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 술잔 앞에서 (5)
세인은 커다란 창문을 통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상태는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고려해도 그럭저럭이었다.
어제 전투가 끝난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상태라는 게 그의 소견이다.
저 정도면 무난한 거다.
그가 턱을 조금 들어 올려 시선을 멀리 던지자, 도시를 가둔 성벽이 아스라한 존재감으로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그가 있는 곳은 중심지에서 봐도 바깥쪽을 두른 성벽이 멀리 보일 만큼 넓은 성이었다.
번화가를 바라보던 세인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세인이 넓은 방을 가로질러 상석에 착석할 때까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커다란 황금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세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에서 손짓하자 문이 열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음은 세인의 앞까지 뭔가를 질질 끌고 오는 소리로 이어졌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세인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그가 앉은 의자의 원래 주인이 끌려 나와 있었다.
땀범벅인 상대는 옷이 심하게 구겨진 것을 제외하면 아주 멀쩡해 보였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는 세인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얼굴이다.
“풀어줘라.”
세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중년 남자의 입에서 재갈이 끌러 나왔다.
입이 자유로워진 남자는 발작하지 않았다.
일단 주변에 그를 노려보고 있는 기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 그가 난리를 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미 패배한 처지였다.
그렇다고 쳐들어와서 자리를 빼앗은 놈에게 곱게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언 정도는 들어줄 테니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세인의 권유에도 남자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세인을 쏘아볼 뿐이었다.
그때 한 명의 기사가 다가와 세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것을 들은 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우물마다 독을 풀었지?”
그러자 처음으로 묶인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돌았다.
“북부는 몰라도 우리 드레퓨스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해충을 죽이거든.”
벌레 취급을 당한 세인은 화를 내기보다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그건 약간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 병사들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여기 시민들이 다칠 텐데? 그들은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하나? 보아하니 입이 한둘도 아니던데”
세인은 빌헬름이 풀어준 시민들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그 시민들이 향한 곳은 여기이고, 원래 이 성의 출신들과 뒤섞여 있었다.
병사들은 몰라도 여기 있는 시민들은 그대로 두고 갈 생각이었다.
그게 바로 아까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귓속말을 들어보니 그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세인의 말을 듣고, 여기의 영주였던 남자의 입술이 가파르게 비틀렸다.
그의 눈빛에선 한 방 먹였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거야 이제 내 책임이 아니지. 그 책임을 빼앗아간 불한당이 바로 당신이잖아.”
비틀린 조소를 보내는 남자 앞에서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다. 그대는 아주 영리하고 냉정한 남자로군. 조국에 헌신적이고 말이야. 사실 나도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냉정한 걸 좋아해. 그러므로 냉정하게 자네를 대우해 주겠네.”
세인이 검지로 자신의 입을 가리키자, 기사들이 다시 남자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이자를 광장으로 데려가라. 그리고 독을 풀었다고 설명해. 그들도 사실을 알 권리 정도는 있는 거겠지. 이 사람의 가족들은?”
세인이 묻자 맥이 나와 대답했다.
“전부 확보했습니다.”
“좋아. 그들을 광장에서 고문한다. 고문의 시간은 집 곳곳에 숨어 있는 귀족들이 모두 나올 때까지다. 그때까지 모든 도구를 써도 좋다.”
그때 묶인 남자가 신음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기사들의 제지로 실패했다.
도리질을 치는 남자를 일별한 세인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린 곧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그 점도 고문의 강도에 반영되었으면 좋겠군. 서둘러라.”
그때 행크가 물었다.
“고문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세인이 묶인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 정도는 여기의 총책임자였던 자에게 권한이 있는 거겠지. 너의 가족과 너를 따르던 귀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어? 네가 독을 푼 우물에다 던져놓고 뚜껑을 닫는 것이면, 왼쪽 눈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이면 오른쪽 눈을 깜박여라.”
어지간하면 다시 재갈을 풀라고 말하면 될 듯한데, 세인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묶인 남자는 어느 쪽이든 눈을 깜박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모여 있는 기사들은 세인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기사들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세인의 분위기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세인의 측근들에게로 모아 졌다.
행크는 자신을 볼을 찌르고 있는 눈빛을 느꼈는지 볼을 긁적거렸다.
그도 어지간하면 세인의 행사를 말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세인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정이 내려졌는데 거기에 나서서 미운털이 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눈이 쓰라린 남자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가 두 눈을 동시에 깜박이는 것을 본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의사표시를 했군. 몽둥이로 때려죽인 다음 우물에 던져 넣어라.”
발버둥을 치는 남자는 강제로 질질 끌려나갔다.
그가 몸부림을 치든 말든, 세인은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뒤따라오는 북부의 나라들과 합류할 지점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골라 버렸는데, 일이 고약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곳에 독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이상한 짓을 해댔다.
예를 들어 곡식에 독충을 풀어 놓은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때였다.
발버둥 치며 질질 끌려나가는 남자 대신 다른 사람이 나섰다.
“이의가 있습니다!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난데없는 목소리에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확 쏠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흥분으로 인해 얼굴을 붉힌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월터였다.
