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68화 (268/307)

# 268

& 마지막 아침 (5)

노브는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전망 좋은 곳에서 하얀 천을 두른 식탁에 앉아, 기름기 있는 스테이크를 잘라내어 입에 넣었다.

스테이크 조각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아주 느렸다.

씹는 것도 천천히 꼭꼭 씹었다.

그건 그가 건강을 생각하기 보다는, 화재를 감상하며 일부러 늦게 식사의 템포를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되겠지.”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지만, 노브는 그런대로 만족했다.

결사대 놈들이 일을 망치는 거랑 자신이 노력하다가 일이 망쳐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남이 끼어들어 문제가 되는 건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감이 드는 일이고, 자신이 노력해서 그르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바로 그의 기준이다.

노브는 와인이 든 잔을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면서 불타는 외성의 향연을 구경했다.

그 너머 시끄러워진 글리터의 주둔지도 눈에 담았다.

“나머지 놈들은 언제 도착할까?”

노브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이유는 북부의 다른 나라들이 합류해서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장렬히 전사하면, 드레퓨스의 수도에 노브라는 이름이 오르내릴 것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될 거고 말이다.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끝까지 의기를 잃지 않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장군.

그게 바로 노브가 획득하게 될 명예였다.

어차피 정예병들은 내성에 다 모아놓은 상태였다.

최후의 일전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제각기 맡은 위치에서 북부의 지원군이 몰려올 때까지 수성만 해주면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노브는 갑자기 일어난 소음에 눈을 돌렸다.

멀리 불타는 외성 쪽에서 난 소리 같았다.

“뭐지?”

노브가 눈가를 좁혔지만, 소리가 난 쪽은 거리가 제법 되어 식별이 어려웠다.

그래서 세인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돌조각들이 흩날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자 연기부터 탈출해 하늘로 향했다.

검은 연기를 휘저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세인이었다.

질리언을 둘러메고 있는 그는, 불타오르는 외성에서 멀어지기 위해 앞으로 한참 걸어갔다.

그러면서 조금씩 검은 갑옷을 해제했다.

지금의 그는 불타는 외성을 그대로 통과해 내성 앞에 도착한 것이었다.

화염에 구애받지 않는 그이니까 이런 행동도 할 수 있었다.

내성으로 가는 도중에 질리언을 발견했고 그를 구출한 셈도 된 것이다.

외성과 내성은 분리되어 몇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원래 빈민가가 있어야 했지만, 노브가 싹 밀어버린 덕분에 텅 빈 공터였다.

불타오르는 건물에서 충분히 떨어졌다 싶었을 때, 세인은 질리언을 땅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질리언의 투구 덮개를 잡고 뜯어냈다.

아주 빨리 뜯어냈기 때문에 질리언의 목은 잠깐 위쪽으로 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세인의 손에는 구겨진 덮개가 들려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멀리 던져 버렸다.

질리언의 머리 위에 귀를 잠시 대고,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세인은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질리언을 남겨놓고 걸어가는 그는 코포니의 내성을 눈에 담았다.

외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진 내성은 해자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넓진 않았지만, 아주 높고 뾰족했다.

밤하늘 아래 서 있는 내성 곳곳에는 빛을 발하는 창문이 달려 있었다.

물론 성벽 위에 자리 잡은 창이었다.

빛을 머금은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걷던 그가, 갑자기 한쪽 팔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푸드득 소리가 났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새는, 세인의 팔에 내려앉기 전에 검은 깃털 몇 개를 그의 어깨 위에 떨어뜨려 놓았다.

세인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겨 치워냈다.

“코포니 성의 성주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팠군. 고립된 무대를 만들어 줬잖아.”

까마귀가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간단한 일이었다.

세인은 정찰부대를 보내는 대신, 까마귀에게 부탁해 계곡 쪽을 보고 와달라고 말했다.

정찰부대를 보내면 귀환 자체를 걱정해야 하지만 까마귀는 화살만 조심하면 되었다.

