간다.
그러다가 무심코, 오래전에 누군가가 레드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네가 인간다운 인간 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이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검은 왕이 탄생해야 하는 이유에 얼마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픔과 분노가 서려 있는지, 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할 거야.’
레드는 술잔에 담겨 있는 술을 쭉 들이켰다.
그러자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속을 데웠다.
가슴에 잠자고 있던 불씨가 술을 받아 더욱 크게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때 세인이 자신의 술잔을 레드에게 밀어 주었다.
레드는 그것마저 받아 마셨다.
그가 야만인들의 왕이 되기 전, 장로인 노파가 죽기 전에 그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그대로 떠올랐다.
‘레드, 이대로 네가 우리와 함께하면 너는 그를 영원히 잃게 된다. 다른 길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그를 잃게 된다. 그래도 좋으냐? 어느 날 술잔 앞에서 그를 상실하게 된다 해도?’
레드는 두 번째 술잔의 술을 비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장로에게 대답하듯이 말이다.
그녀가 하늘에서 이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아주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화답이었다.
‘당신의 예언은 틀렸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의 편입니다.’
스포일러였던 그 노파는 여기까지 내다본 것일까.
레드가 야만인들과 함께 몸을 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던 그 노파가 예언한 부분은, 세인이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르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레드가 실망하고 떠난다는 내용이었을까?
원래 오늘 레드는 세인 앞에서 그를 꾸짖고 술을 마시지 않은 채 떠나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세인을 믿었다.
아니,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설령 그릇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의 편이다.
“왜 저를 놓아주셨습니까?”
“이제 너는 왕이야. 이런 대화는 이상해.”
“이미 답은 알고 있지만, 한번 정도는 제 귀로 직접 듣고 싶군요.”
그러나 세인은 딴청을 피우듯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조각상이었다.
조각상을 바라보는 상태로 세인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게 하나 있어. 이렇게 서로 신분의 벽이 생기기 전에,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네게 한번 정도, 한번 정도는 불러주는 게 좋았을까?”
‘형이라고.’
그러나 레드는 세인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요. 마음에 빈틈을 만들 때가 아니라, 마음의 무장을 단단히 하실 때입니다. 약해지지 마십시오.”
“그런가.”
그때 멀리에서 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세인을 눈에 담았다.
그건 세인도 마찬가지였다.
“레드, 나는 내가 선택한 미래를 만들어 보일 거야. 모든 준비는 되었어. 게다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도 들어.”
“저는 그 미래가 어떤 미래인지 모릅니다. 확실한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을 욕해도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저는 당신의 영원한 지지자입니다. 그러니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고 걸어가십시오. 그 끝에서 만납시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 당신이 마음 놓고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저는 그때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듣겠습니다.”
레드는 후드를 다시 눌러썼다.
레드는 돌아서기 전에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끝이었다.
세인의 앞에서 레드가 멀어졌고, 맥과 기사들이 다가왔다.
“드레퓨스의 수도로 향하는 피난 행렬이 갑자기 불어났습니다. 여러 관문이 문을 개방했기에, 꼭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건성으로 대답하던 세인이 점점 멀어지는 레드의 등에서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맥의 보고를 들었다.
“계속 정찰대를 돌리고 움직임의 반경을 파악해 봐. 타국의 레인저들이 합류했으니 그들을 풀어놓는 것도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세인은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 조각상은 한 인물을 조각해 놓은 것이었는데, 몸통만 있을 뿐 두 팔이 없었다.
팔 부분은 세월에 마모되거나 부서져 나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오랜 풍파에 매끈하게 변한 얼굴은 이목구비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옷의 주름을 세밀히 묘사한 것이나 크기를 봐서는 들인 정성이 적지 않았으므로, 분명 조각상의 주인공은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조각상의 하단에는 고대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자 빈센트.’
* * *
질리언은 마족이었다.
언뜻 보면 피부가 창백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지만, 자세히 본다면 누구나 마족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미들가든을 떠날 때 스카프와 머플러로 몸을 가려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가 마족이라는 게 꼭 단점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묘지에 도착한다면 그는 자신의 소속이나 신분을 굳이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결사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것이었다.
‘그러므로 목적지까지만 가면 된다.’
물론 거기에서부터 호랑이 굴이지만 말이다.
질리언은 처음에는 밤에만 이동하는 등, 조심성을 보였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난민들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수도권으로 모여들고 있었고, 그 숫자를 보면 일일이 검열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관문소를 통과하려면 무기만 없으면 되었다.
검문하는 쪽은 무기가 없다면 민간인으로 간주하고 들여보내고 있었다.
