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 술잔 앞에서 (3)
“자, 그럼 패를 돌려.”
코다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재칼은 카드 패를 손안에서 섞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섞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 손이 떨리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가 아닐까?
보다 못한 윌이 옆에서 카드 패를 빼앗아 들었다.
이제 카드는 윌의 손안에서 착착 소리를 내며 섞여들었다.
“이봐, 재칼. 긴장할 거 없어.”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이 현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자네도 많이 출세했잖아. 이 정도 가지고 간이 쪼그라들면 차후 어떻게 큰일을 하나? 이번 기회에 담력 좀 키우게.”
‘지금 상황을 봐서는 제게 과연 차후가 있을까요….’
재칼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윌은 말을 꺼낸 코다로를 매우 뻔뻔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재칼에게서 고개를 돌린 코다로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해버렸다.
코다로는 상당히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으며 윌을 추궁했다.
“뭐야? 그 눈빛은? 내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여튼 주인이나 그 수하나 눈치 주는 건 똑같구만. 누가 비비안의 기사 아니랄까 봐. 쯧”
지금 눈치 안 주게 생겼나?
이런 생각이 재칼과 윌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올랐다.
무리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 북부 연합에서 딴마음을 먹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나라에 와있었다.
손님 자격으로 방문한 것인데, 수행원을 하나도 대동하지 않았다.
호위기사는커녕 시중들 하인도 없는 상태였다.
말이 추측이지, 여긴 드레퓨스와 손을 잡은 것이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는 나라였다.
적지 한가운데에 달랑 세 명뿐인 지금, 왜 이렇게 엽기적인 일이 벌어졌을까?
평소 적성 국가나 마찬가지인 이곳을 치는 데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증은 충분한데 물질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노멜이라는 나라는 분명 드레퓨스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 확신되는 상황인데, 결정적인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정황증거만으로는 북부 연합의 회의 때 노멜을 몰아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골치를 썩일 때, 코다로가 먼저 제안했다.
방법은 그들에게 먹이를 던져 유혹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이쪽에서 선제공격을 할 수 없다면 반대로 저쪽에서 달려들게 하면 된다.
“어지간한 미끼 가지고는 달려들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곧 이놈들이 꽤 지능적이라는 뜻이니까요. 미끼를 던져도 그걸 물리가 없습니다.”
비밀회의장에서 그렇게 말했던 윌은 졸지에 이곳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그는 강제로 이곳에 끌려오면서 코다로가 내뱉었던 말도 똑똑히 기억했다.
“아냐. 아냐. 자네는 역시 누구의 수하 아니랄까 봐 생각이 아주 짧디짧군. 저놈들이 아무리 영리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특등 미끼를 던질 거야. 그놈들은 물 수밖에 없어. 물지 않으면 오히려 바보지.”
그래서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세 명이 처해 있는 것이었다.
코다로는 엽기적이게도 자신을 미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정리하자면, 적국에 코다로와 윌. 그리고 재칼만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고용한 용병들이 지척에 있었지만, 그들이야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세력이었다.
이건 객관적으로 봐도 말이 안 된다.
이래서야 정말 누가 바보인지 알 수가 없잖은가?
“뭐야? 윌? 왜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건데?”
언제나 천하태평인 코다로가 카드를 뒤집으며 말하자 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나마 치미는 격동을 다스리기 위한 임시방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야외 정원인데도 불구하고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약간 불안해서 그랬습니다. 달랑 우리 셋이서 여기에 온 것도 대단하지만, 저쪽도 대단한 게 정말 대놓고 아무도 없군요. 이렇게 철면피같이 뻔뻔스럽기도 어려운데 말입니다.”
윌의 말 그대로 그들이 있는 곳은 아주 조용했다.
현재 세 명이 묵고 있는 곳은 귀빈용 숙소였고, 왕궁 내부에 마련된 넓은 야외정원에 세워진 별채였다.
지금 그들은 숙소의 옆에 딸린 개방형 별관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반쯤 얼어붙은 연못이 보였다.
가끔 무심하고 서늘한 밤바람이 연못 위를 스쳐 지나갔다.
