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67화 (267/307)

# 267

& 마지막 아침 (4)

처음에 세인은 불이 난 곳만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몰았다.

멀리에서 불타오르는 건물은 붉은빛을 거침없이 내보였다.

화염이 잉태한 검은 연기는 무럭무럭 피어올라 하늘 한쪽을 검게 가릴 정도였다.

아직 거리가 꽤 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타오르는 외성은 세인의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저 정도 화재라면 안에 갇힌 사람이 있다 한들 쉽게 빼낼 수 있을까가 의문이었다.

더구나 쉽게 꺼질 불로도 안 보인다.

착잡한 세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탄 말은 달빛에 반사된 하얀 길을 따라 시원하고 힘차게 달렸다.

높게 세운 천막과 그 주변으로 서 있는 사람들이 그런 말의 옆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내달리던 세인은 갑자기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하늘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뒤늦게 따라온 정적이 그의 주변에 내려앉아 가빠진 숨을 골랐다.

“….”

시간이 흘러 다시 출발한 세인은 어느새 불이 난 곳과 가까워졌다.

그러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물통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들것에 실려 나오는 부상자들에게 쏟아붓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말에서 내린 세인은 급조한 들것에 실린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 먹인 천으로 덮여 있는 부상자는 그게 무겁다며 치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헐떡이며 고통을 호소했다.

“죽여줘! 제발 죽여 달라고!”

“진정해! 치료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거야. 조금만 참아!”

동료들이 달라붙어 몸부림치는 부상자의 팔다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생각보다 저항이 심했다.

결국 화상을 입은 남자는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울부짖었다.

동료들이 그에게 다시 다가가 제지하려 했을 때였다.

빠른 속도로 걸어온 세인이 화상을 입은 남자의 목을 내리쳤다.

“이… 이게 무슨?”

얼굴에 피가 튀는 봉변을 당한 병사들 사이에서 세인이 말했다.

“수습 중인 책임자에게 가서 전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화상을 입은 자는 죽이라고 말이야. 그게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다.”

말을 끝마친 세인은 몸통과 분리된 머리를 지나쳐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약간 멍해진 상태로 그런 세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망설이는 것조차 사치였다.

얼굴에서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은 한 명의 남자가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자, 동료는 바위처럼 굳어진 얼굴로 끄덕였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책임자에게 갈 것도 없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몇 분이 몇 시간 같을 것이다.

이제, 죽여달라는 호소가 가득한 이곳에서 오늘 밤을 넘길 수 있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그때 외성의 한 부분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육중한 덩어리를 바닥에 토해 놓았다.

한껏 달구어진 바위는 뜨겁고 시커먼 연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피해!”

그 바람에 놀라서 뒤로 쓰러진 월터가 악을 쓰며 외쳤다.

한 박자 늦게 쓰러진 그는 앉은 상태로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계속 뒤로 이동했는데, 남이 보기엔 그것이 그렇게 추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커다란 충격을 받아 극도의 정서불안 상태가 된 듯싶었다.

유난히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이 그걸 뒷받침해 주었다.

이윽고 자신만 유난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머쓱해진 표정의 그가 얼굴에 잔뜩 묻은 숯검댕이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월터의 옆에서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바로 세인이었다.

기겁한 월터가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기 전에 세인이 먼저 그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황망한 마음에 뭔가 말하려는 월터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세인은 그렇게 자신을 발견하고 허리를 깊게 숙이는 힐다에게로 다가갔다.

“많이 말려들었나?”

“예.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주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많았습니다. 정확한 피해는 오늘 낮이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세인은 팔짱을 낀 채로 이어지는 힐다의 보고를 들었다.

힐다는 보고를 하면서도 세인과 불이 난 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게, 빨리 구조를 진행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세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무리 높은 사람이 왔어도 상대를 무시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코포니 외성 내부에서 신호를 주고받으며 일시에 성문 전체를 개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외성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이기 때문에, 기사단은 떨어진 기사들과 연락이 용이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눈앞에 기회가 보이니까 동시에 달려들어서 지금처럼 피해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리고….”

“그만 보고해라.”

“예?”

세인은 불에 그슬린 힐다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리고 불티가 잔뜩 묻어 타들어 간 그녀의 옷을 재확인했다.

망토로 몸을 가리고 진입했을 텐데도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일 정도면 몇 번이나 불속으로 뛰어 들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힐다의 얼굴은 그녀가 흘린 땀과 검은 기름으로 범벅이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심각하게 화상을 입은 부상자는 목숨을 끊어서 고통을 덜어주도록 해. 그들을 완벽히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성직자는 홀리 레이크 정도가 돼야 보유 가능해. 현실적으로 치료할 수단이 없다.”

“….”

“어차피 고통을 못 이겨 죽을 거라면, 오래 몸부림치다가 죽게 만드느니 단숨에 숨을 끊어 주는 게 좋다. 그리고 구조 작업은 깨끗이 포기한다. 더 이상 피해를 늘릴 수는 없어.”

