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77화 (277/307)

# 277

& 술잔 앞에서 (6)

글리터의 군대는 미들가든이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미들가든은 원래 유서 깊은 고대 도시가 있던 곳이었지만, 풍파를 겪고 폐허나 마찬가지인 곳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말하자면 묵은 이야기가 좀 있었다.

원래 고대 유적지인 이곳을 작은 나라가 수도로 삼았다가, 드레퓨스가 나타나 그 나라를 정복하면서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로 정해졌던 터였던 만큼, 지리적 조건이 좋아 드레퓨스에서 성터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여기 살고 있던 사람들을 다 내쫓았다.

식민지 국적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드레퓨스는 그때 여기 토지를 재분류하며 법적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도중에 반이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최종 승인이 나지 않았다.

결국 많은 사람이 공사를 집어치우고 떠나버린 곳이었다.

한때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던 이곳은 한 사람의 변심으로 인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고지대에 속하는 이곳에는 짓다 만 돌건물이 즐비하게 놓여있었고, 한때 성벽을 만들기 위해 채석장에서 옮겼던 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무방비 상태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경계선 주위를 둘러보면 몇 층씩 쌓아 올리다가 그만둔 성벽도 보였기 때문에, 내부 쪽으로 갈수록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다.

석굴 같은 곳도 주위에 많이 뚫려 있어 비도 피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여기의 장점은 뭐니 해도 터가 아주 넓다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수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넓은 공간에 글리터의 군대가 들어찼는데, 아무리 넓게 포진해도 절반조차 못 채울 정도였다.

세인은 그곳에 도착하고, 숙영지를 조성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식사 때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기사들을 집합시켰다.

행크의 뜻대로 최후의 비밀을 공개하기 위함이었다.

이노센트가 왜 남부에서 날뛰고 있는지, 그리고 드레퓨스의 지금 상황과 무엇이 우려되는지에 대해서 다 설명을 했다.

경악한 표정이 된 기사들에게 루시드의 존재마저 이야기 해주었다.

결국 빈센트의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말해준 셈이다.

빈센트의 존재는 세인의 측근들만 아는 정보였으므로 끝까지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힐다와 질리언도 최근에서야 빈센트의 존재에 대해 인식했을 뿐이다.

빈센트에 대해서 아주 정확히 알며, 그 위치를 아는 자는 마플의 무덤에서 세인의 설명을 들은 사람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특급 기밀이다.

아무리 세인의 기사들이라고 해도, 보통 기사들에게 빈센트의 위치를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이것을 여기에서, 이제 와서야 털어놓을 수 있었던 내 입장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게 세인의 맺음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기사들에게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글리터의 군대는 미들가든에서 계속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뒤처져 있던 북부의 군대들은 행군을 거듭해 미들가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한 나라의 군대가 도착하니 다른 나라의 군대들도 속속들이 모습을 보였다.

물론 같이 전쟁을 하러 온 나라들이지만, 그들 중에서는 화가 난 나라도 많았다.

세인이 헌터와 용병대를 이용해 벌인 일은 모두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다로가 후방에서 노멜에 그 난리를 쳐놓은 상태다.

뒤에 앉아 있다고 꼭 안전한 것도 아닌 셈이다.

결국, 북부 연합의 왕들은 대거 친정을 해버렸다.

어떤 나라는 글리터의 진격속도를 볼 때, 어쩌면 이 싸움이 해볼 만한 전쟁이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승산이 있어 보이니 부랴부랴 뒤늦게라도 따라붙은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복하고 남은 영토는 누구의 차지가 될까?’

자국의 이익에 초탈할 나라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 늦장을 부리느라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게 꼭 염치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늦게 왔어도 앞으로의 전투에 참여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

미들가든은 밤이든 낮이든 합류하는 군대를 두 팔 벌려 맞아 주었다.

점점 불어난 군대는 금방 미들가든의 안쪽을 채우더니, 나중에는 밖에서 야영해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어쨌든 무섭게 불어난 북부의 군대를 보면 친정을 나온 왕들도 꽤 안심되기 마련인 것이었다.

많은 나라가 미들가든에 모여들자 회의 날짜는 일주일 후로 잡혔다.

거기에서 공동으로 치를 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지만, 글리터도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걸 아는 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고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미들가든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던 그는, 어느새 주변을 꽉꽉 채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주변국들과 함께 미들가든을 떠나게 되면, 드레퓨스의 수도를 치기 전에는 회군할 일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들도 여기까지 온 이상 큰 전투를 각오하고 온 것일 테고.

어떤 나라는 분명 드레퓨스와 결전을 치르고 승리할 수 있다면 넓은 땅을 차지할 생각에 꿈을 부풀리고 있겠지만, 세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부까지 생각하며 글리터 휘하의 기사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길 기다렸다.

