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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왕 마검의 주인-265화 (265/307)

# 265

& 마지막 아침 (2)

코포니 성의 노브는 자신의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누었고 그중 하나는 복병이 되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그 병력이 글리터의 후면을 기습했다.

그리고 글리터는 그 기습에 반격을 가해버렸다.

글리터 주둔지 위쪽에서는 여전히 코포니 성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글리터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공격이 중단되어서는 안 되었다.

적에게 휴식 시간을 준다면 그들이 그동안 들인 노력이 마모되는 것이다.

코포니 성에서는 여유를 틈타 재정비에 들어가고 더욱 굳건한 수비력을 갖출 게 불 보듯 뻔했다.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코포니 성에서 성문을 열고 기병과 병사를 내려보낸다면, 글리터는 위아래에서 협공을 받는 상태가 된다.

아무리 대군이라도 후방기습과 성의 지원 공격까지 받는다면 치명타를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글리터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위쪽에서는 힐다와 월터 그리고 질리언 같은 기사가 병사를 이끌고 선전하는 중이었다.

아래쪽에서는 세인과 더이스, 맥과 행크 같은 기사들이 나서서 적의 공격을 훌륭히 막아냈다.

기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게 된다면 코포니 성의 사기는 눈에 띄게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고립될 것이다.

“이봐 더이스! 뒤를 조심해!”

행크가 그렇게 외쳤지만 정작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도 싸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이스는 알아서 뒤를 조심해야만 했다.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원.”

더이스가 투덜거리며 적군의 시체에서 칼을 빼냈다.

칼날에는 보나 마나 피가 잔뜩 묻어 있을 테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횃불이 없는 어두운 지역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뒤로 물러나 있었으면 좋았잖아.”

“아군이 죽어가는 걸 보고 있자니 피가 끓어올라서요.”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지? 코포니 성에서 따로 뺀 병력이 맞나? 이 정도면 거의 성 하나의 전력 수준인데? 저기 앞에 보이는 성의 병력을 완전히 뺐다 치면, 외성에 있는 놈들은 뭐야?”

수도에 있는 바이칼이 직접 지원해준 군대인 걸 모르니 나올 수 있는 소리다.

이쪽에서도 준비했다지만 드레퓨스의 군대는 끝도 없이 계속 몰려왔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으면 백 명을 훌쩍 넘긴 단위로 계속 들이닥치는데, 방심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 더이스와 행크가 싸우고 있는 곳은 진지 경계선에서 바깥쪽으로 약간 돌출된 취사 지역이었다.

식량은 물론이고 장작이나 식수도 많다 보니 점령되면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양손에 도끼를 쥐고 붕붕 휘두른 행크는 전과 비교하면 약간 둔하게 보였다.

그러나 속도는 몰라도 도끼질에 실린 힘은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행크는 소리를 지르며 공격을 하는 듯하다가, 창을 찌르며 들어오는 병사를 옆으로 피해 냈다.

순간 병사와 그의 등이 맞닿았고, 행크의 두꺼운 팔이 반원을 그리며 병사의 목을 날렸다.

그다음은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적군의 다리 사이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공격이 너무 정직해!”

소감까지 말하면서 날뛰는 행크에 비해 더이스는 묵묵히 서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도끼와 방패를 든 두 명의 병사가 있었다.

방어를 한다고 하지만 적군이 너무 많아서 가끔 방패 사이로 틈을 내줄 때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이스는 아군에게 짜증을 내거나 단검을 꺼내 직접 습격자를 찔러 죽였다.

아군이 섞여 있어 화살을 날리는 게 지극히 부담스러울 텐데도 더이스의 화살은 백발백중의 실력을 보였다.

심지어 적과 아군이 뒤엉켜 바닥을 뒹구는 가운데서 정확히 적의 등판을 노리고 화살을 꽂아 넣을 정도였다.

물론 어두워서 근거리에서만 통하는 실력이었다.