세인이 말하는 도중 그녀가 몇 번이나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는지, 힐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세인의 말에 반대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힐다의 자제는 당연한 것이었다.

세인이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의견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가 되려면 맥과 같은 극소수의 최측근이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들이 의견을 낸다 해도 세인이 꼭 들어 주리란 법도 없었다.

‘구조를 포기한다고요?’

힐다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도중에도 세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사람을 시켜 주둔지에 있는 병사들을 더 데리고 와라. 그리고 회복할 수 있는 부상자들을 중앙으로 옮긴다. 여긴 아직 위험해.”

마지막으로 세인은 아주 짧게 몇 개의 주의사항을 첨가했다.

그리고 나서는 힐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엉뚱한 곳에서 발작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 됩니다!”

그는 바로 월터였다.

힐다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쥔 월터는 목숨을 걸고 간언했다.

“같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구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그 후로도 월터는 뭐라고 외쳤는데, 그에게 신경을 꺼버린 세인은 월터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시였다.

일단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고 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구할 수 있습니다!”

불길 앞으로 걸어가는 세인에게 있어 월터가 하는 말은 개가 짖는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신경을 써줘야 하는 존재도 아니니까.

힐다에게 당부를 마쳤던 세인은 그렇게 불길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걸 보면서도 힐다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세인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인을 걱정하는 대신 월터를 향해 낮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월터! 미쳤어!?”

“하지만 안에 질리언님이 계신다고요! 아직도 갇혀 계신단 말입니다!”

월터의 떨리는 음성이 전해준 내용 앞에서 힐다는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인의 명령은 떨어졌고 그녀는 그걸 이행해야만 했다.

거기에 절대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혀를 찬 힐다는 월터의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는 꾸짖지는 않았다.

대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월터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이글거리는 불길 속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그로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기사라 해도, 무서울 정도로 불타오르는 건물에 들어가 생존하는 기술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힐다가 스쳐 지나가며 말한 내용이 월터의 귓가에 윙윙 소리를 내며 맴돌았다.

“안타깝지만 질리언은 죽었어.”

*  *  *

‘살 수 있을까?’

쓰러져 있는 질리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갑옷 안쪽에 엘프들이 만든 옷감이 없었다면 열기 때문에라도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몸 위에는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검게 타들어 간 시체는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위쪽의 열기를 막아주었다.

결정적인 도움은 그의 몸 위로 쏟아진 모래였다.

질리언이 생각하기로는 불을 지를 작업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도 쉽게 진압할 수 있도록 매달아 놓은 모래주머니 같았다.

그게 열기에 터져 버렸고 그의 몸 위로 쏟아진 것이다.

덕분에 불길의 피해를 감소시킬 수 있었다.

결국 여러 우연과 갑옷의 성능이 중첩되어 아직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어. 일어날 수 있다 쳐도 탈출구를 찾을 때까지 이동할 수 있을까?’

질리언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출구를 찾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를 보호해주는 것들이 짐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부분 화상을 입고 있었고 체력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방향 감각도 상실해버려서, 시체를 치우고 모래더미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여기에서 죽는 건가.’

살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날 구멍이 없다.

질리언은 메말라서 갈라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발을 건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툭툭 치는 것 같았다.

착각일까?

그 느낌은 이제 아래쪽에서 잡아당긴다는 감각으로 변했다.

‘으윽?’

질리언의 몸이 갑자기 밑으로 쑤욱하고 움직였다.

달구어진 모래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갑옷을 때렸고, 굵은 알갱이들이 둥근 투구 위에서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불길 속에서 질리언을 잡아끈 것은 바로 세인이었다.

현재의 그는 검은 갑옷으로 보호받는 상태다.

세인은 의도적으로 질리언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걸어가다 보니 발에 채였다.

누워 있는 상태인 질리언은 이글거리는 불 속에서 그의 발을 잡고 있는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누굴까?

그 검은 형체는 자신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걸어간다.

자신을 질질 끌면서 말이다.

‘왜인지, 누군지 알 것 같아.’

불길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심해졌고 질리언의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동시에 의식도 흐려진다.

이건 좋은 징조일까?

나쁜 징조일까?

안도해서 마음 놓고 기절하려는 걸까?

세인은 질리언의 한쪽 발을 잡은 상태에서 계속 앞으로 나갔다.

지금 그가 보는 세상은 질리언이 보는 것보다 훨씬 밝고 선명했다.

그거야 호흡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당연한 거다.

불티와 잔불이 붉은 꽃송이처럼 떨어져 세인의 갑옷에 앉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불의 파편들은 검은 갑옷을 녹이려다가 힘없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세인이 계속 걸어가며 살펴보니 외성의 내부는 애초에 여러 층으로 나누어진 구역이 아니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불길과 죽음 외에 채운 것이 없어 아주 공허했다.

이대로라면 상당히 내구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화재 전에는 나무로 된 기둥들이 층간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텅 빈 공간이었다.

다만 아주 높은 지점에 원형의 돌기둥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게 천장을 지탱하는 장치인 것 같다.