비록 주변국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었고 앞으로 열릴 회의장에서 절정의 꽃을 피울 테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는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에 할애할 시간에 번우드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더 신경 썼다.

항의서한이 그의 책상 위에 도착해도 읽어 보지도 않는 세인의 모습은, 마치 ‘뉘 집 개가 짖냐’는 식이었다.

오히려 옆에서 보좌하는 맥이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눈치만 보다가 이제야 참가한 나라들이지만, 그건 생각하지도 않고 저희를 물어뜯을 겁니다. 거기에 대비해서 생각해 둔 게 있으신가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하지.”

“….”

그렇게 회의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던 어느 날.

질리언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세인에게 밀담을 신청했고, 세인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밀실에서 그와 독대한 세인은, 질리언의 굳어진 얼굴과 긴장한 어깨선을 눈에 담았다.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질리언이 이 정도까지 긴장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할 수 있었다.

굳어진 질리언의 몸은, 이제부터 몹시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겠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세인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질리언.”

세인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도 잊은 질리언이 경직된 시선을 던졌다.

“찾아왔다면 결심이 선 것이겠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충분히 숙고했습니다.”

“그건 긴 인생 속의 짧은 생각이겠지.”

일단 말문을 여니 질리언의 긴장은 많이 누그러졌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그는 힘주어 말했다.

“결사대의 기사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네가 내게 말해주었잖나. 내가 치매에 걸린 것으로 보여?”

“그는 분명히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을 말하지 않은 거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를 그곳에 보내 주십시오.”

예상했던 말이 나오자 세인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와 마주 앉아 있는 질리언은 세인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질리언.”

“예.”

“네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점쟁이가 아니야. 하지만 누구에게나 미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니까.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추론하면 된다. 내가 어떻게 너의 운명을 점칠 수 있겠나? 하지만 괴물들의 미래는 예측하기 쉬워. 왜냐고?”

그리고 세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놈들은 인간의 기준에서 언제나 최악으로 행동하거든. 바이칼은 괴물이다. 네가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다 해도, 좋은 끝맺음을 기대할 수 없다. 그게 내 대답이다.”

“저는 뭔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자칫 오해를 살까 봐 두렵습니다.”

“허락한다.”

“저희는 여기까지 오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거의 다 치워버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밀어붙이며 여기에 섰는데, 앞으로도 주위를 쓸어버리시겠죠. 저는 그 방법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이칼 왕과 접촉할 수 있다면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가 함정을 파려 한다고 가정하면, 저희가 역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저희 앞길에 있을 희생과 아픔을 줄이는 일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러자 세인은 대놓고 대답했다.

“네가 죽으니까.”

“….”

“네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질리언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 목숨은 중요하지 않죠. 여기는 전쟁터니까요.”

그러자 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게 설령 개죽음이라고 평가 받아도, 전쟁터의 죽음은 분명 기사다운 죽음이다. 그건 네 자격과 운명이 허락한 죽음이야. 하지만 바이칼에게 간다면 그건 누구도 인정해줄 수 없는 죽음이 된다. 세상에서 죽음만큼 지독한 것이 또 있다면, 그건 괴물의 존재 그 자체니까.”

“꼭 제가 죽으리란 법도 없죠.”

“멍청한 놈. 빙빙 돌리는 말장난이나 하려고 내가 너에게 시간을 내어준 게 아니야.”

“전하.”

질리언은 아래로 내리고 있던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내보이는 손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걸 보는 세인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저는 이제 검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의 쓰임이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고 제가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누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세인의 손이 화상을 입은 질리언의 손을 덮었지만, 질리언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제 형은 죽었습니다. 기사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실 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용기의 끝은 그 누구도, 심지어 저조차 장담할 수 없지만,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마라 말입니다.”

“….”

“루시드라는 이노센트는 파악이 되지만, 마라라는 존재는 전혀 파악이 안 되니까요. 그걸 아는 쪽은 저쪽뿐입니다. 그렇다면, 말을 섞어보는 것만으로도 저쪽에서 정보를 빼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제가 가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열리는 것이죠. 그 가능성을 위한다면 불구가 된 가사 한 명 정도는 그리 큰 대가가 아닙니다.”

세인은 더 이상 들어줘선 안 될 것 같아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마라에 대해서는 나도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게 있어.”

“하지만 그의 권능과 정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모르시죠. 제가 접촉해 보겠습니다. 실패한다 해도. 고작 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문제가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리언.”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적임자인 것 같습니다. 눈에 띄면 안 되는 일이니 동행자도 필요 없고 밑져야 본전입니다. 저는 이제 싸울 수가 없으니까요.”

