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71화 (271/307)

# 271

& 마지막 아침 (8)

세인은 짧은 말을 내뱉었다.

노브로서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건 당연했다.

노브에게 한 말이 아니니까.

“이제 스물이군.”

“뭐?”

되묻는 노브의 볼 위에서 연기가 피워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검날에서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하얀색이 아니라 섬뜩한 검은색이다.

노브는 금세 자신의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뜨겁다는 느낌은 오래가지 못했다.

차라리 뜨거울 때가 좋았다.

신경망을 통해 뇌까지 달리던 감각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돌변했다.

점점 고조되는 통증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린다.

종이 치는 소리가 빨라지다가 섬전처럼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동시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으! 으아악!”

그가 사람들을 화형에 처할 때도 분명 이런 냄새가 났을 것이나, 지금 노브에게 그런 연상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의 그는 회상할 여유가 없었다.

아주 조금도 말이다.

“으아악! 으아아!”

너무 아팠다.

차가운 밑바닥에 닿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이었다.

서서히 광대뼈가 녹아서 주저앉았다.

그러자 마검이 기울어지며 검 끝을 바닥에 툭 하고 부딪혔다.

그 과정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검신이 노브의 코를 뒤덮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던 노브로서는 날아가듯 증발하는 코뼈에 입을 벌리고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피가 증발하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 당사자인 노브는 이제 그걸 맡을 수도 없었다.

그는 발버둥 쳤고 미친 듯이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마법에 주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꼼짝없이 학대를 감수해야만 했다.

무제한으로 솟구치는 검은 연기는 천장까지 치솟고, 붉은 불티와 함께 닿는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

그 여파로 샹들리에가 좌우로 흔들거리다가, 결국 밑으로 떨어졌다.

영롱한 파편들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다가 노브의 머리에 닿았다.

이제 노브의 얼굴 반쪽은 검은 재가 되어 있었다.

노브의 비명은 벌렸다가 닫히는 턱에서 탈출하지도 못했다.

계속 극도의 고통이 해일처럼 덮쳤고, 피부와 근육 그리고 뼈와 눈물마저 녹여 버렸다.

“….”

부들대며 고통을 호소하던 그는 고작 그렇게 끝이었다.

세인은 일어나서 타들어 가는 노브를 보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발로 노브의 얼굴을 걷어차자, 검은 재와 함께 불티가 휘날렸다.

그게 바로 노브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자국이다.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쉽게도 여기엔 감자가 없군.”

*  *  *

한편, 뒤늦게 중앙 건물로 다가서던 병력은 최상층에서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먹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뭉클뭉클 움직이며 모습을 드러낸 연기는 문어의 발처럼 천천히 사방으로 촉수를 뻗었다가,

풍향 때문인지 여러 개의 발을 안쪽으로 구부렸다.

그 줄기들에 닿은 건물의 벽면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창가에 장식되어 있던 하얀 조각상은 썩어들어가듯 검게 퇴색되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떤 병사는 건물과 너무 가까이 서 있다가 조각상 중 하나에 맞아 사경을 헤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상에 기겁한 병사들이 일제히 뒤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의 귀로 건물의 유리창이 차례차례 깨져나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내부에서 압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점점 더 난폭한 힘이 작용하자 급속도로 벽이 무너졌다.

그 안에 숨어 있던 기둥들이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예사였다.

사람들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 도망가는지 눈치 게임을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검게 변한 건물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녹아내리는 모습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도망가야 하나?’

‘당연히 도망가야겠지. 그런데 어디로?’

그때 지진이 일어났다.

큰 지진은 아니었지만, 몸을 덜덜 떨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빌어먹을! 젠장!”

한 명의 기사가 무기를 집어 던지고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 기사의 행동이 신호탄이 되어 주었다.

군중의 몸부림을 알리는 효시인 셈이다.

달아나는 게 부질없다는 것은 도망자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성보다 공포가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흩어지고 있을 때도, 검은 연기는 코포니 내성 안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을 가두던 껍질을 깨고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성공하고야 만다.

무섭게 치솟는 검은 연기는 성을 제물 삼아, 분수대가 된 죽음의 모습 같았다.

그 죽음은 이제 허공에서 땅으로 쏟아지며 건물들을 차례차례 박살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모든 것을 태우고 녹이며 덩치를 늘려갔다.

휘몰아치는 검은 힘에 달려가던 사람이 그대로 떠올라 비명과 함께 지붕에 부딪혔다.

그 사람은 기적적으로 지붕의 끝을 잡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허공으로 날아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물속에 뛰어든 검은 연기는 물을 증발시키며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그 수증기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집어삼키고, 죽음과 뒤엉켜 짙은 검은색을 유지하는 안개가 되었다.

밀도는 낮아졌지만, 살상력은 여전했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자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무섭게 확장하는 안개에 휘말린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마치 폐에 쇳가루가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꺽꺽거리다 보면, 뒤에서 더욱 밀도 높은 죽음.

