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
& 마지막 아침 (3)
주둔지 뒤쪽에서 습격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질리언은 눈앞에 보이는 목표에만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그건 옆에 있는 월터도 마찬가지였다.
“성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병사들보고 준비하라고 해.”
아니나 다를까.
질리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코포니의 외곽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앞쪽의 병사들은 갑자기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전투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뒤쪽에서 전장을 살피는 질리언과 달리, 병사들은 깃발 신호를 통해 글리터가 기습당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막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질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말을 몰아 앞쪽으로 내달렸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포진해 있던 수십 기의 기병과 보병들도 움직임을 함께했다.
원래는 앞의 병사들이 지치면 교대해줄 병력이었지만, 지금 한꺼번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글리터가 앞쪽을 내어주면, 외곽 쪽에서 쏟아진 드레퓨스의 병력이 포위 중인 글리터의 병력을 투과해 주둔지를 칠 것이다.
그렇다면 주둔지는 양쪽에서 공격받게 되니 최악의 상황이 된다.
질리언의 머릿속에는 그 상황이 그려졌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질리언도 그렇지만 다른 기사들은 정말로 후방 기습이 있을지 몰랐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소문만 돌뿐 긴가민가한 분위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상부로부터 직접적인 귀띔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당장 눈앞을 집중해도 부족한 판에 후방을 신경 쓰면 전투에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갑자기 혼란스러운 일이 닥치면 너는 네 일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것 외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행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게 할래? 행여나 후방 기습 같은 게 벌어지면 우왕좌왕하지 말고 네 일에나 신경 쓰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기습이 벌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항상 네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란 이야기야.’
질리언은 전에 나눈 행크와의 대화에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덕분에 지금 상황에서 헤매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질리언은 말을 앞으로 몰아갔고, 전방에서 분투 중인 병사들에게 동요가 번지지 않게끔 명령을 하달했다.
“궁수들은 준비해라. 너희들의 공격 직후에 우리가 나가겠다. 화살을 아끼지 말고 퍼부어라.”
질리언의 외침에 따라 순서 없이 화살이 날아다녔다.
급한 마음 때문에 일치를 보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이어진 궁수 부장의 호통에 따라 일제사격이 진행되었다.
검은 소나기가 야공을 뚫으려는 듯 거꾸로, 아주 높이 떠올랐다.
잠시 하늘에서 멈춘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 장대비는 빽빽한 간격을 유지하며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중에는 간혹 서로 부딪혀 튕겨 나가는 화살도 있었다.
쐐애액!
퍽! 퍽! 퍼퍼퍽!
성문을 빠져나오는 드레퓨스의 병사들은 납작한 방패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간신히 화살 세례를 막아냈다.
“우리도 쏴라!”
그다음에는 정다운 답례처럼 드레퓨스 쪽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화살이 낙하하는 지점은 질리언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의 머리 위였다.
하지만 질리언은 멈추라 명령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처음은 어떻게 버텨내도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에 금방 고슴도치가 되고 만다.
오히려 더 앞으로 나가서 적과 뒤엉키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야 아군을 의식한 화살 비가 멈출 테니 말이다.
말을 채근해 앞으로 쏘아져 나간 질리언이 가장 먼저 적군에 닿았다.
그는 검을 휘두르며 적병이 쌓은 방어진을 통과했다.
말이 펄쩍펄쩍 뛰며 병사들 사이를 파고들자, 그 위로 칼날이 춤을 추며 피를 흩뿌렸다.
이윽고 그를 따라 당도한 기사들의 말은 상체를 들어 적 보병들을 짓밟아 버렸다.
질리언은 아군에게 등을 보이며 쉬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화살 공격은 멈춘 지 오래였다.
그때, 질리언은 뒤쪽에 가득 찬 신음을 들으며 이상한 예감에 빠졌다.
‘기병이 없다?’
이런 충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깊게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뒤따라오는 기사들과 함께 적의 보병을 통과한 질리언은 가능한 한 작게 반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적병의 뒤를 다시 공격했다.
그들이 반 바퀴를 돌 때 다시 간헐적인 화살이 쏟아졌지만, 대부분 정확도가 떨어졌고 힘도 약했다.
빠른 이동에 조준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드물게도 예리하게 파고드는 화살은 능숙하게 방패로 막아냈다.
기세 좋게 성문 밖으로 나온 적군 입장에서는, 뒤에서 글리터의 기사들이 날뛰었고 앞에서는 글리터의 보병들이 덤비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드레퓨스 기사들의 부재였다.
