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 마지막 아침 (7)
노브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도발에, 다가오는 상대의 발소리를 귀에 담았다.
세인의 그림자가 자신의 얼굴을 뒤덮자 노브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들려져 있었다.
노브는 그걸로 세인의 목을 노렸다.
여기까지 침입했을 정도면 단검이 안 통하리란 생각은 못 하나 보다.
세인은 노브의 팔을 잡고 위로 끌어 올렸다.
노브는 장난감처럼 한 바퀴를 돌았다.
아이들이 봤다면 서커스라도 되는 양, 손뼉을 짝짝 쳤을 장면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브의 팔이 빠졌다.
그리고 딱딱한 바닥에 패대기쳐질 때 노브는 자신의 허리에서 커다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본인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뼈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쓰러진 노브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진 못했다.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노브의 실책이었다.
그러니까 안 죽여도, 반쯤은 죽여 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까진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으으음….”
노브가 앓는 신음을 낼 때 세인은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한참 뒤에 노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주나 폭언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과 초점이 매우 엇나간 말이었다.
“왜 의자에 앉지 않지?”
“사람 하나 병신으로 만들고 의자에 앉자니, 마치 의자 때문에 병신으로 만든 거 같잖아? 미안해. 그 정도로 네게 가치가 있는 의자인 줄은 몰랐어. 생일 선물로 받은 의자인가 보지?”
세인의 비아냥에 노브가 실소를 흘렸다.
좋아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분노가 극에 다다르러 터져 나오는 작은 웃음이었다.
그는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심하게 다친 탓이었다.
그로서는 오늘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오늘이라는 운명의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없는 탓은 바이칼 때문이었다.
바이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규격 외의 존재인 세인을 모르고, 오늘 일어난 일의 개요에 대해 이해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시간을 끌든, 발악하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구슬린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화가 나니 오히려 음성이 안정되었다.
“아까 처녀의 피 운운한 것은 사과하지. 자네를 격동시키려고 했어.”
그러자 세인이 노브의 몸 위에 앉았다.
노브의 입에서 ‘끙’하는 소리가 나왔을 때 세인이 대답했다.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어. 네깟 놈이 사과를 하나 안 하나 내게는 가치가 없거든. 너는 처음부터 그런 하찮은 것이었어. 그러니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말했잖아? 그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인가? 걸리적거리지 말라는 게 말이야.”
세인이 여기에 온 까닭은 노브를 노리고 온 게 아니라, 이 건물이 내성 중앙에 있고 가장 크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어쩌면 적의 우두머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멍청이도 아닌 바에야 최상층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밑에 깔린 놈을 보니, 확실히 멍청이 같아 보였다.
정작 노브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노브는 세인이 자신의 몸 위에 앉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성질 같아서는 이놈을 요절내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원래 고수하고자 했던, 멋지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계획도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지휘는커녕 걷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다 틀렸다.
그러니 지금의 그가 날려줄 수 있는 것은 비아냥과 조소뿐이었다.
패배자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이거 왜 이래? 이름도 모르는 침입자. 밖을 보라고, 지금은 아주 잘 보이겠군. 외성이 타고 있지? 거기에 있는 네 동료도 같이 타들어 가고 있어.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할까? 어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갈까, 한 번 생각해봐? 찜통의 개구리와는 비교도 안 될걸?”
노브의 처지에서 보면 갑자기 나타나 자기 일을 망친 세인이 죽일 놈이었다.
상대는 노브에게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이건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
암살 같은 짓으로 이렇게 판이 뒤집힐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뭣 같았다.
시간을 끌어도 병사들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노브를 더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들이 달려온다 해도 가문의 실력자 두 명을 죽여 버린 놈이 또 암수를 쓰지 말란 법도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일이 꼬여 버렸지?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이 노브의 화를 돋우었다.
“전에 내가 글리터의 정찰대를 잡은 적이 있었는데 말이야.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화형 시켰지.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명을 감상하며 불길에 감자를 굽게 했어. 그 감자를 사냥개에게 먹이려고 했는데, 사냥개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아니.”
“더러워서 피하더군. 코를 막고 피하더라고. 그걸로 확실해 졌어. 글리터놈들은 북부놈 중에서도 아주 더러운 놈들이야. 그놈들에게 묻은 것들은 개도 안 먹을 정도라는 소리라네. 가끔 말이야. 그렇게 사악하고 더러운 놈들과 공존한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여겨질 때가 있어. 안 그래? 마족? 지금 네 생각을 듣고 싶군. 넌 잡종이니까. 글리터에 대해서도 잘 알지 않겠어?”
그때 세인은 상대의 도발에 화가 나기보단, 밑에 깔린 이놈이 정말 장군이 맞나 싶었다.
이랬다저랬다 하고 횡설수설하는 게 장군이라기보다는 정신병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귀족치고는 너무 품위가 없어 보였다.
자기도 노브를 귀족처럼 대우하진 않았지만, 그걸 떠나 상대의 성격이 너무 변덕스러운 것 같아 보였다.
그런 세인의 생각을 모르는 노브는 계속 지껄여댔다.
