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 술잔 앞에서 (2)
스틸헴 성에서 내려온 세인은 성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천막을 치게 했다.
세인의 천막은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넓었지만, 정작 천막 안은 썰렁했다.
책상 하나 그리고 침상 하나, 바닥에 펼쳐진 큰 지도가 전부였다.
세인은 책상에 앉아 쌓여있는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는 세리스가 보내온 것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쓰여 있었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없었다.
그건 따로 서류로 주고받고 있는지라 굳이 편지에다가 쓸 필요가 없었다.
세리스의 정성스러운 필체가 묻어나 있는 글에서는 좋고 낙관적인 이야기만 가득했다.
전쟁터에 있는 세인의 감정선을 고려해서 그렇게 배려해주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편지 안에 고급스러운 사탕 하나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사탕 상태를 보면 전보다 발전한 글리터의 상태가 새삼 느껴졌다.
군것질거리가 나타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수제 고급품이 나올 정도면, 이제 이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금까지 입힌 포장지를 벗겨보니 보석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사탕이 나왔다.
커팅 기술을 보면 드워프들이 연상 되는데, 설마 드워프들이 사탕에 매달렸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싫은 그였다.
멜라니도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녀가 쓴 내용은 아주 초지일관했다.
쓰기 싫은데 세리스가 억지로 쓰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스와의 이야기가 반 이상을 차지했다.
편지들을 읽어본 세인은 답장을 쓰기 위해 새 편지지를 펼쳤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펜을 놓아버리고야 만다.
“나중으로 미뤄야겠어.”
결국 침대 위에 누운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불을 끄고 생각에 잠겼다.
밖에서는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들으며 세인은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정리했다.
가끔은 생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현실과의 균형을 잘 잡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그걸 상담할 시간과 사람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던 세인은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렇게 그의 손이 작은 쇠종을 잡았고, 몇 번 요란하게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부르셨습니까?”
밖에서 기사의 말소리가 들리자 세인은 명령을 내렸다.
“드레퓨스를 욕하는 노래를 중지시키고 전령을 보내라고 해.”
“대기시키겠습니다.”
“그래.”
곧, 전령을 통해 어떤 말을 전달할 거냐는 물음에 세인은 이렇게 답했다.
“항복 권고야. 내용은 아무렇게나 짜도 좋다.”
세인의 명령을 들은 맥은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
항복 권고를 보내는 것조차 의문이지만, 내용을 아무렇게나 보내란 말은 상대가 항복 권고를 받아도 거부할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아니까 처음부터 진심을 담지도 않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럴 거면 왜 사람을 보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성이라 내부 관찰이 목적도 아닐 텐데. 왜 저러시는 거지?”
그렇다고 대놓고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국 맥은 사람 몇 명을 불러 모아 초안을 짰다.
그리고 세인에게 검증을 받을 겸 보냈는데, 세인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통과시켜 버렸다.
그다음은 누구나 아는 뻔한 순서였다.
다음 날 아침 전령이 스틸헴 성으로 들어가 접촉했고, 반나절이 지났다.
전령은 거부라는 소식을 안고 다시 글리터의 주둔지로 돌아왔다.
맥은 거부 의사를 듣고 스틸헴 성을 바라보는 세인에게 슬쩍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왜 거부할 걸 알면서도 적에게 전령을 보내 시간을 주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로서는 이 작은 성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인의 의도가 너무 궁금했다.
그걸 알아야 장단을 맞출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돌려서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세인이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세리스에게 쓸 편지 내용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
“그렇습니까.”
맥이 턱을 어루만지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기사 한 명이 둘에게 다가왔다.
머리를 깊게 조아린 그는 사절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어디서 왔지?”
“그들은 남부에서 왔습니다. 여러 출신이 있지만, 그들 중 바이테스 소속의 귀족이 대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귓속말에 세인은 스틸헴 성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내해라.”
바이테스의 사절단은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전쟁 중인 두 나라 사이에서 여행하는 것은 여간내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레인저 그리고 실력 있는 전사와 홀리 레이크 출신의 성직자가 포함된 일행이었다.
물론, 무리에 딸린 기사들의 수도 아주 많았다.
오죽하면 접견장으로 쓰기 위해 비워놓은 커다란 천막 안이 꽉 찰 정도였다.
세인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시큼한 땀 냄새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들어가서 손부터 내밀자 콧수염을 기른 귀족이 자기소개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품에서 서신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세인은 준비된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그걸 그대로 펼쳐 들었다.