검은 진흙으로 빚어낸 듯한 불꽃이 덮쳐왔다.

그 불길은 살과 머리카락을 녹이고, 아주 잠시 뼈의 형체를 남겨두었다.

마치 인간의 형태를 희롱하듯이 말이다.

고온 속에서 마지막으로 붉게 발광하던 뼈는 곧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바깥쪽으로 도망가 보았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는 그들이 지른 불이 있었다.

대책이 없는 건 매한가지인 것이다.

지진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외성 속, 움직이고 있는 붉은 뱀의 비늘이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불 비늘이 눈부시게 번쩍이는 이유는 그만큼이나 뜨겁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른 불.

그 자체가 천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전투 때문에, 필요에 의해 지른 불이니까.

다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과라는 독 안에 갇힌 쥐였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갇힌 것이다.

뒤에서 모든 것을 먹어치우며 다가오는 검은 죽음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붉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처절한 죽음을 맛보았다.

외성 내부를 가득 채운 붉은 구렁이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들의 요사스러운 붉은 혓바닥이 날름거릴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타고, 피부가 녹아들었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비명은 덤일 뿐이다.

죽음을 피해 또 다른 죽음으로 도피하는 자들의 말로였다.

결국 끝까지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외성과 검은 소용돌이 사이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빠르게 다가온 검은 폭풍에 분쇄되었다.

사람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검은 불길은 외성에 닿아서야 진정되었다.

붉은 구렁이들을 먹어 치우는 과정에서 중화가 된 것이다.

두꺼운 외성 벽을 타고 위로 솟구친 검은 기운은, 한참을 넘실대다가 숨을 고르며 아래로 주저앉았다.

그렇게 코포니 성이 끝났다.

오늘로써 스무 살이 된 청년도, 혈기왕성한 병사와 기사들도 모두 종결을 맞이했다.

그들의 삶은 모두 끝나버렸다.

그것도 처절한 고통 속에서 말이다.

그들의 종지부가 이 땅에 남긴 것은, 고작 타다 남은 검은 재였다.

그렇게 안쪽에는 재가 가득 찼지만, 마검이 해방한 힘은 외성 밖에 있는 글리터의 사람들에게 닿지 못했다.

딱 코포니 성을 휩쓰는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세인이 내성의 중심부를 고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전처럼 힘 조절을 하지 못해 광범위한 지역을 쓸어버리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불러내는 죽음은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성질을 지녔다.

가능한 범위를 줄여 보았지만, 본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항상 힘을 쏟아내기 전에 주변 거리와 발생 면적을 신경 써야만 했다.

물론 넓게 뿌리는 힘을 축소한 대신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성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말이다.

이제 희미한 검은 안개가 형성된 지대는, 코포니 성이 있던 자리에서 계속 머물며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세인은 잿더미 위에 누워 있는 마검을 주워들었다.

그렇게 마검을 갈무리한 후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주위로 검은 쇳가루 같은 것들이 잔뜩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가 좋지 않았다.

손을 몇 번 저어 보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가 재만 남은 영역권을 빠져나오자, 앞에 잔뜩 늘어선 글리터의 사람들이 보였다.

몰려든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코포니 성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죽음의 지대 속에서 세인이 걸어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  *  *

세인을 발견한 행크와 맥이 급하게 달려왔다.

그런 그들이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세인이 물었다.

질문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에 지옥을 열었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얼굴이었다.

“드레퓨스의 잔당들은 어떻게 되었지?”

“명령대로 아침이 오자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맥의 대답에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포로는 없다. 찾는 족족 죽여라.”

글리터는 코포니성을 박살 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학살했다.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성이 함락되니 근방에서 글리터를 막을 곳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글리터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드레퓨스의 소규모 군사 시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잔혹할 정도로 살해를 벌이는 글리터를 강력하게 규탄하거나 저지할 곳은 없어 보였다.

다음 지역에 위치한 성 하나가 박살났기 때문이다.

성이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밀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닌데, 세인이 마음을 먹으니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성문이 깨지고 영주가 살해당하자, 병사들이 등 뒤를 노출하며 달아나는 모습은 이제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니었다.

글리터의 군대는 항상 거침없이 움직였고, 당연히 그 움직이는 속도가 혀를 내두를 만큼 빨랐다.

그리고 항상 엄청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는 북부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아무리 강병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금 글리터가 보이는 파격적인 행보는 남들이 보기에 경이 그 자체였다.

물론 세상이 너나 할 것 없이 놀라는 상황이지만, 드레퓨스만큼이나 놀랄 수는 없을 것이다.

드레퓨스의 사람들은 달마다 갱신되는 글리터의 접근 소식에 치를 떨면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나 드레퓨스의 승리를 점쳤겠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반전이 있었다.

글리터의 군대가 매우 잔인하며 자비심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이, 그리고 광기에 차 있다는 소문이 중부 전체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제 그들이 공포의 주체였다.

아무도 그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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