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75화 (275/307)

# 275

& 술잔 앞에서 (4)

“구석으로 몰아라.”

노멜의 근위대장은 지도를 짚으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런 기사들을 일별한 근위대장은 다른 지도를 꺼내오게 한 후 옆에다 펼쳤다.

이제 커다란 테이블은 여러 장의 지도를 식탁보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막아야 할 곳은 여기. 바로 여기다.”

남아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근위대장은 코다로 일행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노멜의 국왕은 코다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다로는 번우드를 양분하는 왕 중 하나였다.

그를 사로잡고 협상을 시작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상상하기 곤혹스러울 정도로 대단할 것이다.

코다로 일행이 무슨 생각으로 노멜에 왔든, 노멜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기필코 잡아야 할 기회였다.

“글리터와 번우드의 군대는 잠잠한 상태다. 응원군은 없고, 도주로도 없다.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을 수 있지. 그건 바로 여기.”

근위대장은 왕궁의 북쪽에 위치한 사냥터를 가리켰다.

광활한 영역으로 이루어진 사냥터는 산과 숲이 가득했다.

여기로 빠져나가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장군에게는 단단히 일러뒀겠지?”

“겹겹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물질은 성공이다.

근위대장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쥐들을 보러 가자.”

노멜의 기사들은 코다로 일행을 한쪽으로 유도하고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같은 편인 척을 하던 용병 대장의 왼손이 날아갔다.

뻔뻔함에 대한 응징으로 코다로가 자른 것이었다.

그건 남들의 눈에 마지막 발악처럼 보일뿐이었다.

이제 코다로 일행이 사로잡히는 것은 기정사실로 되었고, 누가 잡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석조 건물 안에 있던 윌은 망토에 박힌 화살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밖에서는 끊임없이 화살을 쏘고 있었고, 지붕과 벽에서는 마치 비가 오는 듯이 두드려 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공격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다.

넓은 공간에 앉아 있는 세 명의 남자도 그것을 충분히 알았다.

“정예병들이 밀려오면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집니다. 그 전에 도망가야 합니다.”

“어떻게? 활을 쏘는 녀석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교대해줄 인력도 남아돌고 화살도 쌓여 있을 테니까. 여긴 왕궁이야. 사람과 물건이 모자라지는 않지. 뭐, 왕궁을 덫으로 쓰는 그 활용도에 놀라긴 했다. 난 솔직히 북쪽으로 우릴 몰아댈 줄 알았어. 미리 함정을 쳐놓고서 말이야.”

코다로는 피에 젖은 자신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의 피는 아니고 적들이 흘린 피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족히 수십 명은 넘게 죽였을 것이다.

“여기 왕은 생각이 있는 거야? 집을 피로 물들이고 싶나? 이 난리를 피우도록 방관하다니 말이야. 하긴 표범을 그렇게 많이 기르는 놈이라면 정신이 멀쩡할 리 없지.”

투덜대는 코다로를 보며 재칼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재칼이 생각하기에도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거지만 말이다.

등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사방이 포위된 마당에 어디로 달아나겠는가?

재칼의 얼굴을 본 코다로는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 표정은 재칼? 죽을 때가 되니, 나를 따라온 게 후회되나?”

그러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재칼이 정색을 해 보였다.

“저를 음지에서 발탁해주시고 인정해주신 게 코다로님이십니다. 코다로님은 신분을 떠나 저의 은인이십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곁을 지키고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그게 제 의무입니다.”

코다로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에 있는 윌은 ‘저는 굉장히 후회되는데요.’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비비안의 기사지 코다로의 기사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코다로와 죽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화살 비가 멈췄다.

그리고 밖에서 어떤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어서 항복하시지!”

코다로는 얼굴을 깨진 창문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방금 항복 권유를 한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가 확인한 상대는 자신이 손을 자른 용병대장이다.

현재 그는 손에 붕대를 감고 서 있었다.

코다로를 사로잡았다는 공을 세우고 노멜의 왕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 용병의 심정일 것이다.