가장 높은 사람이 상석에 앉지를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냥 서 있어야만 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세인의 앞에서 콧수염을 가진 귀족이 설명을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남부에 우환이 많습니다. 놈들은 대륙의 정기를 끊어버리고자 남부부터 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중부나 북부에 도움을 청하고자 이렇게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남부 연합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중대한 위험에 맞서 서로 공동 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눈으로 이미 글을 보고 있는데 앞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콧수염이었다.
“바이테스의 황제께서는 즉답을 원하시고, 응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한번 회동 자리를 가지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서신에서는 간략한 것만 써놓았지만, 거기에서 군사적인 것도 더욱 심층적으로 의논하실 거고요.”
그러자 세인이 서신을 다시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면 여기는 어쩌고?”
“….”
“남부가 지금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물론 같은 인간으로서 매우 안타까워. 하지만 지금 우리를 보라고, 이쪽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 이 서신에는 우리의 사정에 대한 부분은 쏙 빠져 있군. 그저 정의감만 강조해 동참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잖아. 이렇게 다짜고짜 나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세인의 말에 콧수염과 다른 사람들은 꽤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저….”
“최소한 생각해볼 시간은 필요해. 지금 전쟁 중이니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바이테스의 사신은 세인의 힘을 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걸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바이테스의 황제는 세인이 거절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고려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의 기억 속 세인은, 과거 이상적인 결과를 위해 남부에 결단을 요구하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였기 때문에, 몬스터의 침공이 시작되었으니 함께해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버린 것이다.
“오늘 일에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주신다면 북부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시게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 번만 큰 틀에서 봐주신다면….”
콧수염 귀족의 말에도 불구하고 세인은 계속 부정적이었다.
“그러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잖아. 드레퓨스와의 전쟁을 끝내고 북부가 안정되면 당연히 그쪽에서 부르지 않아도 내가 달려가야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뭘 어쩌라는 거야?”
물론 세인은 몬스터를 증오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이상은 이상이었다.
그는 목적이 있었고 그걸 이루어야만 했다.
그게 최우선이다
그것이 자신의 같잖은 정의감보다도 훨씬 중요했다.
이곳을 포기하거나 미루어 두고 남부로 달려가는 것은, 그의 사람과 백성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엄청난 거리가 있는 남부를 지금 도와준다는 게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그들과의 동맹을 약속한다고 해서 과연 상생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과정에서 혼선만 빚을 수도 있었다.
저쪽에서 이쪽이 덜컥 수락할 줄 알았다면 그건 너무 일방적으로만 생각한 것이었다.
게다가 서신을 통해 열거한 사항을 보니 이쪽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이쪽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남부처럼 북부도 연합체야. 이렇게 중요한 결정이라면 북부의 나라들과 머리를 맞대어 봐야 하니까 말이야. 더구나 이 제안이 남부 전체의 뜻인지, 혹은 바이테스의 독자적인 뜻인지. 바이테스와 몇 개의 나라가 합심한 의견인지도 모르겠어. 왜냐고? 서신에 안 쓰여 있거든.”
“그건….”
언변으로 둘러대려던 콧수염 남자는, 어차피 지금의 세인이 우회적으로 말을 돌리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색하는데 그걸 가지고 꼬치꼬치 따졌다가는 경을 치를 수도 있음이었다.
달성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여기까지 왔건만, 그렇다고 신분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많이 지친 것 같은데 며칠 쉬었다가 가도록 해. 그동안 전투도 잠시 미뤄야겠어. 그 정도 예의는 보여주지. 누추한 곳이지만 편히 쉬라고.”
그렇게 말한 세인은 암담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앞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막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이 말을 덧붙였다.
“가서 그분에게 전해. 나도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게 최우선이라는 것을 그분께 배웠다고. 그 후에야, 전체를 위해도 위해야 하는 것이겠지.”
“….”
세인이 천막을 빠져나오자 맥이 곁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수락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맥의 말에 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줘도, 저쪽에서는 그걸 신뢰 있게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도 크지. 오히려 정보가 몬스터 쪽으로 새어나갈 수도 있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예. 말씀하십시오.”
“그들은 항상 자기 위주로만 생각해. 안전 지향적이다가 위급해지니 상대 처지는 생각 하지도 않고 주장만 하니까. 그런 집단과 연대해봤자 좋아질 게 없지. 우리 북부만 해도 그래. 지리적으로 등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손을 잡았지. 물론 그래서 서로 득을 본 것도 있지만, 막상 위기가 닥쳐오니 어떻지? 아직까진 우리만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군. 주위를 둘러봐. 우리뿐이야.”
