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 마지막 아침 (1)
야심한 시각, 코포니 성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반면 뒤쪽의 글리터 주둔지는 아주 조용했다.
간혹 천막 사이를 돌아다니는 횃불을 제외하면 어둠에 휩싸인 그곳은 완전히 잠든 곳처럼 보였다.
전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는데, 어떻게 태평하게 잠드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곤함은 결국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잠든 사람 중 일부는 새벽에 일어나 지금 싸우는 사람들과 교대해줘야만 했다.
그러니까 잠을 챙길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는 소리다.
교대를 하고 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잠이 올까?
현실은 너나 할 것 없이 밀려오는 피곤함에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사색에 빠져 우울해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병사들은 간혹 틈이 난다면 삼삼오오 모여 패를 돌리며 놀았다.
그리고 술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입을 쩝쩝거리는 게 전부였다.
매일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어둡고 대비적으로 평화로운 밤.
곤히 잠든 숙영지.
그리고 멀리에서 그런 글리터의 진영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어둠 속에 파묻힌 글리터의 군대 쪽을 보며 노브의 이가 하얗게 빛났다.
“어디가 망치고 어디가 모루인지 알아맞혀 봐라.”
그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기습이 시작되었다.
* * *
주둔지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사람들은 땅이 미약하게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를 땅바닥에 가져다 대자, 북소리처럼 고막을 때리고 있는 게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크게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 없이 어딘가로 달려갔다.
북과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사람들의 단잠을 깨웠을 때, 노브가 숨겨놓았던 복병은 이미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말에 타고 있는 습격자들은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주둔지를 확인하고, 팔을 서서히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안장에 걸려있는 무기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습격자의 창끝이 천막들을 향했다.
그때 몇 마리의 말이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마도 아래쪽에 줄이 처져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두워서 보지 못한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채 땅 위를 굴러다니는 말과 기수는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뒤따라오던 말들은 껑충껑충 뛰어 그들을 넘어갔고 말이다.
“으….”
쓰러져 있는 사나이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말들의 배는 남자에게 있어 괴조처럼 보였다.
거친 숨을 뿜어내고 있는 말 옆에 누워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뛰어 넘어가는 말 중 한 마리가 그만 실수를 해버렸다.
콰직!
쓰러져 있던 말은 다른 말의 편자에 박살 난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늘 벌떼처럼 몰려오는 습격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해프닝이다.
까만 밤 아래.
구름 사이로 새어나간 달빛을 등진 습격자들은 연이어 주둔지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달리는 힘 그대로 천막을 통과했다.
물론 창과 함께였다.
“이상한데?”
검은 투구 속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말이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며 바닥을 자근자근 짓밟는데 걸리는 감촉이 없었다.
안장을 통해 엉덩이를 지나 척추로 이어지는 느낌이, 바닥에 있는 것 중에 생명체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생명체를 밟았다면 그 특유의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공허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선두에 속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뒤따라 오는 동료들에게 경고해 줄 수가 없었다.
후속 부대는 기세를 유지하느라 빠른 속도로 곁을 지나쳐 갔기 때문이다.
결국 태반이 글리터의 주둔지 내부로 들어와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글리터 쪽에서 활을 쏘아 잡았던 전서구는, 코포니 성에서 드레퓨스의 수도로 향하는 새였을 뿐이다.
애당초 상부에게 보고를 위한 것일 뿐, 습격자들에게 별다른 소식이 오간 적은 없었다.
그와 별개로 기습 날짜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습격자들은 약속한 시간이 되자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여기에서 발생한 오류는 오직 하나다.
복병들 보다 더욱 준비한 쪽이 글리터였다는 것.
그들은 기습을 가해오는 드레퓨스의 군대에게 오히려 역습을 가해버렸다.
선두 쪽에서 빠르게 달리던 말들이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말의 갈기가 춤추듯이 움직이고 한바탕 난리가 일어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래로 푹 꺼져버리고 말았다.