그를 발견한 코다로는 볼을 긁적거렸다.

잘 보면 그의 볼에는 아주 경미한 상처가 나 있었는데, 저 용병이 칼로 스친 자국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정상적인 셈법을 적용하자면 상대의 손을 하나 자르고 볼에 긁힌 자국이 남았다면 그건 아주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코다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리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박쥐에겐 교훈을 줘야겠지.”

살벌한 어조로 중얼거린 그가 문 쪽으로 다가서자 월은 기겁해서 그를 말렸다.

“잠깐! 설마. 설마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러자 코다로는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있는 윌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비비안이 설렁설렁 군다고 해서 네놈 위치를 잊었나 본데. 자꾸 내 행사를 막으면 곤란하다.”

윌은 코다로의 눈빛을 보고 자신이 물러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본능이 윌에게 경고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은 결코 보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듯 재칼을 바라보았지만, 재칼은 딴청을 피웠다.

코다로를 곁에서 모시는 재칼은 이럴 때 절대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성심을 떠나서 코다로의 성정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정 그렇다면 제가 대신 나가겠습니다. 그게 이치에도 맞습니다.”

“재칼.”

윌이 계속 귀찮게 굴자, 코다로가 재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재칼이 나와 윌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윌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결국, 그사이에 코다로는 홀연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도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분보다 먼저 죽겠다고요.”

“그건 코다로님이 위급할 때 내가 알아서 몸을 던지면 되는 문제입니다. 당신이 만약 비비안님에게 총애받는 기사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저승의 강을 건넜을 겁니다.”

태연하게 대꾸하는 재칼의 말에 윌은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이래서 비정상인 사람들이 무섭다는 것이다.

상식의 세계에 발붙이고 있는 윌은 지금 상황을 용인하는 게 힘들었다.

기사들이 안에 있고 왕이 밖으로 나간다니 말이다.

한편 밖으로 나온 코다로는 팔을 벌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손이 잘린 용병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지금 상황에 취해서 네 신분을 잊었나 본데, 네 주제를 깨닫게 해주마. 덤벼라.”

그리고 상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단서를 달았다.

“내가 지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지. 뒤에 있는 두 기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자 건물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들의 임무는 코다로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건 꽤 어려운 임무이기도 했다.

표범을 풀어 넣고 부대를 동원해도 장난처럼 해치우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을 생포하는 건 아주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잘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게 생겼다.

상대가 약속을 지키는 자라면 말이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무언의 압력을 받으며, 용병은 자신의 잘린 팔을 들어 보였다.

“나도 마음은 굴뚝같지만, 보시다시피 손이 이래서.”

용병은 자신의 잘린 손을 들어 보였다.

“대리인을 내세워도 되겠나?”

“말이 짧은 게 두 번째군. 이로써 네 비참한 죽음은 확실해졌다.”

으스스하게 말을 내뱉는 코다로를 무시하고, 용병은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탄탄한 체구를 가진 청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 용병들은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다.

이미 코다로를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보면 그게 꼭 틀린 생각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지금까지 코다로가 그렇게 날뛰었는데, 지쳐있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선 청년은 일대일의 전투에서 져본 적이 없는 사내였다.

청년이 쌍도끼를 들고 다가서자 코다로는 쌍검을 땅으로 던져 박아 넣었다.

“야. 어디를 가도 근본을 챙겨야 하는 거야. 어떤 상황이 와도 말이다. 그게 세상의 질서야. 그걸 모르고 주제를 모르는 놈은 죽는다.”

그 말을 남겨놓은 코다로가 청년에게 바람같이 달려들었다.

그래서 도끼를 든 청년은 조금 당황했다.

그는 상대를 죽이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달려드는 놈이라면 오히려 죽이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이쪽이 도끼를 휘두르면 상대는 무기를 들어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피하지 못한다면 도끼에 무조건 맞는 것이다.

청년이 엉겁결에 코다로를 깊게 베어 버리면 일만 커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끼 한 자루만 들고 올걸.’