주변에는 바람 소리와 이따금 울리는 벌레 소리 외에 어떤 인기척도 없었고, 하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도착한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국왕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때 갑자기 재칼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앉아 카드를 쳐도 되는 겁니까? 한 테이블에 앉게 되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만 듭니다.”
“새삼 고지식한 척하긴. 내가 심심한 것보다는 낫잖아. 곧 죽을 수도 있는데, 고작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작게 웃어 보인 코다로가 패를 던졌다.
그의 패배였다.
승부에서 이긴 윌이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돈을 쓸어 가려고 했다.
그때 코다로가 그의 손을 잡았다.
윌이 바라보자 코다로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들리나?”
연못 쪽은 아니었다.
건물 내부에서 뭔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들어도 사람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둔탁한 소리가 아니고 아주 날렵하고 가벼운 발소리다.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닫힌 문 쪽을 향했다.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멈추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저기….”
그게 짧은 정적인지도 모르고 재칼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뭔가가 뛰쳐나왔다.
아주 가볍고 검은 무늬에 노란 가죽을 지닌 동물, 습격자는 바로 표범이었다.
천부적인 사냥꾼으로 유명한 표범은 높이 날아오르며 가장 가까운 거리의 재칼을 노렸다.
그리고 재칼이 휘두른 칼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뭐야? 표범을 푼 거야? 이거 재미있네.”
빙글빙글 돌며 연못 쪽으로 날아가는 표범의 머리를 본 코다로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천천히 칼을 뽑았다.
그가 느리게 칼을 뽑은 이유는 주변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윌은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물론 알고서 들어온 거지만, 삼면이 연못이라 도망갈 길이 없었다.
게다가 표범을 풀어 놓을 녀석들이라면 물에다가 뭘 풀어놓았을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코다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쌍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야. 이거 동물 학대 아니냐?”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숙소 쪽으로 몸을 날려버렸다.
이어서 그늘진 안채에 칼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윌과 재칼은 잠시 시선을 마주친 후 코다로의 뒤를 따라서 안채로 뛰어들었다.
이제 창문이 깨져나가며 표범들이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눈과 하얀 이를 빛내는 그들은 좁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습격해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칼이나 윌은 번우드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닌 실력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소파가 넘어가고 책장이 쓰러졌다.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진 책들이 검에 맞아 페이지들을 토해냈다.
조각난 액자들이 굴러다녔다.
그들의 발에 맞은 표범이 몸을 기형적으로 꺾으며 벽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윌은 좁은 공간에서도 아군을 의식하며 빠르게 검을 놀렸고, 하얀 섬광은 필요한 공간만을 누비며 표범들을 쓰러뜨렸다.
재칼은 코다로의 등 쪽을 맡으며 검을 날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용병 출신답게 변칙적인 공격도 했는데, 끈 달린 비수를 던져 사각지대에서 달려드는 표범을 해치웠다.
그 둘 사이에 선 코다로는 아주 여유롭게 검을 놀려 표범들을 절단하는 중이었다.
일반인들이야 표범 밥이 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자 별관의 바닥은 처음부터 표범 카펫이 깔린 양, 짐승의 사체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다 해치웠나? 그럼 어떤 선물이 더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코다로가 방을 벗어나려는데 윌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이미 아시겠지만, 용병들과 마주쳐도 가까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그들이 배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코다로가 팔을 떨치며 대답했다.
“그러라고 헌터들을 동행시키지 않은 거야. 이번에 용병들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말이야. 자유도시 소속의 용병들이 어떻게 구는지 보고 싶어서.”
윌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알아보는 것까진 좋은데, 세 명이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간단 말인가?
그는 솔직히 용병들과 잘 통하는 코다로가 뭔가 구슬려 놓은 게 있지 않나 싶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기 때문에, 만나자마자 방심을 풀고 다가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럼 지금 그들은 완전히 고립무원이란 소리였다.
이거야말로 대책이 없었다.
“제 사견이지만 그놈들이 배신했을 확률이 구 할이라고 봅니다.”
성질을 참는 듯 신음처럼 말하는 윌의 표정에, 코다로는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자네는 나보다 일 할이나 깎아주는군.”
표범은 그저 기세를 꺾어놓기 위해 동원한 것에 불과했다.