그러자 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에 드레퓨스가 있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저희가 그들을 도와줄 방법도 당장 없습니다. 드레퓨스가 변하지 않는 이상은요. 하지만 드레퓨스는 몬스터와 한 몸이죠.”
“물론, 저쪽도 그걸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사절단은 떠났고 더는 일을 미룰 수 없었다.
비라도 뿌릴 듯이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세인이 중얼거렸다.
오늘의 그는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였다.
“중부는 눈 대신 비도 오고 참 좋겠어.”
그리고 공격을 명령했다.
글리터의 군대가 공격해 오자 스틸헴의 병사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기사들도 사력을 다했는데 그 치열함에 글리터쪽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세인이 성문 앞으로 걸어갔을 때부터 승리의 추는 글리터쪽으로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성문을 박살 낸 세인은 마검을 들고 빌헬름이 있는 영주관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자신을 막는 모든 것들을 베어 넘겼다.
그는 정면만 보고 걸으면서, 보지도 않고 검을 뿌렸다.
그러자 그 공격은 귀신 같게도 뒤에 있는 기사마저 맞췄다.
시체들을 만들며 도착한 영주관에는 큰 방패를 든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마저 해치운 세인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갔다.
그 후 그가 빌헬름의 앞에 도달하는 데에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걸어가는 동안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고, 저항은 무의미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빌헬름은 낡지만 튼튼한 갑옷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아마도 세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빌헬름의 옆에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지만,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인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세인의 감정 없는 물음에, 빌헬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팔걸이 위에 올려놓았던 술잔이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그리고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붉은 와인이 바닥을 적신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 후에는 더욱 붉고 짙은 피가 바닥을 점령하게 될 테니까.
빌헬름은 검을 들어 세인을 겨누었다.
“너에게 도전하겠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성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인이다.”
그의 말 안에 들어있는 비탄, 자괴감, 슬픔은 세인에게도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세인의 손가락이 마검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러니 바라 건데, 적으로서 나를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다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인의 검이 번뜩였다.
거리를 두고 휘두른 검이지만, 공간을 타고 살기가 움직인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빌헬름의 목전에서 검광이 되었다.
싸늘한 그 궤적은 가차 없이 빌헬름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마도 빌헬름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의 시체가 쓰러지기 전에 세인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 후 두 팔을 벌려, 기울어지는 빌헬름의 몸을 끌어안았다.
빌헬름이 형편없이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헬름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세인의 가슴을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빌헬름의 시신을 땅바닥 위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망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때 주변에서 차례대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세인은 아직도 빌헬름의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빌헬름의 얼굴에는 아직 혈색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가 죽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빌헬름의 기사들이 세인을 향해 몰려들 때, 세인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 수하 된 도리로서 너희들도 뒤따라가야 하겠지.”
그 말을 신호로 기사들의 검이 춤을 추었다.
검면에서 반사된 빛이 세인의 얼굴과 몸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마치 빛의 나비가 복수의 날갯짓을 하며 세인을 유린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검을 휘두른 기사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전투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마검이 소리 없이 주변을 휩쓸었고 사방은 금세 피바다가 되었다.
그 피바다의 중앙에서 홀로 몸을 일으킨 자는 오직 세인 한 명뿐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걸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스틸헴 성은 함락되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처형당해 삶을 마감하였다.
* * *
천막으로 돌아온 세인은 물로 몸을 간단히 씻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에 그가 한 행동은 세리스를 위해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렸고, 그 소리를 배경 삼아 담담히 글을 적어 내려갔다.
종이 위를 글자로 빽빽이 채운 그는, 마지막으로 펜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불과 얼마 전에 살아있는 빌헬름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에게 어차피 사람들이 죽는다면, 당신이 한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죽는다면 그동안 한 일이 의미가 있을까?’
그건 지금의 세인에게 있어 결코 풀기 쉽지 않은 화두였다.
잠시 펜을 들고 머뭇거리던 그는, 지금 생각한 것에 대해 한 줄의 글을 적어 보았다.
- 죽은 그가 한 일이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까 주워온 것을 첨부했다.
그 물건에 어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저 피에 젖어 있기에는 안타까워서 주워왔을 뿐이다.
혹은 색깔이 아름다워서.
그리고 세리스가 준 사탕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다.
그것은 드레퓨스의 국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