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72화 (272/307)

# 272

& 술잔 앞에서 (1)

드레퓨스의 지도 위에서 처음에는 글리터가 하나의 창으로 보였다.

그 한줄기의 창이 코포니 성을 상상 이상으로 빨리 함락시키면서 거침없이 전진했다.

이미 수도와 연락을 주고받던 드레퓨스의 성주들로서는, 코포니 성이 꽤 오래 버텨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성주들에게 곤혹스러움만을 남겨주었다.

그 후로 연달아 두 개의 성을 함락시킨 글리터의 군대는 끝이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삼지창은 연달아 중요 거점을 정복하면서 각을 더 벌려 나갔다.

북부의 세력도 만만치 않지만 드레퓨스는 아주 거대한 나라였다.

겉에서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전법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글리터가 낼 수 있는 대군이 많아야 두세 번의 출진 병력을 잡는 것이 한계라면, 드레퓨스의 경우 시간만 충분하다면 여섯 번 이상도 가능했다.

그 정도로 몸집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드레퓨스는 어쨌든 일원화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신도가 많은 나라냐를 떠나 모두가 하나의 머리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부 연합은 빈말이라도 단결이 잘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지방들을 하나둘씩 점령하기보다, 강력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도로 진격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글리터에게 있어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관리하는 것, 그리고 거기를 지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성을 깨트리는 것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력에서는 분명히 열세이지만, 글리터의 군대가 공격하면 반드시 그곳은 무너지는 것이었다.

세 갈래의 공격을 주도하는 인물로는 중앙에 세인이 있었고, 좌우에 행크와 더이스가 있었다.

그렇게 범위를 넓혀가며 드레퓨스를 몰아치니.

땅이 불타고 중요 시설을 지키는 담이 무너졌다.

글리터는 성을 함락시키려면 제 아무리 천운이 따라도 일주일 이상이 걸린다는 상식을 깨트렸다.

성 하나를 함락하는데 사흘이 채 걸리지 않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니 급하게 된 건 차후 공격 루트에 노출된 드레퓨스의 성들이었다.

일직선 위의 길에 열 개의 성이 차례대로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열 번째 성의 입장에서는 앞쪽에 있는 성들이 일주일씩만 버텨줘도 한 달 이상을 버는 셈이었다.

그리고 앞쪽의 성은 당연히 그럴 의무가 있었다.

실제로는 수성전에서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에서 일 년을 넘게 버티는 경우도 흔하다.

아무리 무능한 영주라도 적군에게 사신을 보내고, 이것저것 수단을 강구하다 보면 한 달은 기본으로 버틸 수도 있었다.

물론 이건 순수하게 버티는 시간만 따진 셈법이다.

드레퓨스의 영토는 아주 넓으니까 이동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여유가 몇 배로 불어난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며칠도 안 돼서 함락되어 버린다면?

뒤쪽에 위치한 성들은 마치 시간을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것이다.

그들은 할 일이 많았다.

들판의 곡식도 추수해 성안으로 날라야 하고 식수도 끌어 와야만 했다.

수도에 연락도 주고받아야 하고 백성들도 정리해야만 한다.

또 성의 방어 태세가 항상 최상의 상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거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투를 위해 매일 무기를 손질하고 방어구를 점검하는 곳은 아주 드물었다.

그 정도 노력이면 평상시에 영지를 위해 쓰는 것이 몇 배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야 항상 준비된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일주일마다 군장검사를 받는 곳을 상상해보라.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병사들에게 곡소리가 터져 나올 만도 했다.

물론 아주 큰 규모의 성이라면 그런 게 잘 지켜지지만 말이다.

결국 요약해 보자면 드레퓨스 쪽에서는 수성전을 준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글리터가 파죽지세를 이루며 몰아치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 드레퓨스의 상태였다.

“뭐라고? 펄비스 성이 당했다고? 거긴 정예 양병이 많은 곳인데 정말로 당했단 말이야? 그것도 그렇게나 빨리? 말도 안 돼! 영지전을 준비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있던 바보들이었는데, 아무리 바보들이라고 해도 그쪽 일가는 싸움 하나만은 잘한다고! 믿을 수 없어, 정말 그놈들이 당했단 말인가….”

성주들은 세인의 존재를 몰랐다.

세인에게 있어서 앞에 존재하는 군사력의 우위가 중요치 않다는 것을 모르는 성주들은 장탄식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사흘이 멀다고 전황 보고를 받는 성주들은 경악성을 토하기 바빴다.

지금까지는 드레퓨스의 국력이 북부보다 압도적인 줄 알았는데, 현재 글리터가 보여주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돌파력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다들 수도에 구원요청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성의 함락 소식이 들려왔다.

옹힐덴 성이라는 곳으로 엄청나게 큰 성이었다.