‘저게 붕괴하면 천장이 무너지는 건가? 서둘러야겠군.’

외성 내부를 가득 채운 불길은 끊임없이 세인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윽고 죽음도 그걸 알아차렸나 보다.

걸어가는 세인의 앞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그건 죽음이 대놓고 내민 초대장이었다.

“….”

세인은 바닥에 내려앉아 생긴 큰 구멍을 바라보았다.

입을 벌린 구렁이처럼 깊고 넓게 어둠을 벌리고 있는 지대였다.

얼핏 봐도 지름이 오십 미터를 훌쩍 넘어 보였다.

구멍 아래쪽에서는 간헐적으로 푸른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푸른 불길은 자신의 모습을 위로 드러낼 때마다 아주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세인은 무방비 상태로 그걸 맞았다.

쿵!

세인의 어깨를 맞추고 두 조각이 난 기둥이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바닥 위를 잠시 굴렀다.

그러다가 한 개가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세인은 잠시 시간을 재보니 한참 후에야 밑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떨어지면 자신은 몰라도 질리언은 충분히 죽을 만한 높이였다.

“언제나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야.”

투구 속에서 중얼거린 세인은 질리언을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 위에 들쳐 메었다.

구멍은 꽤 컸지만 돌아가려면 충분히 우회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걸리는 시간이었다.

사실 질리언이 이 불길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다.

사방에 인간의 형체로 보이는 검은 덩어리들이 눌어붙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벽이나 바닥에 붙어 있는 인간들은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자세의 공통점은 뜨거운 고통의 표현이라는 것 정도일까.

그 형체 중 하나에 세인의 몸이 완전히 가려졌다.

뒷걸음질을 쳐서 뒤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세인은 앞으로 달려가기 전 질리언의 몸을 탁탁 두들겼다.

행운을 빌고 힘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게 거의 기절한 질리언에게 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세인은 앞으로 달려가며 도움닫기를 했다.

그의 몸이 공중에 뜨려는 찰나, 발 구름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조금씩 부서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바닥을 검은 구멍이 차례대로 집어삼켰다.

그것을 뒤로하고 공중에서 날아가고 있는 세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스듬히 날아가기를 희망했지만, 발을 구를 때 힘을 너무 줬는지 거의 직각으로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자 급속도로 확대되어 오는 돌기둥이 보였다.

잠깐 든 생각이지만 그걸 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인은 그것 잡고 매달리는 대신, 손에 닿자마자 힘껏 밀었다.

그리고 그 반발력을 이용해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돌기둥은 그가 준 충격 때문인지 천천히 밑부분을 직각으로 기울이더니, 결국 그대로 떨어져 내려 구멍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만약 그걸 잡았다면 그대로 같이 떨어져 내렸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다시 앞으로 날아가게 된 것은 질리언에게 있어 다행인 것이다.

그때 갑작스럽게 나타난 푸른 불길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랐고, 세인의 발뒤꿈치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거기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까닭은 다른데에 신경이 팔렸기 때문이다.

‘모자란 데?’

아닌 게 아니라 세인이 착지할 지면이 너무 멀리 있었다.

‘될까?’

그는 허공에서 몸을 반 바퀴 정도 뒤집어 손을 뻗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질리언이 방해가 돼서 닿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가 쭉 뻗은 손끝이 지면 끝에 닿을락 말락 했다.

아슬아슬한 찰나.

세인의 신형이 바닥 아래로 쑥 하고 꺼졌다.

“….”

실패해서 그대로 아래로 떨어진 걸까?

콰직!

그때 세인의 손이 지면 끝을 헤집으며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투구와 어깨가 아래쪽에서 솟아오르며 모습을 보였다.

간발의 차이로 지면 끝에 손이 닿은 것이다.

곧이어 질리언을 들쳐 멘 상태로 지면 위에 올라선 세인이었다.

이제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얼마나 이동했을까?

갑자기 그는 자유로운 손을 뻗어 앞쪽에 검은 연기가 가득한 곳을 후려갈겼다.

꽝!

세인은 허공을 친 것이 아니었다.

벽을 타고 흐르던 연기가 물러나고 쩍쩍 금이 간 벽이 나타났다.

이제 주먹을 뻗는 대신 손바닥으로 살짝 밀자, 항복을 선언하는 듯 벽이 부서져 나가며 안쪽에 숨기고 있던 하얀 내벽을 보여주었다.

그 내벽 다음에는 훨씬 더 단단한 축대벽이 있을 것이었다.

회색 축댓돌로 이루어진 축대벽 다음에는 흙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쓰인 축댓돌은 일대에서 구할 수 있는 돌중 가장 단단한 돌을 가져다가 가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기로 가득 찬 외성 내부에서 출입구를 찾는다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로웠다.

그러니 쉽게 입구를 찾을 수 없다면 일직선으로 벽이라도 뚫는 게 정답이다.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간 세인은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별로 힘을 쓰는 것 같지는 않은 가벼운 주먹질이었다.

하지만 그 주먹질이 빚어낸 결과는 조금 전과 같이 무시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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