구덩이 속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구덩이의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깊게 파기보다는 넓게 파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거꾸로 박아 놓은 나무 말뚝도 없었다.
그래도 빠르게 달리던 말들은 큰 충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부러진 말들이 하나둘씩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의 몸도 성할 리가 없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비명이 굴러다녔다.
어찌어찌 운 좋게 구덩이를 피해간 기사들은 목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덩이를 파고 옮겨낸 흙들도 담 수준으로 쌓았기 때문에 습격자들이 말을 타고 뛰어넘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속도를 멈추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후미에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기습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기서 공격을 멈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뒤에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아군 보병 때문에 후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마당이다.
결국 상대가 막아선다면 길을 트며 싸워야만 했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은 혀를 차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당황하지 마라. 야습은 성공했다! 우리가 물러나지만 않으면 보장된 승리가 우리를 기다린다!”
말이 되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사기를 북돋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기사가 있었다.
아주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는, 쇠줄과 물소 가죽을 꼬아서 만든 스커지와 두꺼운 방패를 들고 있었다.
“다들 내 뒤를 따라와!”
그는 기세 좋게 외치며 목책을 넘어갔다.
그 직후에는 자신을 저지하는 적들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멀리에서는 이미 병장기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쪽에서는 전투가 한창인데 여기는 아무도 없다?
‘왜 이쪽만 비어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두 번째로 세워진 목책 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죽어라!”
기사는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스커지를 휘둘렀다.
여러 갈래의 채찍은 매서운 소리를 내며 상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화끈한 공격을 성공시킨 남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잡았다!’
제대로 먹혔다는 느낌이 팔을 통해 전해져왔다.
그 감각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에 버티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마치 동상처럼 그대로 서서 기사를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어?”
기사가 다시 몇 번이나 스커지를 휘둘렀지만, 찰싹찰싹 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석상과도 같은 적이 드디어 움직임을 보인 것은 기사가 방패로 그의 가슴을 밀쳤을 때였다.
콰직!
상대를 밀어서 넘어뜨리려던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바로 자신의 방패를 잡은 손 아래로, 금방이라도 박살 날 듯 갈라진 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때 기사의 머리 쪽에서 보라색 안광 두 개가 번뜩였다.
동시에 방패가 박살이 났다.
달빛에 반짝이는 금속 파편들이 대치중인 둘 사이에서 튕긴다.
그리고.
으드득!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기사의 손에서 스커지가 벗어났다.
팔이 부러진 그는 자신의 무기를 넘겨받는 상대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세인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기사 앞에서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빼앗은 스커지를 힘차게 내리쳤다.
포위하듯 다가서던 동료들은 검은 그림자가 기사를 때려죽이는 것을 보았다.
난폭하게 후려치는 세인의 힘에, 순식간에 건장한 남자의 머리가 걸레짝이 되었다.
잔인하게도 세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힘껏 내려쳐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해낸 것이다.
스커지에 잔뜩 묻은 핏방울이 허공에서 유영하다가, 세인의 얼굴 한쪽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세인은 스커지를 멀리 던져버리고는 손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 행동이 어찌나 여유롭고 자연스러운지, 마치 야밤에 소풍을 나온 듯싶었다.
그런 그에게 화살이 날아든다.
화살들은 세인의 몸에 맞고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후두둑 땅에 떨어졌다.
기사들이 질린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자 세인이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평온한 어조였다.
“안타깝지만 오래 어울려줄 시간이 없다. 그러니 각자 기사로서 최선을 다해라.”
실력의 고하를 떠나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내용 자체로서 굉장한 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말하듯 최선을 당부하는 그에게 왜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건 보통 사람이 몇 방에 사람의 머리가 터져나갈 정도로 스커지를 휘두를 수 있는가?