그런 후회가 떠올랐을 때 하늘이 핑그르르 돌았다.

청년은 자기가 어떻게 당한 줄도 모르고 땅바닥에 메쳐졌다.

그러니까 방금 청년이 한 고민은 하등 쓸모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코다로는 지치기는커녕 아직도 팔팔했다.

오히려 힘이 남아돌아서 문제였다.

그리고 용병들은 몰랐겠지만, 과거 코다로가 목숨을 걸고 해쳐온 전장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지독한 실전으로 다져진 코다로 앞에서, 도끼의 개수나 생각하고 있는 얼빠진 놈에게는 승리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결국 청년을 기다리는 것은 코다로의 무자비한 주먹질이었다.

퍽! 퍽!

청년이 벗어나려고 하자 코다로는 그를 걷어찼다.

안 되겠다 싶어서 코다로의 다리를 붙잡고 관절을 꺾으려던 청년의 이마가 깨졌다.

땅에 떨어진 도끼를 집어 든 코다로가 도끼머리로 후려쳤기 때문이다.

그 후로 코다로는 청년을 개 패듯이 팼다.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맥없이 침묵을 지키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실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맨손의 코다로가 너무도 쉽게 제압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를 가지고 놀듯이 때리고 있었다.

“이봐 너. 이름이 뭐냐?”

코다로의 질문에 답하려던 청년의 얼굴이 돌아갔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코다로가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어이. 너도 내가 우습게 보이냐? 이름이 뭐냐고?”

그리고 다시 답하려는 청년의 얼굴이 완전히 돌아갔다.

청년의 얼굴을 걷어찬 코다로는 기어서라도 달아나려는 그의 등을 밟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손이 잘린 용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해라. 이 이름도 모르는 놈은 너 때문에 죽은 거다.”

그때 코다로의 발아래에 있는 청년의 두 눈도 손이 잘린 용병을 향하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린 청년은 애써 웃어 보였다.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코다로를 배반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티. 갑자기 술이 간절하네요. 제기랄.”

그리고 끝이었다.

도끼로 청년을 죽여버린 코다로는 몰려든 사람들의 뒤를 가리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코다로가 왜 피로 묻은 도끼를 들고 자신들의 뒤를 가리키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게 바로 이곳은 아군의 본거지니 절대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폐단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무기를 들고 쥐잡듯이 병사들을 잡는 야만인들의 모습을.

야만인들이 습격을 할 때 함성을 지르며 요란하게 발을 구르는 것은 아직도 유효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코다로가 모두의 시선을 빼앗고 있을 때.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접근했던 그들은 너무나도 우습게 뒤를 점해 버렸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마음껏 무기를 휘둘렀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나타날 수가 있지?”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기사의 두개골이 망치에 맞아 박살 났다.

망치를 휘두른 쪽은 짐승 가죽을 입고 있는 무에타이였다.

기사를 단숨에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그는 혀를 찼다.

“죽는 판에 지금 그게 궁금해?”

왕성의 북쪽을 막고 있던 군대는 안쪽을 경계할 뿐 바깥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탈출하려는 자를 경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물 안에서 대어가 날뛰고 있는데 등 뒤에 누가 다가오는지 살필 주의력이 없었다.

글리터도 번우드에서도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방심 요인이었다.

노멜의 치명적인 실수는 계산 안에 미처 야만인들을 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야만인들은 레드의 통치 아래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융성했고, 아주 막강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만인들을 논외로 치고, 세상 밖의 존재들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했다.

문명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유였다.

그런 인식에 더해 야만인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번우드의 편을 들어줄지 몰랐으니, 이번에 보기 좋게 한 방 맞아버린 것이다.

남의 나라에 병력을 급파하는 건 어떤 왕도 섣불리 추진할 수 없는 초강수였다.

그것도 자국의 이익이 아닌 타국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레드가 내린 결정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세인도 그렇지만 레드도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 결단엔 외교적인 마찰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야만인들의 기세에 눌린 노멜의 병사와 기사들은, 무에타이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더욱 절망했다.

