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 마지막 아침 (6)
노브가 있는 곳은 주변의 건물 중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었다.
그래서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내성 위쪽에서 살펴보면 정확히 원의 중앙에 있기도 하다.
지금 세인의 앞에 버티고 서있는 건물이 바로 거기였다.
세인은 지붕이 끝난 지점에서 거침없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선을 그리며 쏘아진 그의 몸은 건물의 유리창을 부수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도 소리지만 깨끗하고 하얀 양털 카펫 위에 유리 조각들이 잔뜩 튀었다.
그가 비록 초청받지 못한 손님이라 할지라도 이래서야 평소 청소하는 사람들에게 실례다.
세인이 착지한 복도는 좌우가 아주 넓었고 특히 조명이 밝았다.
양옆을 살펴본 그는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옆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 있는 계단을 밟았다.
계단이 지름길처럼 위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십여 분 동안은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멀리에서 빨랫감을 들고 움직이는 하녀를 발견했지만, 상대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건 하녀에게 있어 불행도 다행도 아니었다.
결국 변하는 건 없으니까 말이다.
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머지않아 그는 대리석으로 만든 층계를 만났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 달리 아주 고급스러웠고 계단의 칸도 넓었다.
난간도 고급 가죽으로 싸인 모습이었다.
이 계단이 그를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기대해 봐도 좋을 호화스러움이었다.
대리석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보니 난간을 붙잡은 손들이 보였다.
그들은 세인의 위치를 파악한 듯, 머뭇거림 없이 발소리만 시끄럽게 울리며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위쪽에서도 드레퓨스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체스트 메일을 걸친 병사들은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창대를 보아하니 보통 나무로 만든 건 아닌 것 같다.
그 뒤의 기사들도 무장 상태가 아주 좋았다.
“활은 쏘지 마라! 샹들리에에 맞으면 안 된다!”
제정신 아닌 소리를 내뱉은 기사는 곧이어 병사들보고 공격하라고 주문했다.
기사의 명령에 따라 창을 든 병사들이 달려와 세인을 찔러댔다.
그러나 세인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최상층에 도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해 오는 창엔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던져 병사들을 밀어붙였다.
병사들 쪽에서는 아주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창이 통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전진하는 상대의 힘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어? 어어?”
“으악!”
세인에게 떠밀린 병사들이 난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추락의 끝은 당연히 섬뜩한 파육음이었다.
때론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과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의 눈이, 찰나지만 서로 마주칠 때도 있었다.
어디에서 쏟아져 나오는지 인원은 자꾸 충원되었다.
세인이 밀고 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발을 잡고 늘어지는 병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힘든 건 아니고 상당히 걸리적거렸다.
밟아 죽이거나 멱살을 잡고 난간 옆으로 던져 버리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결국, 앞뒤로 꽉꽉 찬 사람들을 보며 세인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검을 뽑았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마검이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검이 멈췄을 때 거짓말처럼 주위에 정적이 찾아왔다.
끼익.
이건 잘린 난간에서 들려오는 쇳소리였다.
동시에 두껍고 단단한 대리석 계단 한 귀퉁이도 아주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세인은 이제 아무런 방해도 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피 때문에 바닥이 질퍽해지는 것은 감수해야 했지만 말이다.
다시 사람들이 나타나면 마검이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면 피가 튈지언정, 걸리적거리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그렇게 거침없이 홀까지 올라온 그는 신발에 묻은 피를 양탄자에 비벼 닦아냈다.
그리고 뒤늦게 고개를 들어보니, 전방에 그를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넌 누구냐?”
선임기사의 물음에 세인이 답했다.
“너는 정말 내 정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고 윗사람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묻는 거겠지만, 너희들은 윗사람에게 갈 수 없다.”
대답하기 싫다는 말을 참 길게도 한 세인은, 다시 한번 마검을 들어 올렸다.
아주 느긋한 속도였다.
그리고 그 속도 그대로 다시 검이 움직인다.
호화로운 샹들리에 아래에서 드러난 칠흑의 검날이 좌우로 한 번씩 뒤집혔다.
그렇게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석궁의 화살을 튕겨낸 그가, 마지막으로 검신을 움직여 이마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조차 튕겨내었다.
진형의 가장 뒤에 있는 기사는 아주 노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지금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발사된 화살을 너무 가볍게 막아내니 걱정스러운 마음부터 앞섰다.
시간차를 노린 마지막 화살도 너무나도 쉽게 튕겨낸 건 정말 의외였다.
‘암살자라고 하기엔 너무 수준이 높은데.’
“방심하지 말고 공격해라! 활을 내리고 방패병부터!”
세인은 벽처럼 방패를 세우고 살금살금 다가오는 적들을 보았다.
그리고 마검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아홉 명의 방패병이 머리를 잃었다.
원래는 세인의 시야를 가려야 하는 방패도 반이나 잘려나가 땅에 나뒹굴었다.
그 조각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세인의 발에 밟혔다.
