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 술잔 앞에서 (7)
“우리가 이곳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의지하며 어려움을 이겨낸 덕분입니다.”
연단으로 걸어 나온 사회자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갈채와 함께 시작된 회의는 각 나라의 장군들뿐만 아니라 왕들도 직접 참가한 마당이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시작된 회의는 꽤 이른 시간에 출발했는데, 이건 마라톤 회의가 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글리터를 제외한 나라들이 생각하기로는 그만큼이나 의논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 자리를 빌려, 선두에서 전투를 벌여온 글리터에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글리터가 우방국들에 한 불미스러운 일에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서로 간에 굳게 다진 우정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좌시는 결코 현실적인 우정을 낳지 못하고….”
사회자가 물러나고 한 웅변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그는 참 오랜 시간을 길게도 떠들어댔다.
마치 한 번에 얼마나 많은 말 잇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 증명하려는 듯 굴었다.
하지만 하품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른 시각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있어 아주 심각한 이야기였으니까.
“글리터의 의견 표명에 앞서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의 유감스러운 사태에 대해여….”
세인은 잘 마련된 상석에서 문서를 보고 있었다.
회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 문서를 검토하고는 펜으로 사인을 했다.
즉 지금 글리터를 성토하는 분위기에 완전히 신경을 끈 것이었다.
그의 주변에 앉아 있는 트리엔의 대표가 불안한 눈길을 주었지만, 그걸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무관심한 태도였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흘렀고 맥이 다가와 헛기침을 터뜨리고 나서야 세인이 고개를 들었다.
맥이 눈짓하자 세인은 자신이 의견을 내야 할 순서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대리자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직접 연단에 서야만 했다.
세인은 옷매무새를 매만진 후 계단을 걸어 내려가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총사령관을 맡은 몸입니다.”
그리고 세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약간 뜸을 들여서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훑어본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보니 참 많이도 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이어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훗날 이들은, 이 자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순간 이상하게도 약간 실소가 터져 나올 것도 같았다.
그걸 참기 위해서라도 어서 말문은 여는 수밖에 없었다.
“지적하신 사태에 대해 저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제 이름을 걸고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열 배로요.”
순간 회의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일단 세인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르거나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댄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이며 그걸 얼마나 신용할 수 있는지가 의아했다.
그리고 정말 상대가 지급할 의사가 있다 쳐도, 열 배라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마지막으로 나라를 침범해서 무력행사까지 불사해 놓고 이렇게 아이 어르듯, 돈으로 해결하겠다고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 고와 보일 리가 없었다.
“….”
사실 지금 모인 사람들은 전혀 다른 글리터의 반응을 예상했었다.
그 예상안 중에서는 서로 협상을 통해 드레퓨스의 땅을 나눌 계획도 첨가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니 각국을 대표해 앉아 있는 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사적으로 뒤쪽의 상석에 앉아 있는 왕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멍해진 건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돈으로 때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야 하는지.
무례하다고 삿대질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신용을 믿을 수 있겠냐고 따져야 하는지 잠깐, 아주 잠깐 헷갈렸다.
그런데 세인은 이미 연단을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발이 첫 번째 계단을 밟기 전에 누군가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일어난 자는 세인에 대해 따질 수가 없었다.
한 번에 따질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현명하게도 가장 실속 있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회의장에 앉아 옮겨 적는 서기들이 판단하기엔 굉장히 속물적인 질문이었지만,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게 속 시원하긴 했다.
“공증인과 그 말의 효력을 증명할 문서는요? 그건 어쩌실 생각입니까? 설마 이렇게 중요한 일을 구두로만 진행하실 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세인이 말을 꺼낸 자를 노려보았다.
글리터은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 자루에 그들이 손이 닿는 순간, 회의장이 싸늘해진 느낌이었다.
“이봐, 말조심해. 각국의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내가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고 말하려는 건가? 나는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약속했는데 증거를 내놓으라니? 어떻게 그런 가벼운 언동을 할 수 있지?”
세인의 말에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던 자가 얼어붙었다.
글리터의 반응이 생각보다 살벌한 까닭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 세인의 행동은 굉장히 무례하고 비상식적이었다.
어떻게 포장을 하든 타국에 침범해서 무력으로 협조 아닌 협조를 구해놓고, 그걸 따지니 장사치가 일을 해결하듯 열 배로 갚아주겠다는 말을 날린 것이다.
열 배라면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현실감이 없는 액수였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 지급 의사를 증명할 수단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니 오히려 화를 낸다.
이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따지자니, 글리터는 드레퓨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주둔지에 함께 있어.’
회의장 안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뒤로 물리는 사람들이 있는 탓이었다.
본능적으로 회의장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네가 내 휘하에 있는 놈이라면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이다. 여기는 야전이고 군법이 적용되는 곳이다. 말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실언이냐고 돌려 물을 정도의 의도에 화내지 않을 정도로 내가 녹록하지 않아.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어떻게 나 같은 귀족에게 증거를 요구할 수 있지?”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이 미친놈아! 왜 이리 과민 반응을 하는 거야?’
질문을 던졌던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여기에 끼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지금 상황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미친개에게 물리느니 잠자코 있는 게 체면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가벼운 발언을 했습니다.”
억지로 상대의 사과를 받아낸 세인은 보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명을 발견했다.
그는 붉은 로브를 걸친 남자였다.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굴러가는 분위기를 읽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에게서 시선이 멎은 세인은 또박또박 말하며 말뚝을 박았다.