그렇게라도 더이스는 적들을 차근차근 죽여 나갔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살만했다.

둘러싸인 적군의 시체들이 낮은 담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 시각 맥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부러 눈에 띄는 하얀 말 위에 올라탄 그는 깃발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목책을 보수하라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다.

맥이 바쁜 이유는 세인의 부재를 그가 대신 채워 넣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글리터의 측면까지 신경 써서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하면서 맥이 생각한 내용은 이것이었다.

‘생각보다 적들이 많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글리터의 병사들이 속속 합류하자 구체화 되었다.

처음에 기습의 이점을 살려 숙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했던 드레퓨스의 군대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 제대로 카운터를 맞은 상태가 되었다.

눈에 띄게 많아진 글리터의 병사들이 아래로 충원되었다.

원래 유리했던 상황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승패를 기울게 했다.

야밤을 뒤흔드는 함성은 곳곳에서 드레퓨스와 싸우고 있던 아군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일단 자기편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몸짓에서도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반대로 쫓기는 심정이 되면 극도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건 져도 용서받을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지면 목숨이 끝장나는 인간의 게임이었다.

목전의 죽음을 느끼면 대다수는 용맹하게 맞서 싸우기보다 도망가는 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드레퓨스의 병사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을 다독여야 할 기사들은 거의 죽임을 당한 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몇 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동료를 향해 외쳤다.

꼭 기사만이 현실 파악을 하고 주위를 다독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도망가지 마라! 도망가면 절대 안 돼! 도망가면 오히려 죽는다! 도망가면… 컥!”

양손에 검을 들고 장렬히 외치던 남자는 목에 화살을 맞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더이스가 다가와 신경질적으로 남자의 머리를 걷어찼다.

“야. 도망가도 죽지만 너같이 소리 지르면 더 빨리 죽는 거야. 도망가지 말라니. 그게 죽도록 싸운 사람 앞에서 할 소리냐? 도망가. 어서 도망가라고. 힘들어 죽겠다.”

그렇게 말한 더이스는 다시 활을 재어 도망가는 병사들의 등판을 향해 날렸다.

그렇게 날아간 화살은 병사의 등 한복판에 적중했다.

쓰러진 병사가 등에 꽂힌 화살을 뽑으려 발버둥 쳤다.

그에게로 걸어간 더이스는 화살을 뽑아주는 대신 단검으로 목을 베었다.

전쟁에서는 상식으로 굳어졌을 만큼 중요한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도망을 가더라도 질서 정연한 퇴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등에는 눈이 없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고 해도 사기가 꺾여 도망칠 때만큼은 연약해진다.

당황한 인간이 허겁지겁 달려가다 보면 방어나 반격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뒤를 쫓으면 그건 싸움이 아니라 그냥 사냥이 된다.

그리고 학살로 이어지기 쉽다.

그 상황을 축약하자면 피의 수확제다.

아마도 노브의 군대는 오늘 밤 자신들이 아니라, 글리터에게 피의 수확을 일궈내려 했을 것이다.

상황이 역전되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적병이 많아도 그 상황이 되면 숫자가 무의미하니까.

“죽여라! 쫓아가서 다 죽여버려!”

지금껏 흘린 피로도 부족했는지 광란의 파티가 막을 올렸다.

글리터의 기사들은 말을 타고 눈썹을 휘날리며 적들을 추격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칼도 칼이지만 등판을 훤히 내놓고 도망가는 놈들에게 창을 꽂아 넣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자질에 문제가 있는 기사였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대로 죽여버리는 기사들도 기사들이지만, 병사들도 미쳐 날뛰었다.

“다시 돌아오기 전에 죽여라! 최대한 많이 죽여! 다 죽여버려!”

땅에 꽂힌 채로 기울어져 있는 창을 빼든 병사가 혈안이 된 채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다.