계곡을 보고 온 까마귀는 세인에게 사실을 전해 주었다.

계곡 안에 병사들이 득실대고 있다고 말이다.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걷는 세인의 팔 위에서 까마귀가 물어보았다.

“미래가 보여?”

“간혹 아주 먼 미래가 손에 잡힐 듯 보일 때가 있어. 그런데 그러다가도 금세 안개처럼 모호해질 때가 많아.”

빈센트의 아버지에 의해 진정한 각성을 이룬 후 세인은 미래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주 먼 미래였다.

하지만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종종 바뀌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초기 라이트닝 블러드는 스포일러들이었다.

스포일러들은 제각각 미래를 본다.

세인은 전과 달리 완전한 라이트닝 블러드가 되었으니 그런 능력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까마귀는 은근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그 미래 끝에 내가 있나?”

“아니.”

딱 잘라 말하는 세인 옆에서 까마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그 미래는 틀린 미래야. 다른 방향을 추천한다. 네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더듬는 종결 끝에 내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이상한 말을 하는 까마귀보다도, 세인은 정말 궁금한 것을 그에게 묻고 싶었다.

“마지막 테러 로드인 마라에 대해서 알아?”

“그의 추종자들은 많이 보았어. 그리고 가끔 마라에 대해서 보았다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건 그림자 같은 잔재였지.”

“루시드는 해결책이 있어. 하지만 마지막 테러 로드는 오리무중이야. 적을 알아야 준비를 하고 이기지. 질 수 없는 싸움이니까. 그게 가장 고민이다. 그의 실체를 보고. 미래로 연결시킨다면, 결국 그게 모두를 위한 궁극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해.”

세인은 걷고 있었으니까, 그의 팔은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까마귀도 조금씩 흔들렸다.

까마귀는 뚜렷한 대답 없이, 그저 조용히 성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분명 까마귀 자신이 흔들리는 것이지만, 까마귀의 시각에서는 성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까마귀는 그걸 보며 앞으로 펼쳐질 성의 운명 같다고 생각했다.

“마라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것도 없어?”

“아주 조금 있지만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짐작으로 풀어갈 일은 아니지.”

“그래.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짐작 가는 게 있다.”

코포니의 내성이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오자 까마귀는 작별 인사 대신 이렇게 중얼거렸다.

“잊지 마라. 네가 만들어 가는 운명 끝에 내가 앉아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던 거였어.”

그리고 까마귀가 날았다.

힘껏 날갯짓한 까마귀는 세인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외성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피해, 구름 아래를 계속 날았다.

불을 밝힌 글리터 진영지를 떠나니 패배한 드레퓨스의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야말로 개미 떼처럼 흩어져 있었다.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까마귀는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세인에 대해 생각하기 바빴다.

‘그와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제야 나는 속 후련히 동생과 재회할 수 있겠지.’

그렇게 계속 날아가 사흘이 지나 다시 밤이 찾아오고, 어두운 평원에 불을 밝힌 점 몇 개가 보였다.

정찰 부대였다.

그 한참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원 한쪽을 빛의 강으로 만들 정도로, 아주 많은 수였다.

그들의 정체는 북쪽에서 출발한 군대였다.

여러 나라에서 드레퓨스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이다.

글리터보다 굼떴지만 언젠가는 합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군대를 자세히 살펴보려 낮게 활공하던 까마귀는 잠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몸을 뒤집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냈다.

누가 쏘았나 하고 보니, 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붉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까마귀를 발견하고는 심심풀이로 활을 쏘아본 것 같았다.

전투가 없으니 적적해서였을까.

화살을 쏜 사람을 노려본 까마귀는 더 높게 떠올라 선회를 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붉은 두건을 눌러쓴 남자는 다시 위로 올렸던 활을 내렸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너무 활쏘기를 게을리했더니 실력이 많이 줄었군.”

전 같았으면 백발백중이었을 텐데 말이다.

*  *  *

날아간 까마귀를 보던 세인은 코포니 성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직까지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없었다.