또는 보통사람이 맨몸으로 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가, 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기가 질린 기사 중 한 명이 이렇게 외쳤다.
“마족? 너 몬스터냐?”
대답 대신 피식 웃어 보인 세인이 마검을 뽑아 들었다.
그 도발에 기사들은 기합을 지르며 세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때 세인의 검이 가로로 움직였다.
느릿느릿한 그 동작은 허공에 긴 선을 만들어냈다.
달려들던 기사들은 적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왜 검을 뿌리나 싶었다.
그러나 곧 무시무시한 압력이 느껴졌고, 그 힘이 무방비 상태인 배를 때렸다.
침투하듯 스며드는 힘은 그들의 내장을 붙잡고 흔들어 놓았다.
“우욱!”
“우웩!”
메스꺼움도 잠시.
근육과 뼈가 잘리는 고통에 기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허리 뒤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고, 몇 명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이윽고 세상이 비스듬히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시각이 전해준 느낌이었다.
실제로는 상체가 하체에서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뒤쪽에 서 있던 여기사는 동료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잘려져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둘러싼 사람들이 눈 깜박할 사이에 주검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니 다음이 자기 차례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그건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
눈앞의 괴물은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고는, 정작 상대가 최선을 다할 새도 없이 죽여 버린 것이다.
그 괴물이 바닥 위에서 점점 확장되는 피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피에 젖은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이봐.”
세인이 반쯤 얼이 빠져 있는 그녀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듯 말을 걸었다.
흔들리는 여기사의 눈동자를 마주한 그가 속삭인다.
“죽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라. 그게 네 삶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이런 미친….”
여기사는 세인의 앞으로 검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마치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듯, 그것을 능숙하게 낚아채 부러뜨리는 그였다.
그 사이 세인에게서 등을 돌린 여기사는 검이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지금 손으로 검을 부러뜨린 거야?’
그 대답으로 두 조각난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세인의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이를 악물고 전력 질주를 한 것이다.
평소 발이 빠르기로 유명했던 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세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괴물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실낱같은 믿음에 도움을 준 것은 전방에 나타난 병사들이었다.
뒤늦게 기병을 쫓아온 병사들의 수는 절대 적지 않았다.
방패와 칼을 든 드레퓨스의 군인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을 때, 여기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희망에 찬 그녀의 얼굴이 두 개로 나누어졌다.
몰려가던 병사들은 자신들 앞에서 여기사가 둘로 나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전쟁터니까 피도 자주 보고 잔혹한 풍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 한 명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옆으로 나뉘는 여기사 사이를 세인이 통과했다.
그가 지나가자 섬뜩한 단면을 내보이고 있던 그녀가 허물어졌다.
그 쓰러지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세인은 검을 종횡으로 휘둘렀다.
그 앞에 있던 병사는 방패를 들면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방패째로 썰려 나가 버렸다.
그 광경 역시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다.
세인은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칠흑의 검날은 바람 소리를 내며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통과해 버렸다.
힘들이지 않고 휘둘러지는 궤적 앞에서 검신과 창두가 연이어 잘려나갔다.
그다음에는 사람들의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어떤 병사는 비명을 토해내지도 못한 채, 이제 막 성대로 호흡을 끌어 올린 상태에서 목이 잘리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게 그의 인생에서의 마지막 경험이 되었다.
“막아! 죽여 버려!”
“활을 쏴!”
“도끼를 던져!”
세인은 옆을 바라보지도 않고 왼손을 들어 올려 날아오는 화살을 잡았다.
사실 안 잡아도 될 텐데 반사적으로 잡은 것이다.
손바닥을 펴서 화살을 아래로 떨어뜨린 그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다음에는 검은 그림자가 병사들 사이를 누볐다.
잘려나간 쇠붙이와 팔들이 허공에 떠올랐고, 그게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세인의 검이 주변을 갈랐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다시 수십 명이 잘려나갔다.