월터를 발견한 맥이 발작하려는 것을 세인이 직접 손을 들어서 막았다.
“뭐지?”
“귀족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너무 도리에 어긋납니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엄청난 용기를 짜내서 말하는 월터의 목소리는, 긴장감 때문인지 끝에 가서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의 동료 기사들은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상태였다.
기사들 모두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질리언의 경우에는 아예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싸 안고 있었다.
“더 말할 게 있나?”
“예.”
“말해봐라.”
심호흡을 한 월터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귀족의 처우도 문제지만 여기 주민들의 운명도 문제입니다. 저희는 드레퓨스의 잘못으로 인해 무기를 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광적인 행동과 맞서 싸우며 여기까지 다다랐습니다. 저도 그들을 미워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덕이 있습니다. 차후 보급로가 이쪽을 거쳐 가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지금의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월터의 말에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포로가 없다는 말씀에 따라 이곳의 병사들은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통제할 귀족들은 물론이고, 식수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보급선이 이곳을 거쳐 가지 않으니 후속 부대도 오지 않습니다. 뒤에서 따로 오고 있다는 북부의 군대는 거북이걸음인 데다가 방향도 불규칙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면 이곳은 아무도 찾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남겨진 수많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월터는 두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불을 뿜듯이 힘주어 말했다.
그는 그렇게 윗사람에게 질문까지 던진 상태에서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확실히 그의 화법은 아랫사람으로서 문제가 많긴 했다.
“저희가 저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인간이니까요. 저희는 드레퓨스와는 다른 인간들이니까요. 나중의 통치를 위해서라도 여기에 병력 일부를 주둔시켜야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래서야 드레퓨스와 저희는 다를 게 없….”
그때 듣다 못한 행크가 발을 굴렀다.
그대로 들으려고 했는데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터의 발언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그의 발 구름은 분명 월터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지만, 동시에 월터를 위한 것이었다.
행크는 세인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웠다.
피식 웃은 세인은 그런 행크를 모른척했다.
그리고 월터에게 물었다.
“나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하지만 월터는 행크의 행동에 정신이 번쩍 들었나 보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세인은 잠시 그런 월터를 바라보았고, 이제 방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기사들은 한결같이 속으로 월터를 욕하며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월터를 바라보던 세인은 그를 하극상을 벌인 본보기의 제물로 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후에는 걸음을 옮겨 문 쪽으로 향했다.
분명 월터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방을 떠나가려는 것이었다.
그의 반응은 그게 끝인 듯싶었다.
이해한다고는 했지만 어떤 철회나 명령도 없었다.
세인의 입장에서는 의견을 들은 건 들은 거고, 꼭 반응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한 월터의 곁을 스쳐 가는 세인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발을 멈춰 섰다.
그는 아까와 달리 눈도 못 마주치는 월터를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지금 여기에서 월터에게 확실히 못 박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월터는 오늘 이후로 자기 발언에 대해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방황은 좋지 않았다.
그가 맞는 말을 내놓고도 그걸 가지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는 세인이었다.
“네 생각은 맞다.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건 확실히 해두자.”
그리고 그는 방을 빠져 나갔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대로 놔둔 채 말이다.
세인이 사라지자 넓은 방은 기사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왜 아니겠는가?
행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맥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화로 인해 얼굴이 붉어진 맥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때 더이스도 서둘러 걸어와 맥을 말렸다.
더이스의 경우에는 행크처럼 맥의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맥을 설득했다.
“세인님이 그대로 나가신 건 저희의 재량에 맡기겠다는 뜻인 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혹독한 벌을 줘서 기를 완전히 죽이면, 월터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겁니다. 그건 기사를 하나 매장하는 일이에요. 지금은 전쟁 중이고요.”
행크와 더이스를 바라본 맥은 결국 크고 긴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그들에게 맡긴다는 듯이 말이다.
그때 질리언이 그들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런 질리언을 본 행크는 그에게 말했다.
“나에게 보내.”
질리언은 거기에 대해 뭐라고 토를 달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행크의 얼굴은 바늘로 찔러도 파고들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질리언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월터는 행크가 문서들을 확인하는 집무실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행크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시간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행크가 문서를 뒤적이는 내내 그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즉 월터는 부동자세로 한 시간이나 서 있어야만 했다.
서류들을 내려놓은 행크는 그제야 월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이야. 아까만 해도 자네를 두들겨 팰까 생각했어.”
행크는 월터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월터는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서로 너무 가까운 자리였다.
긴장감 때문에 마른침을 삼키는 게 다 보일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걸 포기했어. 왜인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행크가 서류 뭉치를 한쪽으로 치우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질문을 던졌을 뿐이지, 대답을 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죄… 죄송합니다.”