세인은 아무런 방해 없이 내성 주위에 있는 해자 앞에 섰다.

주위에서 강은 발견 못 했는데 지하수를 끌어온 걸까?

수면 위에는 마름꽃과 연꽃 부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색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비록 밤이었지만 물에 잠겨 있는 보라색의 줄기들이 아주 잘 보였다.

그물처럼 펼쳐진 줄기가 한 가득이었다.

끝은 더 깊고 어두운 물속으로 잠겨있었는데, 어쩌면 바닥까지 뒤덮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인은 돌을 주워들어 해자에 던져 보았다.

그러자 물속에서 무수한 녹색의 점들이 생겨났다.

점의 정체는 녹색 빛을 발하는 개구리 눈이었다.

울지도 않는 개구리들은 강한 독성을 가진 놈들로, 집단생활을 하기에 수천 마리는 가뿐하게 넘어가는 놈들이다.

이 개구리의 영향을 받아 식물들도 독성을 띤 것 같았다.

세인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개구리들이 잔뜩 있는 곳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세인은 깜박임도 없이 계속 자신을 주시하는 개구리들에게서 잠깐 멀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가다가 발을 굴렀다.

그의 몸이 수면 위를 날았고, 두꺼운 성벽이 급속도로 다가왔다.

세인은 팔을 내밀어 성벽에 박아 넣었다.

쿵!

돌조각과 먼지가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며 수면에 동그란 파문을 만든다.

성벽에 팔을 박아넣은 세인은 다른 쪽 팔도 움직였다.

그렇게 번갈아 박아 넣으며 위로 이동을 하니 적들도 그의 침입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돌과 화살.

심지어 뜨거운 기름 물까지 세인의 정수리를 때렸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팔을 움직여 위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위에서 보면 자신이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갑자기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웃음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는 지금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길이었다.

꾸준히 올라가자 왁자지껄한 성곽이 가까워졌다.

위에서 세인을 비춰보려고 했는지, 들고 있던 횃불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진 횃불은 물에 닿아 피시식 거리는 소리를 냈다.

적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지만, 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발은 성벽 위를 밟았다.

세인은 잠시 눈을 감고 성벽 위에서 노니는 바람을 음미했다.

그런 여유로운 세인의 모습에, 드레퓨스의 병사들은 기가 질린 듯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바람의 도움을 받아 치미는 살기를 가라앉힌 세인이 눈을 뜨자, 공포가 역력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외성의 불길은 수그러들 줄 몰랐고, 그 너머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이었다.

오늘 밤은 모두에게 있어 너무나 긴 밤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

“엇! 도망간다. 쫓아라!”

“잡아! 쫓아가!”

그때까지 감히 손댈 생각을 못하고 있던 병사들은 상대가 달아나자 저절로 쫓게 되었다.

참 묘한 게 사람의 심리였다.

성벽 위에서 뛰어내린 세인은 그대로 5층짜리 건물 지붕 위로 착지했다.

그의 발이 지붕에 박히자.

일순간 와르르하고 부서져 내렸지만, 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고 높은 지붕들은 중심부로 이어져 있었다.

지붕의 크기나 높이가 너무 균일해서 다리나 마찬가지인 상태인 걸 보면, 건물들을 설계할 때 건축 허가관이 전체적인 균형과 미관을 많이 고려한 것 같았다.

건물 높이나 지붕 양식을 통일시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세인이 지붕에 올라섰을 때부터 끝장나는 조짐을 보였다.

그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부서진 지붕 조각들이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지붕 아래로 잔뜩 몰려드는 사람들을 본 그는, 거기에 신경을 낭비하지 않고 발길을 앞으로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성벽 위에서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던 사람 중 몇 명이 세인을 따라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중 두명이 지붕에 부딪혔다가 밑으로 떨어졌다.

겁도 없는 행동의 대가였다.