이래서야 다수라는 점이 전혀 의미가 없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그가 움직이면 이제 병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달아나기 바빴다.
깃발을 들고 달아나던 남자 한 명은 목덜미에 충격을 받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가 일어서려 할 때 세인의 검이 무정하게도 그의 가슴을 찔렀다.
심장을 취하고 다시 육신을 빠져나가는 검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그건 생명이 가진 체온이었다.
세인은 죽은 남자의 손에서 깃발을 빼앗아 들었다.
드레퓨스의 전진 깃발이 그의 앞에서 펼쳐지며 시야를 가렸다.
찌이익.
비단 폭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깃발이 찢어진다.
세인은 그렇게 드레퓨스를 모독했다.
그리고 세인과 거리를 벌린 병사들은 그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깃대를 자신의 허벅지에 후려쳐 부러뜨린 세인은 그것을 멀리 집어 던졌다.
그리고 그의 몸이 다시 흐릿하게 변한다.
세인이 몸을 날리자 그가 밟고 있던 땅이 아래로 움푹 파였다.
땅을 내려앉게 한 주범은 그렇게 앞으로 길게 이동했다.
그러면서 쉴새 없이 검을 뿌렸다.
발작적으로 휘두른 병사들의 무기가 그의 몸을 두드렸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의미가 없었다.
결국 또 병사들만 죽어 나갔다.
급기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리고 달아나는 병사들과 뒤에서 상황을 모르고 전진해오는 병사들이 뒤엉켰다.
“뭐야? 한시가 급한데 왜 달아나는 거야? 너희들 배신자냐?”
후미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 한 명이 그렇게 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호통을 치기 전, 코를 통해 진하고 비릿한 혈향을 맡을 수 있었다.
그다음은 피의 폭풍이 부는 장면이었다.
검은 광풍이 몰아치며 사람들을 학살한다.
“으….”
기사는 나름대로 수많은 난전을 치러봤지만 맹세코 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공포에 질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검에 닿지도 않았는데 무참히 잘려나가며 쓰러지는 모습.
허수아비도 아니고 맥없이 쓰러지는 그 모습은 나중에 도착한 병사들의 전투 의욕을 앗아가기 충분했다.
기사는 그걸 눈치채고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빌어먹을! 싸워라! 맞서 싸우란 말이다! 이대로 도망가면 무슨 망신이냐!”
그렇게 소리치는 기사를 발견한 세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피바다 위에서 천천히 검을 움직여 기사를 가리켰다.
그때 세인과 기사와의 거리는 몇십 미터를 훌쩍 넘었다.
그 정도면 무엇을 집어 던져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니 검을 집어 던질 일은 없어 보였다.
기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서 있었다.
그리고 세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은 그가 직접 대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장면 있잖은가?
검으로 상대를 가리키며 항복을 권유한다든지 말이다.
이미 충분히 죽인 마당이다.
엎어져 있는 시체들이 언덕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검 끝으로 기사를 겨눈 세인은 또박또박 말했다.
“죽어라.”
‘뭐? 여태껏 실컷 죽여 놓고서 지금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모두의 머리에 공통으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때 별안간 뒤에서 털썩,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병사들은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에 빠졌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죽어 나자빠진 기사가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상이 되었다.
‘이게 말이나 돼?’
‘이건 악몽이야.’
혹시 그들은 지금 아직도 계곡 안에 있고, 조느라 지독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미쳤어! 이건 미쳤다고!”
그때 누군가가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던져버린 무기가 땅바닥에 구르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아마도 그게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다들 무기를 집어 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이 그렇게 도망가도 통제할 지휘관이 없으니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 병사들에게 있어 시급한 것은 생존뿐이다.
그리고 도망가던 병사들은 검은 그림자가 옆에서 같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인의 검이 소리 없이 옆으로 번뜩이자, 머리들이 앞 다투어 공중으로 날았다.
다시 검기가 몰아치며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