죽어 있는 시체에 창을 푹푹 찔러보다가 한 명이 걸렸다.

죽은 척하고 있었던 드레퓨스의 병사는 아직 젊은 소년이었다.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애원에 냉정히 답하는 것은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창이었다.

소년을 죽이고서 다른 곳으로 가려던 병사는, 창이 잘 안 빠지자 인상을 쓰며 발로 소년의 가슴을 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도 창이 안 빠지자 이리저리 비틀어 창을 빼냈다.

넓적한 병사의 얼굴에는 즐거운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신들린 듯이 적을 찾아서 죽이고 죽였다.

흥분의 정수인 광기에 취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농부였던 그는 지금 살인마와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드레퓨스의 패잔병들이 비명에 죽어갈 때,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벌판 위를 내달렸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들의 등판을 보니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백마를 타고 경계선 끝자락까지 달려온 맥은 고삐를 당기며 패잔병들을 눈에 담았다.

‘어떻게 할까? 끝까지 쫓으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리 개활지라도 아직 어둡다. 그리고 멀리 일지라도 야산이 있는데 거기에서 매복한다면 일이 곤란해진다. 줄인다고 줄였지만, 아직 많은 숫자가 남았어.'

여기에서 지휘관은 생각을 잘해야 한다.

눈앞에서 아무런 피해 없이 적을 마구 쓰러뜨리고 있으니 끝까지 추격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기 쉬워서였다.

궁지에 몰린 생명체는 마지막에 방향을 바꿔 죽을 각오로 달려들 수 있었다.

그때 나오는 힘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맥이 세인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어둠 속에서 세인이 나타났다.

피에 흠뻑 젖어 있는 세인은 말에서 내리는 맥을 바라보았다.

달려온 맥은 추적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세인의 말에 그의 말문이 막혔다.

“쫓는 건 이제 멈춰. 토벌은 동이 터온 후에 천천히 하면 돼. 아직 새벽조차 오지 않았다. 우린 이미 한번 승리했고, 일단은 예봉을 꺾은 것으로 만족하자. 아무리 흩어졌다 해도 적의 수효가 적지 않다. 반격을 가해오면 이쪽이 힘들어져. 병사들을 추스를 수 있겠어?”

“예.”

“부상자와 무리한 녀석들을 골라서 중앙으로 보내고, 동이 터오면 쉬게 했던 병사들을 푼다. 기사들을 포함해 인솔하게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맥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각을 입에 물고 불었다.

그리고 부관을 불러 지시를 내렸을 때였다.

세인은 맥에게 코포니 성에 대해서 의견을 나눌 생각이었다.

지금 공격을 더 강화할 것인지 약간 뒤로 물러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코포니 성 쪽에서도 그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나 보다.

다만 끼어드는 방법이 꽤 무례하고 난폭했다.

맥은 자신을 바라보는 세인의 한쪽 얼굴이 밝고 붉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건 세인도 마찬가지다.

둘은 동시에 붉은 빛이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음.”

화광이 충천하는 밤은 붉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화광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같은 느낌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불이다.

놈들이 외성에 불을 질렀다.

코포니 성의 외벽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벼르던 기회가 역풍을 맞고 실패로 돌아가서일까?

전체가 붉게 물든 외성은 지금 이 순간, 마치 드레퓨스의 얼굴이 되어 크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저건 분명 코포니 성 쪽에서 불을 지른 것이다.

세인은 저기에다가 불을 지르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코포니 성 쪽에서 불을 질렀다는 말이 된다.

노브 장군은 기습하는 쪽이 모루가 되고 외벽이 망치가 되길 바란 걸까?

그런데 저렇게 함정을 파놓고 불을 지르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저렇게 되면 불을 지른 쪽도 십중팔구 타죽을 텐데요. 외성의 크기에 비해 성문이 많지 않고 폭이 좁은데. 무슨 생각으로….”

맥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맥에게 말했다.

“말 좀 빌려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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