“나를 죽이고 달콤한 승리에 젖는 것도 잠시야.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거든. 하지만 나는 역사 속에 남을 거야. 우리는 만년 제국을 건설할 거고. 대륙을 지배할 거야. 하지만 북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그럼 누가 승자인가?”
“….”
“나야. 내가 승자라고. 상상해봐. 얼마나 많은 후세가 나를 기억하고 우러러볼까? 나를 위한 시. 나를 위한 소설. 내 무덤에 줄을 잇는 참배객들. 그들은 나를 기리며 감동에 젖겠지.”
세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차라리 여기에 들어오지 말 걸 그랬다. 두 명이 막고 있길래, 난 또 안에 뭐가 있나 해서 들어와 봤더니 수다쟁이가 여기 앉아 있군. 미안하다. 난 그냥 의자에 앉고 싶었어. 전망이 좋더라고.”
그의 말에 밑에 깔린 노브가 웃었다.
“그래.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시간의 조롱뿐이야. 나를 죽이고 네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내게 수치를 줬다고. 하지만 이 전쟁에서 누가 승리자지? 역사의 위인으로 남을 나? 아니면 지도에서 사라지는 북부의 나라?”
그때 깔고 앉아 있는 세인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노브의 얼굴을 보았다.
“왜 네가 역사 속에서 살아 있으리라 확신하지?”
“….”
“그런 건 존경받아 마땅한 왕들이나 누리는 것이야. 그 밑에 위인들도 왕들의 허락이 있어야 역사의 한 페이지에 안착한다. 그런데 네가 왜?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세인은 손을 뻗어 노브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노브가 동물처럼 몸부림을 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세인의 힘 때문이라기보다는 몸 반쪽이 마비된 상태에서 무리가 왔기 때문이다.
목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게 노브의 현주소였다.
“고작 전투 몇 번? 아서라. 그 나이를 먹고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 네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이유를 알려줄까?”
“헛소리하지 마라.”
“너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지? 드레퓨스에는 나를 조사한 자료가 있어. 바이칼이 적어도 너를 쓸만한 장기말 정도로 생각했다면, 너는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야 해. 그런데 네가 대장군이라고? 아서라. 너는 그런 재목이 아니야. 커다란 광대 정도라면 잘 어울리겠다.”
세인은 노브의 머리카락을 쥐고, 억지로 자신의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노브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지나가는 걸인에게 말을 걸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대한 마음으로 지금의 너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정도의 관용이 아니라면 네까짓 거와 왜 말을 섞겠나? 그 정도로 너와의 대화는 하찮은 일이야. 앞으로 드레퓨스의 문화가 말살되니 네 역사적인 꿈은 물거품이 된다는 훈계를 해줄 필요도 없어. 이봐, 나이만 먹은 장군. 내게 말해봐라.”
세인이 개미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노브를 비웃었다.
“네가 네 조국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이바지 한 게 뭐냐? 말을 들어보니 너는 왕에게 충성하는 것 같지도 않더군. 여기 와서 의자에 집착하는 널 보니 신비롭기까지 했다. 역사를 위해 무엇을 바칠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고작 자신의 자리를 찾기 바쁜 위인이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
“내 싸구려 자비에 기대어 숨 쉬고 말하는 놈아. 이야기해 봐라. 하다못해 네 조국도 너를 쓰레기 소품 취급하는데, 네가 지금껏 증명한 게 뭐냐?”
노브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반박할 거리가 없다기보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입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드레퓨스의 수도에 가면 꽤 존경받는 위인이었다.
고루한 학자들이나 군인 파벌이 만든 지지 세력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내 눈앞에 보이는 저 불놀이? 저게 네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한 일이라면 나는 너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네 꼴을 보니 저건 그냥 사적인 불놀이 같은데. 또 이건 뭐야? 이건 뭐냐고?”
노브의 턱을 잡고 흔들자, 손에서 묻어나는 기름기에 세인이 혀를 찼다.
“그 와중에 기름진 걸 먹었어? 참 너도 가지가지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노브의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세인이 손을 거두었을 때 노브의 눈에서 분루가 흘러내렸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네 녀석을 죽여 버리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만은 파멸시킬 테다. 내가 죽어서라도 너를….”
그러나 저주에 가까운 노브의 말은 아무런 효력도 없었다.
상대가 깨끗이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세인은 창문 밖으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았다.
어둠을 밀어낸 여명이 창문 표면을 한가득 뒤덮었다.
그러기도 잠시.
커다란 창문을 타고 넘어온 햇빛은 점점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하여 세인의 발치에 이르고, 방의 흑백을 뚜렷하게 갈라 그림자의 존재감을 더욱 깊고 짙게 부각했다.
동시에 세인의 얼굴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브가 계속 밑에서 뭐라고 지껄였지만, 여전히 세인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인이 보기에 이런 놈들은 세상에서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이런 놈들의 공통점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훌쩍 다가온 아침이 그의 얼굴과 목 아래를 뒤덮었을 때, 비로소 세인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하고 나는 소리에 노브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어쩌면 목이 베일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그건 너무 긍정적인 바람이었다.
세인은 노브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의 머리 옆에 마검을 올려놓았다.
툭.
그러자 얼굴을 움직이는 노브의 볼 위에서 마검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