검을 휘두르자마자 그가 그대로 전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상태로 검을 찔러 마지막 열 번째 방패병의 목숨을 꿰뚫었다.
방패병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검이 뽑히자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강철을 덧댄 방패를 뚫고 들어온 검이라면 애초에 방패병이란 의미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열 번째 방패병의 무릎이 땅에 닿았을 때, 세인의 망토가 그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망토는 점점 빨리 움직이다가 허공에 붕 하고 뜨며 한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원을 그린 움직임이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역방향으로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았다.
망토가 바닥 위로 천천히 가라앉았을 때, 그 주변을 기사들이 쓰러지는 소리로 가득 메웠다.
잠시 무릎을 굽혔던 세인은 크게 검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하얀 벽에 걸려있던 고급스러운 액자 위로 핏방울이 사선을 그리며 튀었다.
명화에 묻은 피가 안에 들어 있는 귀부인의 몸을 가로질러 치마 아래로 떨어졌을 때, 석궁을 든 다섯 명이 명을 달리했다.
세인의 마검은 거침없이 기사들 사이를 누볐다.
그의 연환 동작은 물이 흐르는 듯 부드러웠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끝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이 맺혀 있었다.
그 힘은 사람의 두개골 따위는 우습게 부숴버렸다.
무려 철을 자르고 관통하는 힘이었다.
뼈라고 해서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한 명의 기사만을 남겨놓고 모조리 죽여 버린 세인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서 있는 마지막 기사 앞에서 말했다.
“검을 뽑아라.”
아직까지 그만이 손에 무기를 들지 않았었다.
기사는 장갑을 벗어 축축하게 변해 있는 자신의 이마를 닦아낸 후, 세인을 향해 사선으로 비껴 섰다.
그리고 맨손을 검 자루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하고서는, 장갑을 옆으로 내던졌다.
긴장감이 역력한 기사는 검을 반쯤 뽑아냈다.
그리고 마주 선 세인의 차가운 눈을 보고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이 검을 완전히 뽑자마자, 자신을 내리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단칼에 죽는다.
“이렇게 하자.”
이미 피 냄새로 가득 찬 홀 안에서, 기사는 검을 반쯤 뽑은 상태 그대로 세인에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피나는 수련을 거쳐 이 자리에 올라왔다. 네 실력은 알겠다. 약한 자가 죽는 게 이상한 법칙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껏 고련을 해온 내 과거가 아깝고 미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너도 검을 수련한 자가 아닌가? 비록 암살같이 더러운 짓을 하고 있지만 분명 기사겠지? 네 공격을 열 번 막아내겠다. 그렇게 내 실력을 입증해 보이마. 그럼으로서 내 가치를 증명한다면 같은 검사로서, 기사로서 나를 살려다오. 맹세하건대 그렇게만 해준다면 다시는 북부에 검을 들이밀지 않겠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내 제안이 어떠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움직임과 궤를 달리하는 속도로 마검을 휘둘렀다.
그 일격에 거짓말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기사의 머리가 날아갔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목이 날아간 몸은 아직도 서 있는 상태였다.
어깨 위의 물건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말이다.
세인은 그 시체를 지나쳐 가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알겠다.”
* * *
노브는 테라스에서 물러나 방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그는 푹신하고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그가 목매달아 죽인 성주의 의자다.
그를 보필하는 사람 중에는 굉장한 실력을 갖춘 검사가 둘이나 있었다.
둘은 군단 소속이 아니라 가문소속으로 노브의 명령 외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둘 다 자존심이 아주 강했는데, 어떤 예감을 느꼈는지 노브는 둘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평소와 다르게 굴었던 것이다.
“같이 나가보게.”
그러자 두 명의 검사는 몹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한 명만 나가도 충분한데 같이 나가서 밖을 지켜달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연장선엔 적이 나타나면 같이 상대하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게 둘의 기분을 매우 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노브의 얼굴은 아주 단호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분명 여기에서 죽겠지만 그게 오늘은 절대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 이번에 확실하게 나를 지켜야 해. 평소에 내가 자네 둘의 가족에게 해준 걸 잊지 않았겠지?”
어지간하면 그동안 해준 걸 들먹이지 않는 노브인데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둘의 입장에서는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두 명의 검사는 노브를 떠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까지 침입할 수 없겠지만 온다 해도 놈은 죽은 목숨입니다.”
“안전할 테니 옆에 붙어 있는 침실로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처리하는 동안 눈이라도 붙여 두십시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둘이 떠나갔다.
그리고 노브는 넓은 방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의자의 손 걸이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그 상태로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긴장감을 풀려고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문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몇 분이 지났다.
드디어 밖에서 미약한 소음이 났다.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노브는 팔걸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문 쪽을 노려보는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문틈으로 드러난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였다.
그 남자의 뒤로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발이 하나 보였다.
밖에 내보냈던 두 명의 검사 중 누구의 발일까?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천천히 걸어와 노브의 앞에 섰다.
노브는 그의 검에 묻은 피를 보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그러자 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그 후에 그가 내놓은 답은 간단명료했다.