병사들도 아주 많이 있었다.

그런 곳이 불과 사흘 만에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드레퓨스의 귀족들은 마치 싸구려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소설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흘 만에 성이 함락당한다는 것은 실상 성주가 자청해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런데 옹힐덴의 성주가 그랬을 리는 없으니, 미치고 팔딱 뛸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형적으로 옹힐덴 다음에 위치한 성은 아주 작은 성이었다.

옹힐덴의 오 분의 일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성의 이름은 스틸헴.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들 사이에서 중부 대로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성이다.

코앞에서 몇 배나 되는 덩치의 성이 무너졌으니 지금 그쪽 성주의 기분은 어떨까?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다가올 글리터를 상기하며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스틸헴의 총책임자이자 영주인 빌헬름은 지금 속된말로 똥줄이 타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지금 빌헬름의 속은 걱정으로 타들어 가고 있지 않았다.

“아침이군.”

병사들을 따라 아주 짧게 자른 백발의 노인.

스틸헴의 주인인 빌헬름,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정정했다.

기사들을 훈련시킬 때 멀리에서 지켜만 보고 있지 않고, 가급적 참여한 그는 몸도 꽤 건장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상의를 입으면 옷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고, 단추가 잘 잠겨지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갑옷이 아니라 허름한 옷을 걸친 그는 작은 쪽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이 그를 반겨준다.

그는 성벽에 있는 병사용 숙소에서 며칠을 보낸 상태였다.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까닭은,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앞서 마음을 새롭게 다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벽에 한 손을 가져다 대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자, 까칠까칠한 성벽의 감촉이 주름진 손에 느껴졌다.

그게 끝났을 때 빌헬름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스틸헴은 작은 성이라서 그 주위를 두르고 있는 외벽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꽤 자주 보수를 한 성벽이라 튼튼해 보이기는 했다.

게다가 신기한 건 성곽에 화단이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는 화단은 이질적일 것 같으면서도 성곽과 묘하게 어울렸다.

“….”

떠오르는 해를 보러 새벽부터 성벽에 올라온 빌헬름은 하품하느라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알고 보니 성벽 위에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미리 와있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를 보자 빌헬름은 당연히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누구지?’

빌헬름의 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사람은 남자였다.

그는 아주 젊어 보였다.

그리고 성벽의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몸이 향하는 방향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성벽 위에 꽂혀 있던 드레퓨스의 깃발을 뽑아 든 것인지.

처음부터 그것을 자기 것인 양, 한 손에 들고 있는 남자는 검은 옷과 망토를 걸친 마족이었다.

그는 빌헬름을 보고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너무 담담하고 평온한 안색이라, 소리를 쳐야 하나 고민했던 빌헬름도 덩달아 안정이 될 정도였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상대가 대답했다.

“세인.”

“마족이니, 글리터의 기사인가? 여기는 어떻게 올라왔지?”

그리고 빌헬름의 시선은 전방을 향했는데, 거기엔 절로 신음이 나오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왔는지 글리터의 병사들이 숙영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외곽 쪽으로 돌린 경계병들은 어떻게 된 걸까?

죽은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는 빌헬름이었다.

그런 그를 세인이 시종일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턱짓으로 화단을 가리켰다.

“멀리서 보니 꽃이 피어 있더군. 그래서 올라와 봤어.”

마치 소풍을 왔다는 투로 말한 덕분에 빌헬름이 피식하고 웃었다.

하긴 이랬으니까 옹힐덴이 금방 점령당했을 것이다.

무슨 재주인지는 모르지만 이래서야 속수무책일 수밖에, 결국 스틸헴의 운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빌헬름은 성벽에 놓여 있는 화살 보관함 위에 앉았다.

그리고 딴청을 피우듯이 글리터의 병사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그들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모습을 보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게 드레퓨스의 국화요.”

“내가 알던 것과 색깔이 다른데?”

“이름은 같은 꽃이라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게 역사서에 나오는 꽃이고, 초대 왕이 든 깃발에 그려진 국화가 맞소.”

그리고서 세인과 빌헬름은 잠시 먼 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글리터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빌헬름이었다.

그는 지금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혀를 찼다.

“이래서야 당해도 할 말이 없겠군. 내 부하들은 아직도 꿈나라에 있는데 바깥에서는 저렇게 열심이니. 항상 부지런한 자가 달콤한 열매를 맛보기 마련이지.”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빌헬름의 뒤쪽에 있는 계단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기사들이 보고를 위해 뛰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그 발소리가 거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을 때.

빌헬름은 손을 들어, 그들에게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계속 세인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생각을 해봤지. 여기에 사는 병사들은 매일 지겹도록 이곳에 올라와. 성벽 위를 돌고 또 돌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게 삭막한 풍경이 전부가 아니었다면 좋겠다고 말이오. 그래서 꽃을 심었소. 잔디도 깔고 정을 붙일만한 구석을 주었지.”