결국 일반 병사들은 시체가 되어 땅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한차례 피바람이 몰아친 후, 질리언은 헐떡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직도 활짝 열린 성문이 보였다.
질리언은 그곳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약간 찌그러진 투구를 벗었다.
“어떻게 할까요? 진입할까요?”
그때 땀 범벅인 월터가 다가와 질리언에게 물었다.
“힐다는?”
“다른 쪽을 공격하고 있으십니다.”
“적 기사들은 그쪽으로 몰려간 건가?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군. 그녀의 의견을 물었으면 좋겠는데.”
“제 의견을 말해도 될까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때 월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들어가야 합니다.”
질리언은 기사들의 얼굴도 바라보았다.
다들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하긴,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적의 방어선이 무너진 건 확실했다.
여기에서 만족하고 멈춰서는 지휘관은 자격이 의심되는 지휘관이었다.
“함정일 가능성은?”
“들어가 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죠. 그런데 그동안 저길 들어가려고 싸운 거니까요. 나중이라고 함정이 없을까요?”
그동안 길게 씨름했었고, 앞으로도 긴 희생을 치러야 얻을 수 있는 보루가 저렇게 개방되어 있었다.
질리언은 글리터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시선으로 번쩍이는 뭔가가 잡혔다.
기사들의 갑옷인 것 같았다.
“음?”
미간을 좁히고 바라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한 덩이를 이룬 기사들이 출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말은 없는 상태지만, 기사들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함정은 아닐 거야. 기사를 제물로 쓰는 함정은 드물어.’
“함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돌파한다.”
내심과 다른 말을 내뱉은 질리언은 다시 투구를 눌러 썼다.
그리고 이마 쪽에 위치한 덮개를 아래로 내렸다.
“외벽을 점령하면 그곳이 우리의 든든한 수비거점이 된다. 동시에 내성을 공략하는 디딤대가 되는 거야.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글리터의 영광을 위하여! 가자!”
“글리터의 영광을 위하여!”
질리언의 끝말을 복창 한 기사들이 기세 좋게 말을 몰았다.
덩달아 뒤쪽의 보병들도 힘을 내서 앞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구보를 하며 내는 ‘착, 착.’ 소리가 성 앞을 가득 메웠다.
“월터. 너는 두 번째 보병과 궁수를 이끌고 천천히 들어와라. 네가 뒤를 맡는다. 그리고 아르거스와 크리피스는 좌우를 맡아. 외벽 내부로 진입 후에 성문 주위를 확보하고 월터의 진입을 도와. 그 후에 월터가 합류하면 너희 셋이서 퇴로를 지키는 거야.”
질리언의 말에 월터와 두 명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에도 적의 외성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드디어 침입자의 발길을 허락했다.
외성 내부가 머금은 어둠은 밖의 어둠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끈적하고 흥분이 뒤섞인 습함이 그들을 환영하듯 맞이했다.
바깥 온도와 확연한 차이가 있는 서늘한 그늘이 공격자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그렇다면 이 순간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들의 투구 속에 드리워진 건 흥분일까?
아니면 죽음에 대한 공포일까?
그렇게 일차 충돌은 외성 내부에서 벌어졌다.
기사들이 뒤얽힌 끔찍한 혼전이었다.
선혈이 튀고 쇳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번뜩이는 공격 속에서 주인을 잃은 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갈기를 흩날리며, 주변에서 폭주하는 광기를 피해 바삐 돌아다녔다.
질리언은 처음에는 말 위에서 적들을 해치웠다.
물론 돌파력을 이용해 건장한 기사 두어 명을 납작하게 만든 다음이었다.
질리언이 위에서 내리치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 병사들은 줄줄이 머리가 터져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돌파력이 약해진 말이 다치자, 질리언이 말에서 뛰어 내려 공격을 이어갔다.
방패와 검을 들고 날뛰는 질리언이 크게 외쳤다.
누가 봐도 지금은 글리터가 아주 유리한 상황이었다.
적들은 보이는 족족 맥없이 쓰러졌고, 승리를 향한 전투를 이끌어 나가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외침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후퇴해!”
피 냄새와 시체들이 가득한 곳.
마치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곳에서 질리언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행동은 점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퇴로를 만들기 위해 존재했다.
그런 그의 발치로 두 개의 공 같은 것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리고 질리언은 자신의 발목에 부딪힌 두 개의 머리를 보았다.