“걸어서?”
노브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세인은 마검을 갈무리했다.
그러면서 눈앞의 남자를 관찰했다.
꽤 강단 있게 생긴 남자였고 고급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설마 눈앞의 인물이 코포니 성의 총책임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자리에 있는 자라면 이미 지하로 피신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는 자라면 최소한 멍청하게 여기서 버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앞에 있는 자는 그런 사람의 심복 정도가 되겠지.
그런 것 치고는 꽤 강단 있어 보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생각은 수초도 지나지 않아 수정되었다.
“나는 이 성의 주인이자, 드레퓨스의 대장군인 노브라고 한다. 너는 누구인가? 정체를 밝혀라.”
세인은 정체를 밝힌 노브 앞에서 자신의 볼을 긁적이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손에서 검은 장갑을 천천히 벗겨냈다.
그걸 노브의 발치에 던져 놓았는데, 그렇게 땅에 닿은 장갑은 ‘철썩’하는 찰진 소리를 냈다.
피에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노브는 그 물건을 흉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지금의 그는 기백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상태였다.
세인은 계속 하나의 물건을 관찰하듯, 피에 젖은 장갑을 바라보는 노브를 보았다.
작은 공포에 대한 노브의 반응을 살펴보려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이 노브에게는 너무나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노브에게 있어 거슬리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세인의 몸에서는 견디기 버거울 정도의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노브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로라하는 여러 인물을 만나보았다.
그중에서는 바이칼 같은 황제도 있었다.
그런 황제 앞에서도 할 말을 다 했던 노브다.
그런데 왜인지 세인 앞에서는 점점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상대가 가진 무력이 엄청나서일까?
노브는 역사 속의 인물이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자였다.
고작 무력이 차이로는 위축감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노브가 세인에게서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면, 세인은 반대로 지금의 노브에게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그의 감상으로는 그냥 장군이면 딱 이럴 것 같은 늙은이였다.
정말 평범해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흥미도, 필요 이상의 적개심도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최근에 노브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 있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면 세인이라도 그 상황에서는 노브처럼 굴었을 것이다.
그라도 노브 입장에서는 매복을 준비하고 화공을 펼쳤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세인 또한 미소스에서 자신의 군대가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니 현재의 노브에게 처절한 원한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다시 한번 묻지. 난 노브라고 한다. 넌 누구냐?”
질문을 던진 노브는 인내심 있게 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 끝에 나온 세인의 말은 그의 의문을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그래. 노브. 자리 좀 비켜주겠나?”
노브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서 있는 세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세인은 손을 옆으로 까닥여 보였다.
마치 너에게는 볼일 없으니 자리를 내놓으라는 소리 같았다.
“나보고 여기에서 일어나라고?”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것 같아서. 거기에 앉아 기다려야겠어. 그러니 옆에 앉아 있든지, 아니면 저기 옆에 보이는 침실로 가든지. 네 마음대로 해.”
“자네는 의자에 앉고 나는 바닥에 앉으라고? 게다가 손님 주제에 말이 너무 짧군. 예의가 없어.”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야. 하지만 국적이 다르니 내가 용서하지. 게다가 지금 그런 걸 따져봤자, 지금 이 시점에서는 무가치하니까. 잠깐 서로 방해하지 않는 거로 하자고. 내가 널 단칼에 죽인다면 내 부하들에 대한 존중이 아니야. 그렇다고 고문하자니 딱히 캐낼 것도 없어 보여. 왜냐면 넌 멍청하거든.”
그러자 노브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노브는 머리를 맹렬히 굴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끈다면 몇 명이나 여기에 도착할까?
그들이 두 명의 검사로도 막지 못한 암살자를 해치울 수 있을까?
밑의 기사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 등으로 그의 머릿속은 포화 상태였다.
그는 눈앞의 남자가 드러난 루트를 통해 여기로 도달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실력으로 당당히 가문의 검사 둘을 해치웠다고도 믿고 싶지 않았다.
독을 썼든 무슨 짓을 했든, 속임수를 써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여기에서 물러날 수 없다. 그러니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세인은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십 미터 거리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벽면 한쪽을 통째로 개조해 유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넓은 방은 전망이 너무 좋았다.
노브는 일어나는 대신 세인의 뒤통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자네 같은 마족들은 밤마다 처녀의 피를 빨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래서 피를 빨러 국경을 침범하고 여기까지 기어 왔나? 고작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소리가. 내 목숨을 위협하고, 내게 수치를 주기 위해 의자에서 비켜달라고?”
“….”
“이보게. 더러운 암살자. 지금 여기에서 벌레만큼이나 역겨운 존재는 바로 자네야. 칼을 들고 으스대며 들어와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트집 잡기로군. 나는 드레퓨스의 대장군 노브다.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에서 죽음을 선택하겠다. 더는 나를 희롱하지 말고 죽여라.”
그러면서도 노브는 상대가 자신을 쉽게 죽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애당초 그럴 것이었다면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죽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과감하게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