“저는 제 말에 책임을 집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을 조율하고, 빚이 있다면 10배로 갚을 겁니다. 지금은 목전에 둔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라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 회의장을 나가는 세인이었다.
그는 지금 여기에 모인 각국의 왕족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은, 그걸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어허.”
“맙소사.”
그래서 회의장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무례함의 극치를 보았다.
그것은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을 안겨주었다.
첫 번째는 현재 글리터의 군대를 이끄는 총사령관이 미친놈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미친놈에게 군대를 맡긴 세리스가 그립다는 것이다.
새삼 세리스가 얼마나 정상적이었는지, 그게 정말 고마운 것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해주는 하루였다.
* * *
회의장을 빠져나온 세인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따라붙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
맥과 기사들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의 안전을 걱정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이상한 일이었고, 지금 미들가든은 발에 챌 정도로 넘쳐나는 게 병사들이었다.
기사들을 따돌린 세인은 노점상들이 늘어선 곳을 따라 걸었다.
전쟁 상인들은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붙었다.
이번과 같이 여러 군대가 모인 곳이라면 무조건이었다.
게다가 블랙 라이어드 상단도 줄을 잇는 통에 안정성 면에서는 걱정할 게 없었고, 오히려 발을 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병사들은 상단을 통해 정상 가격보다 훨씬 후려친 값으로 물건들을 구입했다.
거기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다.
품질이 의심되는 무기도 돌아다니곤 했지만, 그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이런 공급은 눈감아주는 게 이쪽에서도 이득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전쟁 통에서도 어찌어찌 굴러간다.
세인은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는 상점가를 따라 계속 걸었다.
간밤에 살짝 내린 비 탓인지 바닥상태는 엉망이었고 물웅덩이가 곳곳에 보였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바닥만 보고 걷는 그는 뭔가 생각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 세인을 발견한 상인들은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하기 바빴다.
옷차림을 볼 때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거물이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족인 이상 글리터의 핵심 전력이란 소리였다.
지금은 글리터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레퓨스에게 밀릴 거라는 세간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웬걸?
정신없이 몰아치는 글리터 때문에 상인들은 따라붙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연합군에 매달려 여기까지 온 것도 충분히 강행군이었다.
게다가 블랙 라이어드 상단이 지원한다는 소리까지 암암리에 떠돌자 더더욱 조심하게 되는 상인들이었다.
“이대로 드레퓨스에게 승리한다면 정말 엄청난 역사가 쓰여질지도 모르겠어.”
이미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세인은 커다란 조각상 앞에서 멈춰 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한참을 걸어온 상태였다.
돌로 된 조각상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기울어진 그늘 쪽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이 보였다.
테이블들을 열심히 닦고 있는 상인은 세인이 다가오자 냉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한 분이십니까?”
“여기에서는 뭘 팔지?”
“주로 먹을 것들이죠. 배식으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것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사팔뜨기인 상인은 메뉴를 줄줄이 읊어댔는데, 그냥 돼지고기 하나로 요리법을 달리해 돌려막는 식이었다.
자리에 앉아 그걸 다 들어준 세인은 다른 것은 없냐고 물어보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과일 같은 것은?”
“그건 좀 비싼데요.”
“돈이 없으면 귀족 노릇도 힘들기 마련이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상인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러면서도 ‘돈 있다는 소리를 뭘 이렇게 돌려서 이야기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그의 얼굴에 묻어 나왔다.
그렇게 속마음이 얼굴에 묻어나올 정도면 큰 상인이 되기는 글러 보였다.
“예, 뭐 값을 지급하신다면 내오는 건 어렵지 않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그리고 한 이 미터를 이동해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상인이었다.
거리를 보니 갔다 온다는 표현을 쓸 것까진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어떻게 여기에 자리를 잡을 생각을 했지? 불안하지 않아?”
상인은 속으로 상대가 아주 특이한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너무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인의 마음이 약간 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물론 그가 알 리 없었다.
“예. 뭐 자릿세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여긴 경쟁자가 없고 자릿세도 없으니 좋거든요. 비록 좋은 목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은 이 석상이 설마 제가 있을 때 무너지겠어요?”
그리고 상인은 쪼르르 달려가 대담하게도 기울어진 조각상을 걷어 차보기도 했다.
“누가 자릿세를 걷지?”
“블랙 라이어드 상단 소속의 수금원이죠. 뭐 공평한 거래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는데 많이 고생해야 했을 거예요. 물품을 대주고 잠자리도 챙겨주니까요. 그런 거대 상단에 기대지 않으면 저희는 무서워서 병사들에게 말을 걸지도 못합니다. 대형 상단은 그래서 좋아요.”
“그건 동의하지 못하겠는데.”
“예?”
“아냐. 아무것도.”
상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하얀 크림을 꺼내 둥근 통에 넣고 휘젓기 시작했다.
쇼퐁 크림을 만드는 것이다.
그걸 과일에 올려놓을 생각인가 보다.
아주 끔찍하게 단맛이 될 테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
세인이 빠르게 휘젓는 상인의 손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새 손님을 발견한 상인은 크림을 젓는 것을 멈추고 후다닥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쇼!”
그러면서 소매로 탁자 위를 마구 닦았는데 정작 손님은 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무안하다는 듯이 상인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하. 동행분이셨구나.”
세인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남자였다.
아까 회의장의 구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붉은 후드가 목 뒤로 넘어가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세인은 어떻게 말을 던져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상대의 신분도 변했다.
그러니 더는 전과 같은 말투를 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익숙한 어투로 말을 건네 왔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레드의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 긴 간격이 있었지만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맺힌 미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오랜만이야.”
세인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