머리의 주인은 아까 성문 주위를 확보하라 명령했던 아르거스와 크리피스였다.
마치 명령을 내린 그를 탓하듯, 부릅뜬 그들의 눈을 보며 질리언은 다시 크게 외쳤다.
“함정이다! 피해라! 도망가라고!”
그제야 글리터의 사람들은 코를 벌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역한 피 냄새가 섞여 있어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여기에 진입하자마자 감지하지 못한 까닭은 아마도 온몸을 채웠던 격한 흥분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공포 때문이거나, 적들의 수작 때문일 수도 있었다.
“기름?”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리고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는지 드레퓨스의 기사들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거기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잡고 늘어졌다.
그때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본 안쪽의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성문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깥 멀리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월터가 보였다.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그의 얼굴은 절망에 찬 표정이었다.
‘빨라. 너무 빠르게 닫히고 있어.’
뒤늦게 부랴부랴 뛰어오는 사람들이었지만 코앞에서 성문이 닫혀 버렸다.
달빛마저 사라져 버린 어둠 속에서 혈투가 이어졌다.
행여라도 글리터군이 안쪽에서 다시 성문을 열고 달아날까봐, 필사적으로 앞을 막고 있는 기사들은 결사대의 기사였다.
그리고 병사 중 일부는 원래 빈민가 사람들이었다.
처음부터 쓸만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노브가 폭력을 가하며 훈련시키니 그럭저럭 싸우는 흉내를 내는 병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물론 노브는 그들 무리에, 원래 자신이 데리고 온 병사도 조금 섞어 놓았다.
그렇게 제물로 쓰일 외곽의 병력이 완성되었다.
외성에 말이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노브는 귀한 말을 죽일 만큼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리언은 기사들을 보고 오히려 의심을 접었지만, 결사대의 기사 입장에서는 임무를 완수했으니 죽어도 상관없었다.
아니, 꼭 죽어야만 했다.
바이칼은 결사대가 세인에게 접선 정보를 전달하기를 원했고.
동시에 그 기밀이 가미긴에게 노출될까 두려워 결사대의 죽음을 원했다.
그러니 결사대가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려면 여기에서 죽는 게 정답이었다.
글리터의 병사들은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을 떼어놓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어떻게든 성문에만 닿으면, 억지로 밀어붙여서 열어젖히고 탈출할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옆에서 열풍이 들이닥쳤다.
천천히 불을 붙여서 타오르는 속도가 아니라 폭발을 머금은 확산 속도였다.
충격파는 서 있는 사람들 모두를 후려쳤다.
건장한 기사를 붙잡고 실랑이를 하고 있던 질리언은 뭔가가 자신의 옆을 강타한다고 느꼈다.
그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 그의 신형이 반 바퀴를 돌았다.
“으윽!”
다행히 그가 붙잡고 있던 기사는 본의 아니게 훌륭한 방패 역할을 해주었다.
“으악! 아아악! 으아아아!”
질리언의 몸 위로 엎어진 채,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으로 인해 부들거리는 기사였다.
질리언은 자신의 투구 위에서 머리를 붙이고 부들부들 떠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고 얼굴에 불이 붙어 실핏줄이 터져나가는 두 눈을 보니, 상대가 약간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를 보며 한가롭게 동정심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불뱀이 쉿쉿 거리며 질리언의 양쪽 귀에 대고 위협을 가해왔다.
불길은 ‘너도 곧 태워 죽이겠다’는 듯이 뜨거운 숨결을 비벼댔다.
그는 황급히 자유로운 한 손을 움직여 투구의 덮개를 닫았다.
덜커덕.
간발의 차로 몇 줄기 불길이 질리언의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의 몸 위에 쓰러진 시체는 검게 타들어 가며 불이 붙었다.
마치 양초에 불을 붙인 것만 같았다.
질리언의 머리 위로 열풍이 분다.
아주 선명한 붉은색과 노란색을 머금은 불길이 파장을 이루며 물길처럼 천장을 타고 흐르고 흘렀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열의 파장은 벽에 붙어 있는 것과 천장의 목재들을 검게 태웠다.
검은 부스러기들이 앞다투어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 닿아서는 다시 떠올라 화산재처럼 회색으로 변해 돌아다녔다.
계속 보다가는 시력을 잃을 것 같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절망 속을 표류했다.
이미 부정적인 답을 머금은 질문도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역시나 그건 너무 뻔한 질문이다.
사방이 불바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