“여기에서 내부를 보니, 거리에도 공을 많이 들인 것 같아.”

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빌헬름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빌헬름의 등 뒤.

계단에 줄줄이 서 있는 기사들 입장에서는 조금 애가 타는 시간이었다.

공격 명령만 내리면 뛰쳐나갈 텐데 수다만 떨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기사들을 불러들여 세인을 잡으라고 말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는 그냥 자신이 이 성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고 애착을 가졌었는지를 말하기 바빴다.

황폐한 땅을 개간하고, 물을 끌어오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일.

지원이 끊기다시피 한 영지에서 몇 명의 가신들과 함께 노력하며 살아온 일을 떠들어댔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은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왜 성의 뒷문을 열게 하고 주민들을 대피시켰지?”

그때 처음으로 빌헬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바위만큼이나 거칠고 무거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돌변한 그의 분위기에, 주변의 온도가 내려간 착각마저 일었다.

“그들을 추적했나?”

세인이 고개를 젓자 빌헬름은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터트렸다.

“이봐. 난 우리가 질 것을 알아. 옹힐덴 성도 막아내지 못했어. 거기와 이곳의 병력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당신도 알겠지? 그 두 눈으로 보고 왔을 거 아닌가? 그렇지?”

세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겠지만 우린 질 거야. 나는 정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고 싶지만, 이곳은 함락될 거야.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왜 애꿎은 피까지 신에게 지불해야 하지? 나는 그에게 부채가 없네. 평생 당당하게,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어.”

세인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빌헬름이 피식 웃었다.

“왜? 우리나라에는 미치광이들만 있는 줄 알았나?”

“아무리 좋아 보이는 곳에도 미친놈들이 있듯이, 어디에든 좋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 다만 가려내기 힘들 뿐이야. 빌헬름. 성의 복심인 주민들을 탈출시킨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었어. 싸움의 이유와 전력이 줄어들었으니 말이야. 그리고 네가 보내준 사람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아. 어차피 그들은 죽을 거야. 왜냐고?”

이번에는 빌헬름이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 자체가 너무 비통한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와 여자가 딸린 그들이 여기에서 도망쳐봐야 어디로 갔겠어? 가파른 야산? 허허벌판? 고작해야 다음 성이겠지. 거기가 다음의 공격 목표야. 그들은 어차피 죽는다. 이리에게 유린당하는 양 떼처럼 말이야. 그렇다면 너의 그 고귀한 행동이 이런 현실 속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어쩌면 이 상황에서 빌헬름은 세인을 욕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이는 글리터의 행동은 지탄받아 마땅했다.

여기 있는 빌헬름이야말로 세인을 꾸짖고, 그에게 증오와 저주를 퍼부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세인을 비난하는 대신 자신의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무방비 상태인 자신의 목을 베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런 확신이 들지 않았다면 대화를 섞지도 않았을 것이다.

빌헬름은 대답하는 대신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목으로 삼켰다.

‘국가인 그들이 하루라도 더 살아남는다면, 내 조국은 그럼으로써 하루 더 사는 거니까.’

상대를 막을 수 없다.

그게 잔인하고 차가운 현실이다.

세상에는 최선을 다해도 바꿀 수 있는 일이 있었고 불가능한 게 있었다.

막상 드레퓨스와 글리터가 서로 패를 앞으로 내밀어 보니, 글리터의 군대는 엄청나게 강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드레퓨스의 최전선은 연이은 패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까지 지속될까?

적어도 분명한 건 여기 스틸헴에서 글리터의 행군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실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빌헬름은 가슴에 몰아치는 자괴감과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상대방을 확인하려고 눈을 떴을 때, 세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

빌헬름은 천천히 걸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깃발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탁탁 먼지를 털어냈다.

빌헬름이 생각하기에 세인은 이 깃발을 찢어버리러 올라왔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서 어떤 행동을 했을지도 약간이나마 상상이 갔다.

‘성벽을 넘었겠지.’

빌헬름은 세인이 도중에 마음을 바꾼 것에 의아함을 느끼지 않았다.

‘의미를 물었을 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어. 알고서 물어본 거야.’

그래서 빌헬름도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빌헬름을 둘러쌌지만, 빌헬름은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온통 드레퓨스의 깃발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손으로 탁탁 쳐서 먼지를 털어낸 그는 깃발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굉장히 엄숙해 보였다.

제자리를 찾은 깃발이 바람에 힘차게 펄럭였을 때, 빌헬름은 다정하게 그 깃발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제야 기사들을 돌아봤고.

진심을 담아 힘주어서 말했다.

“이 깃발 아래에서 모두 하나 되어 싸우자.”

비록 그 끝이 죽음이라 해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