이제 질리언의 긴장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말을 하다 보니 더욱 마음이 굳어진 것 같았다.

그런 질리언을 보며 세인은 여전히 그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말하는 전제는 다 그의 바람에 불과했다.

일이 잘 풀린다는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신으로 거기를 찾아가겠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억지였다.

하지만 질리언은 그런 세인을 보며 다시 허락을 구했다.

“보내주십시오.”

“이건 본래 네 의무가 아니야. 누구에게나 탑에서 도망칠 권리 정도는 있어.”

누구에게나 예정된 공포에서 도망칠 권리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질리언은 여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웃음을 내보였다.

그는 그 웃음과 함께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탑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뜻은 좋지만 그런 인간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놈을 만나면 산산이 부서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세인은 몬스터를 증오했다.

그놈들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다.

‘그놈들의 짓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질리언은 지금 그의 앞에서 눈을 빛내며 모험을 허락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안된다고 하면 오히려 몰래 접촉할 기세다.

애초에 세인은 그를 말리기 위해 자리를 가졌지만, 곤혹스럽게도 그 자리가 질리언으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한 것 같았다.

“허락한다. 질리언. 접촉해 봐라. 그래서 최대한 좋은 결과를 가지고 귀환해라.”

질리언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답했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질리언은 한 필의 말과 함께 미들가든에서 사라졌다.

비밀리에 떠난 것으로, 다음 날 사람들은 질리언을 찾아다니는 월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힐다는 어렴풋이 질리언의 행방을 알 것 같았지만, 월터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다.

질리언을 잘 따르는 월터의 성격상 뒤쫓아 가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지니까.

누구라도 손을 쓸 수 없게 된 기사의 입장을 헤아려 본다면, 그리고 힐다처럼 어제 질리언이 세인의 막사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질리언과 함께했던 그녀로서는 그의 결심을 추측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하기 싫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을 살다 보면 꼭 해내고 싶은 일과도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질리언의 경우에는 그러기 쉽지 않은데 드물게도 세 개가 일치한 경우였다.

그는 바이칼에게 가는 것이 기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세인의 생각은 그런 질리언과 달랐지만, 그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도 공포에 떨었다.

기사라고 심장과 간이 강철로 된 것은 아니었다.

손을 다쳐서 검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남자가 단신으로 괴물의 본거지에 찾아간다는 것은, 쇠와 돌로 된 간을 가진 사내라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질리언의 모험이 현명한 선택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인은 분명 미래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지만, 그건 어렴풋이 끝을 더듬는 것에 불과했다.

그 과정은 안개에 휩싸인 듯 모호했다.

인간의 인생은 안개와 같고, 안개 속에서 길을 더듬는 행위는 언제나 어려운 선택의 연속이었다.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해보고 혹은 남의 선택을 존중해 보지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세인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질리언이 떠난 후로도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종일 문서를 들여다보고 결재를 마쳤다.

매일 변경되는 주변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고 최종권한자로서 경계 위치를 변경하기도 했다.

그렇게 업무를 마친 후에는 종종 생각에 잠겼다.

세인이 생각하기에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그것이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인간의 장점은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약점이 많은 만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세인은 드레퓨스의 왕궁 안에 있는 바이칼 외에.

누가 더 있는지 모른다.

가미긴이 누구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몰랐다.

루시드가 남쪽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마라에 대해서도 확실한 것은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두는 체스 같은 것이었다.

안개 속에서 혼자 두는 체스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최악을 가정해 본다.

그리고 말을 움직인다.

자신이 이렇게 나온다면 상대는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있어.

최악의 수를 둘까?

세인은 자신을 똑똑하거나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노력하고 노력해서 생각을 연거푸 해볼 수는 있었다.

‘적은 분명히 최악의 형태로 다가온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지?’

그렇게 다시 계획을 다듬었다.

그러고 나니 그것을 실현하는 게 숙제로 남았다.

그 실천 하나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우리가 이긴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생각을 끝마친 그는 세리스가 보내온 편지를 펼쳐보았다.

조그마한 위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편지를 살펴보니 굉장한 희소식이 들어 있었다.

조그마한 위안을 기대했는데 꽃다발을 받아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남편이라면 누구나 기뻐해야 할 일이 적혀져 있었다.

세리스는 그의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전쟁터에서 떠나오기 전 임신했지만, 이제야 징후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내용이 적혀져 있는 편지를 보는 세인은 분명 기뻐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질리언을 사지에 보냈는지도 모른다.

아니 보냈다.

그런 마당에 세리스의 임신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는 게 너무 염치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분명 기쁜 일이다.

“분명 기쁜 일이다.”

편지를 보고 있던 세인은 힘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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