무심코 또 대답한 월터의 얼굴은 아주 빨개졌고, 행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한숨 소리는 월터의 얼굴을 더욱 붉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자네는 때려도 바뀔 거 같지 않거든. 내가 살아보니까, 세상에는 때려도 고칠 수 있는 놈과 아닌 놈이 있더라고. 내가 볼 때 자네는 후자야. 내가 여기에서 하나하나 자네의 문제점을 말하자면 오늘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아. 그래서 자네가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거야. 자네가 스스로 깨닫는 게 나도 덜 피곤하다고. 월터, 정식 기사가 된 지 얼마나 되었지?”
“….”
“대답하게.”
“이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래 이년 반. 거의 삼 년이니, 길면 길다고 할 수 있고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이야. 자네에게는 그 시간이 장난이었나?”
그때 처음으로 월터가 행크와 눈을 마주쳤다.
그전까지는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월터는 진심을 담아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시선을 다시 천장으로 던졌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행크는 그런 월터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건 자네를 지켜본 모두가 알아. 솔직히 말해. 나는 자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왜 아니겠나? 하지만 처음에는 자네를 보고 생각 없이 기사단에 온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자네는 목숨을 걸고 기사전까지 치렀어. 적어도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아무리 등을 떠밀어도 부담감이나 공포 때문에 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있거든. 집단 전투와 개인 전투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
“기사에게 있어 기사전은 그 자체로 영광입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또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지. 나는 그 점을 이야기 해주고, 또 이해시켜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건 포기하기로 했네. 왜냐면. 신념이란 것은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고쳐질 수가 없거든. 애초에 수정할 수 있다면 신념이란 말도 붙이지 않았을 거야. 나는 자네가 신념을 가진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세인님도 목숨을 걸고 신념을 말하는 자네에 대해서 속으로는 흡족해하셨을 거야.”
월터는 갑자기 서글퍼졌다.
행크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담아 충고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속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들이었지만,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월터의 표정을 본 행크는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으니까. 앉으라고.”
결국 월터는 행크의 강권에 자리에 앉고 말았다.
앉아서도 팔을 직각으로 유지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월터. 나는 자네가 진심으로 여기 있다는 걸 알아. 자네의 생활 태도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어. 질리언이 올리는 보고서는 거짓말을 안 하거든. 새벽부터 일어나 말을 살피고, 눈코 뜰 새 없이 일하지. 단련하고, 동기들을 도와주고, 경계병들도 아주 잘 관리하고 있다. 이런 건 반년 정도는 누구나 열심히 할 수 있어. 하지만 꾸준히 한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야. 시간이 지나면 요령 피우는 녀석들도 나오기 마련인데, 자네는 아니잖아. 그리고 자네의 글도 보았어. 의견서 말이야. 거기에는 자네의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지. 자네는 무모할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야.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자네가 좋다.”
월터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라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행크는 지금의 월터에게 당장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보고서를 올리는 방법도 있어. 그게 바로 정상적인 루트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자네의 의견이 존중받을 만 하다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결국 최고 권한자의 손에 쥐어질 거란 이야기야. 내가 왜 질리언 대신 여기 있는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그건 질리언이 자네에게 혹독한 벌을 주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질리언은 자네를 좋아하거든.”
“….”
“그가 자네에게 벌을 주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겠지만, 내가 지금 자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식 루트를 통해서 해. 그리고 그게 바로 조직을 존중해주는 최소한의 지점이고, 질리언을 엿 먹이지 않는 방법이야. 자네가 질리언을 건너뛰고 의견을 말했을 때부터 일은 아주 크게 잘못된 거야. 질리언의 위치가 대체 뭐가 되겠어? 그리고 자네 눈엔 내가 개처럼 보이나?”
“예? 아뇨. 아닙니다.”
“그래. 여기는 개판이 아니야. 그것만 명심하라고. 자네에게 해줄 말은 아주 많아. 공포라는 수단을 전술로 써야 하는 우리의 입장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는 상세하게 말하지 않겠어. 왜냐면 자네는 이해한다 쳐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여기의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전쟁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쟁에 서로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다. 다만 이것만 명심해. 난 개도 아니고, 여긴 개판도 아니야. 자네는 목숨을 걸고 여기에서 기사로 와있는 거네. 그러니 자신을 개로 만들지도 말고. 여기를 개판으로 만들지 말라고.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지금의 행크는 평소에 더이스와 장난칠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 했다.
그는 월터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아주 기본적인 것만을 원했을 뿐이다.
그것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월터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걸 월터도 이해했다.
진심 어린 충고는 어쨌든 전해지기 마련이니까.
* * *
행크는 월터를 내보낸 후 책상에 앉은 상태로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인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지?”
“제 생각으로는 이제 기사들에게 마지막에 버티고 있는 적을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적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인이 더 말하라는 듯 바라보자, 행크는 부연설명을 했다.
“오늘 월터를 보고, 저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전과 다른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월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사들도 머릿속에 이건 인간의 전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게 몬스터와의 전쟁이라는 걸, 세상을 놓고 벌이는 사투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진정한 적에 대해서 알려준다면 우리가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결국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세인은 행크에게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행크는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물러갔다.
맥과는 달리 더이스나 행크는 세인에게 뭔가를 제안하거나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 행크였기 때문에 세인은 좀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