질리언은 어차피 손에 화상을 입어서 무기를 들 수 없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결국 그는 농부들의 틈에 끼어 여러 개의 관문소를 지나쳤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드레퓨스가 엄청나게 넓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 검문을 일일이 하는 게 힘들다 할지라도, 수도권이 되면 인력을 퍼부어서라도 세밀한 조사를 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질리언은 당장 수도에 침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굴타라. 안데르 공동묘지.”
수도 근처에 다다른 그는 굴타라 지방을 찾아갔다.
그리고 공동묘지에 가서 기다리니 묘지기 노인이 다가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질리언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질리언을 마차에 태운 남자들은 둥근 돌로 포장한 도로 위를 신나게 달렸다.
결사대인 그들은 검문도 무시하고 빠르게 수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다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질리언을 인계받았는데, 그는 장님이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질리언을 지하수로로 안내했다.
축축한 그곳을 한참을 걸어 비밀 통로에 다다르니 반나절이 지난 것 같았다.
지하 통로를 걷는 질리언은 곳곳에 묘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유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노인이 그런 낌새를 알아채곤 먼저 설명을 해왔다.
“이곳은 손으로 만든 통로요.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많은 사람이 비밀 유지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 드레퓨스 지하에는 이런 통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소. 몇 개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를걸. 하지만 왕궁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그 수많은 길 중 고작 열 개도 되지 않는다오. 말하자면, 여기가 그중 하나인 킹스로드지.”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았죠?”
그러자 노인은 말없이 자신의 눈을 검지로 가리켜 보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불행이 목숨을 지켜줄 때를 보면 말이다.
“저 문만 통과하면 되오. 다 왔소. 앞으로도 일직선 길이니까 쭉 따라가면 큰 방이 보일 거요. 들어가면 저절로 잠기겠지만 놀라지 않아도 되는 게,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거든.”
쇠창살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하자 갑자기 ‘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문을 닫고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쇠사슬을 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다시 다가가니 노인이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절차요. 그리고 이것도 그중 하나지. 당신의 존재를 몰라야 하니까.”
그 직후에 질리언이 노인에게서 멀어진 까닭은 노인이 자살했기 때문이다.
노인을 보면 여기까지 그를 안내한 결사대도 모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혀를 내두른 질리언은 마음을 굳게 먹고 노인이 알려준 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이칼과 만날 수 있는 방에 말이다.
방 안에 들어가니 출입문이 닫혔고, 굳게 잠겼다.
말하자면 밀실이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질리언은 당황하지 않았다.
언질도 언질이었지만, 노인의 죽음을 보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 때문이다.
‘생목숨들을 버려가면서 함정에 가둘 거면, 차라리 나를 발견했을 때부터 억지로 끌고 왔겠지. 구속하려 들면 이렇게 번거로운 수단까지 쓰면서 일을 꾸밀 필요는 없는 일이야. 기다리면 나타날 것이다.’
질리언은 바이칼이 나타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기다렸다.
앞으로의 일은 운명에 맡기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이제 와 그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 * *
그 시각 바이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하에 있는 질리언은 시간 감각이 흐려져 긴가민가했겠지만, 바깥은 확실한 밤 시간대였다.
그것도 밤이 깊을 대로 깊은 자정이었다.
바이칼은 당연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미긴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이칼의 침실로 들어와 그가 자는지 안 자는지 확인했다.
“잠들었군.”
바이칼은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가미긴의 발소리를 들었다.
가미긴이 가는 곳이 지하실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고 있겠다 싶었을 때, 그는 천천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의를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나갔다가 글리터에서 보낸 자를 만나 보고 올 생각이었다.
바이칼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주변은 아주 조용했고 창밖에서는 미약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래서 들렸다.
살금살금 다가오는 소리가.
순간 바이칼의 몸은 얼어붙은 듯이 정지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었다.
바이칼이 굳어버리자, 그에 맞춰 살금살금 다가오는 소리도 정지했다.
분명 넓은 방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게 누구일까?
바이칼은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주위를 확인했다.
그리고 기겁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어두운 인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뜨거운 땀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러다가 바이칼은 이성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는 일이다.
의도를 발각 당했을 때의 후폭풍을 생각하니 굳어진 게 당연하지만, 지금 뭔가 결정적인 순간에 들킨 것도 아니었다.
핑계야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깨어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잖은가?
그때였다.
“아버님, 어딜 가시려고요? 글리터에서 온 자를 만나러 갑니까?”
그때 바이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팔에서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에서 들린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제는 귀에 익숙한 그 목소리였다.
‘이건 분명.’
그의 딸인 반의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