“선물이다.”

노멜의 근위대장 머리가 허공 속으로 공처럼 높이 날았다.

그리고 이내 당황한 노멜의 병사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병사들 속으로 달려간 무에타이는 마치 선급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었다.

다른 야만인들도 기세가 올라 닥치는 대로 죽여댔다.

그중에서 용병들의 처지가 가장 볼썽사나웠다.

중간에 낀 그들은 이리저리 치이고 밀리다가 야만인들의 무기에 맞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어떻게 반항을 해보려고 해도 일단 야만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노멜 쪽에서는 완전한 아군도 아니니까 용병이 섞여 있다 해도 무기 던지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승패는 기울어졌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한 지금, 그들은 어떤 반전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어이.”

손이 잘린 용병인 마티는 소란통 속에서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며 다가오는 코다로를 보았다.

코다로의 두 눈에서는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마티라고 했나? 네 혀를 뽑아버리겠다. 그리고 사지를 잘라주마.”

그리고 코다로가 달려들었다.

비수를 꺼내 자결하려는 마티를 막기 위해서였다.

마티와 한 덩어리가 되어 땅을 구르게 된 코다로는 그에게서 비수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후 속삭였다.

“고맙다, 마티. 너로 인해 자유도시의 용병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씨가 마르거나, 강제로 징용되거나.”

노멜은 결국 북부의 본보기였다.

왕들로 하여금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책이며, 용병들에게 보여주는 화려한 화형식인 셈이다.

북부에 흩어져 있는 용병들은 두 번 다시는 딴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었다.

노멜에 있던 용병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소문이 널리 퍼진다면 그건 당연했다.

괘씸죄를 물어 강제로 참전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운명이 자유도시 출신의 용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인들은 노멜의 왕성을 짓밟고 다시 짓밟았다.

그리고 몇 명의 왕족들을 끌어내 수치를 준 후 다른 곳으로 이송했다.

이들은 배신에 대한 대가로 재판에 부쳐질 것이다.

이로써 코다로는 정말 넘지 말아야할 선마저 넘어버렸다.

상식을 벗어난 그의 광기는 현재에 있어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가 가진 힘도 힘이지만,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이유로 거칠게 구는 것을 남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후방에서 돌아가는 상황이나 보며 이리저리 재고 있던 나라들은 이제 그의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점잔을 빼고 있던 왕들은 앉아 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이 된 걸 느끼며 안절부절못했다.

번우드가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던 탓이다.

그들의 처지에서 번우드가 노멜에게 하는 꼴을 보자니, 이놈들은 없는 죄도 만들어내 해코지를 할 망나니였다.

그리고 코다로 일행이 번우드로 복귀하는 날.

말에 타고 이동 중인 코다로는 옆에 있는 윌에게 물었다.

이 물음의 포인트는 아주 무심하게, 그리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묻는 게 핵심이었다.

관심이 있지만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되는 이치와 같다.

마치 평소의 안부를 묻듯이, 그렇게 물어봐야 한다.

“자네는 혹시 사귀는 여자가 있나? 잘생긴 얼굴을 보니 짝이 있다면 참 좋을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흔들리는 말의 갈기를 어루만져 주고 있던 윌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는 눈치가 꽝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단순한 화풀이라고 하기엔, 지금까지의 코다로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 망할 놈의 전시회보다 더 심각한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

“저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기술을 갈고 닦기도 바쁘기 때문이지요. 제가 그래도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실력이라고 자부하는 이유는, 살아오면서 한눈을 판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야 대놓고 비비안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코다로가 벌컥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고 말이다.

그래서 윌은 최대한 강조했다.

자신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군. 하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안 생깁니다.”

“자네가 점쟁이도 아니고 어떻게 미래를 장담해.”

“절대 안 생깁니다.”

“그렇군.”

코다로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꼼으로써 시비 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오해를 푼 윌은.

언젠가 열릴 코다로의 전시회가 진심으로 쫄딱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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