숙소를 나서자 맛보여주기식 공격이 아닌 직접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엄폐물 뒤에 숨어 화살 세례를 피한 세 명은, 숨을 고른 후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행해 달려갔다.
몸을 낮춘 것 치고는 빠른 속도였다.
중간중간 화살이 날아왔지만, 밤이라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다.
그나마 제대로 날아온 화살도 검에 맞아 튕겨 나갔고 말이다.
궁수에게 두 명의 남자가 뛰어들자 곡소리가 이어졌다.
단검을 뽑아 드는 궁수의 목을 단호히 쳐버린 재칼은, 일단 코다로부터 찾았다.
코다로는 무장을 하고 달려드는 기사들과 겁도 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죽어라!”
기사 중 한 명이 외칠 때 코다로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이 상황에서 기합이라니 여유가 넘치는구나.”
그의 쌍검이 불을 뿜자 기사들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숨 쉬지 않고 검을 날리는 듯 빠른 연격은 쉴 새 없이 이어지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면서 코다로는 지그재그로 이동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고, 손놀림은 경쾌하기 짝이 없었다.
유연함을 보자면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을 것만 같은데, 병사와 기사들은 그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하나의 검이 방패를 두드리면, 상대편은 전해오는 힘에 놀라 반쯤 무릎을 굽혔다가 두 손으로 방패를 지탱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 날아오는 검에 이마를 맞고 쓰러졌다.
코다로는 마족이 아니었을 때도 강했다.
그리고 마족이 되어서는 더욱 강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한 단련을 통해 자신의 틀을 깨고 강함을 갱신해왔다.
지금도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코다로는 태생적으로 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광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 광기는 전투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곤 했다.
궁수들을 해치운 윌과 재칼은 코다로가 미쳐 날뛰는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압도적인 힘을 보이며 적들을 베어 넘긴 코다로는 마지막으로 한 명의 기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중심을 잃은 기사가 옆으로 넘어지자.
코다로의 손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고통의 신음을 지르기는커녕 노려보는 기사를 바라보며, 코다로가 유쾌한 듯 웃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군.”
그리고서 칼로 그의 귀를 잘라냈다.
보다 못한 재칼이 다가와,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말하자 코다로가 짜증을 냈다.
“지금 내가 도움이 필요한 걸로 보여?”
그리고 그는 기사의 손가락을 잘라냈다.
결국 고통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기사는 울부짖으며 그가 아는 사실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코다로는 그를 통해 용병들이 배반했다는 사실과 주변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숨어 있는지 파악해냈다.
그의 목을 베어준 코다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왕실 근위대에 수도방위군까지 불러들였군?”
그러자 낯빛이 변한 윌이 그에게 다가가며 의견을 제시했다.
“도망가야 합니다. 이제 이들의 배반을 알았으니, 몸을 빼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나라.
노멜에서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동안 코다로 일행의 발을 묶어 놓으면서 번우드와 글리터의 동태를 살핀 것이다.
아무리 확인해 봐도 두 나라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코다로와 두 명의 남자를 지원해줄 의사가 없다는 것이 된다.
노멜 입장에서는 이것이야 말로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코다로 일행의 입장에선, 지원이 없다는 사실이 지금 노멜이 배반했다는 증거를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군대까지 동원했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탈출이 모든 것을 좌우할 것입니다.”
“이들은 저희의 입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고요.”
재칼이 거들자, 코다로는 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 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과~ 연. 누구의 수하 아니랄까 봐, 담이 작군. 여기까지 와서 겁나나?”
“….”
여기서 잠깐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윌은 자진해서 온 게 아니라 끌려온 것이었다.
코다로의 강압 아닌 강압 때문에 말이다.
순간 짜증이 확 치민 윌은 차마 대거리를 할 수는 없었고,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코다로는 번우드를 떠나오기 전에 비비안과 싸운 게 분명했다.
확실했다.
그 화풀이를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윌은 비비안의 신임을 받는 기사니까 말이다.
그에게 면박을 주는 것은 곧 비비안에 대한 짜증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코다로와 비비안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는 지금의 윌로서도 추론이 가능했다.
또 그놈의 전시회 때문에 대판 싸운 모양이다.
망할 놈의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