그러자 밑에 몰려있던 인파들이 흩어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턱을 맞고 한 바퀴를 돌며 아래로 떨어지는 동료 옆에서 유일하게 지붕에 매달린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지붕에 착지하는 건 성공했는데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성벽과 지붕과의 높이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의욕만 앞서 앞뒤와 위아래를 재지 않고 세인을 따라 무심코 뛰어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병사는 자신의 팔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은 다리가 부러졌을 때부터 땀범벅이었다.

‘이제 난 죽었다.’

5층 높이에서 떨어지면 박살 난 계란 꼴이 될 것이다.

먼저 저승에 간 그의 전우들이 그걸 충분히 증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들을 뒤따라가야 할 판이었다.

지금은 간신히 매달려 있는 상태였고 점점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상반신을 허리 비슷한 위치까지 위로 올렸다 쳐도 지붕 위로 완전히 올라가지 못할 판이었다.

지붕 위로 완전히 올라가려면 다리를 걸고 힘을 받아야 할 텐데, 지금은 어차피 부러진 다리를 걸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 모든 생각이 불과 몇 초 사이에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론은 꼼짝없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병사는 울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울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죽음 직전에서는 창피함이란 휘발성이 강했다.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끅끅거렸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추락사라니.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추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때 지붕 위에서 세인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

아주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인은 손을 내밀어 병사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힘 한번 들이지 않고 병사를 지붕 위로 올려놓았다.

세인의 도움을 받아 죽기 직전에 목숨을 건진 병사는 지붕 위에서 대자로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아까만큼이나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목숨을 살려준 건 고마운데 적이니까 고맙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고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세인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방금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그런 행동을 그만두고 갑자기 병사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물었다.

“몇 살이지?”

“올해 19살입니다! 아니 그… 그런데 내일이 제 생일이니까! 그러니까! 내일이 되면! 해가 떠오르면 스무 살이 됩니다!”

이렇게 보니 죽다 살아난 청년은 순수하고 좀 바보 같았다.

고통에 약간 얼굴을 찡그린 그는 묻지 않은 말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병사로서의 의무감과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적을 죽여야 한다는 책임감.

목숨의 은인에 대한 고마움이 범벅된 얼굴을 하고서 계속 떠들어댔다.

과도한 흥분 상태로 인해 살짝 맛이 간 것 같았다.

그래도 차라리 그건 배은망덕한 것보다는 나았다.

사실 아무리 드레퓨스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지만, 그중에서 찾아보면 정상인 인간이 왜 없겠는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드넓은 영토 속에서는 분명 멀쩡한 사람, 본의 아니게 전쟁에 휩쓸려 무기를 든 사람들도 아주 많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을 일일이 가려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과 몬스터를 가려내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개개인을 파악하고 골라낼 수 있을까?

평소에도 힘든 노릇인데 전쟁터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세인은 병사의 맑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려 멀리 불타오르고 있는 외성을 보았다.

불타는 외성은 밖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안을 넘볼 수 없는 울타리였고,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어쩌면 감옥 역할을 했다.

그러니 도망가라고 충고할 수도 없었다.

그걸 새삼 인지한 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곧 스무 살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때 지붕 밑으로 화살이 날아와 툭툭 치고 돌아갔다.

성벽 위에서도 화살을 날리는 것 같았지만, 지붕의 경사 때문에 목표물을 맞히는 게 수월해 보이지 않았다.

세인은 지붕 위에 널브러져 있는 병사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병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정말 감사합니다!”

세인은 발걸음을 떼며 무겁게 대답했다.

“너는 곧 죽을 거야. 그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어. 그동안 네가 떠올리고 싶은 것을 실컷 떠올려 봐. 그게 바로 네게 허락된 마지막 선물이다.”

적대감 서린 말이나 저주라고 하기엔, 구태여 목숨을 살려놓고 저런 말을 내뱉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상대의 어조도 분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 무감정이었고 아주 평온했다.

마치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읊어주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병사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의아함을 느낀다.

‘다리가 부러졌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데?’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세인은 지붕 위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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