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 전쟁 속에서 (10)
기세가 한껏 오른 글리터의 군대가 파도처럼 몰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코포니 성을 에워쌌다.
코포니 성 주변은 탁 트인 개활지였고 멀리에 야산이 흩어져 있었다.
이동도 쉽고 오가는 사람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성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몰려든 글리터의 대군을 보고 기가 질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사전의 패배로 사기마저 꺾인 상태였다.
그러나 노브는 노련하게 용병술을 발휘해 동요를 막았다.
“병사 중에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있다면 광장에 매달고 불태워라.”
공포는 언제나 효과적인 용병술이었다.
코포니 성의 정면에서는 글리터가 자리 잡은 채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성의 외곽 쪽에서는 글리터가 때릴수록 움츠러들었고 변변찮은 반격도 해오지 못했다.
당분간은 기본적인 수비에만 집중하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이 글리터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성벽 자체가 쉽게 넘을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갈고리를 던져도 워낙 높아 한계가 있었고, 투석기를 사용해도 거리상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코포니 성처럼 넓고 커다란 곳은 핵심 시설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글리터의 기사들은 병사들을 격려하며 공격 패턴이 끊기지 않도록 힘썼다.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은 장기전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고 격렬한 공세가 잦아들면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패턴이 느슨한 상태로 쭉 이어질 것이다.
그건 몇 달이 될 수도 있었고, 일 년이 훌쩍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성이 함락되는 것이었다.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거나 포기할 때까지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보통은 그랬다.
하지만 자신의 천막 안에 앉아 있는 세인은 이번 전투를 그렇게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빨리 끝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정통적인 방법을 쓰겠는가?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건 눈을 깜박이며, 사람들의 공포를 그 스스로 뒤집어쓸 준비가 되었나 묻는 과정이었다.
‘글리터를 떠나기 전부터 준비는 되었었다. 이제 실행이 남았을 뿐이다.’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마검을 잡자 검집이 움직이며 달그락 소리를 내었다.
세인은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걸었다.
그의 검은 망토가 펄럭이며 뒤를 따랐다.
정면에서는 입구의 젖혀진 천이 만들어낸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태양 빛은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천천히 움직이는 몸을 따라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는 세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의 측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였다.
기사들 사이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회색으로 변해버린 금발 머리를 가진 남자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압박감 때문이리라.
비록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초라한 행색을 보아하니 얼굴도 땀과 먼지로 범벅일 것 같았다.
“누구지?”
“정찰을 보냈던 병사입니다. 말을 들어보셔야 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말을 듣기 전에 얼굴부터 보지.”
맥이 고개를 들게 하자, 세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는 병사를 보았다.
긴장감 때문에 굳어 있는 병사는 세인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말을 걸어서 긴장을 풀어주자니 더욱 얼어붙게 만들 것만 같았다.
세인은 그들의 등 너머, 한창 전투 중인 코포니 성의 외벽을 바라보았다.
공성전이 원래 장기전이라고 해서 지금 죽어 나가는 사람이 안타깝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전투가 한창인 곳으로 직접 발걸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는 답답하게 굴고 있었다.
기사들이 정찰병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분명했다.
세인이 지금 꼭 들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인은 지금이 윽박질러야 할 순간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말해봐라. 무슨 일이냐?”
“저 그게….”
정찰병은 예상보다 아주 멀리까지 정찰을 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내내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상한 점이 없는 게 이상하다고 말이다.
“바닥은 돌바닥이었고 그러므로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뭇가지가 꺾여진 것을 확인해야 했는데 가지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찰병은 내내 이상이 없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보다 못한 세인이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봐.”
“예? 옛!”
멍한 표정의 병사를 다그치지 않고 오히려 낮은 어조로 말을 잇는 세인이었다.
“네 뒤의 동료들이 보이나?”
“예! 보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리고 너도 목숨을 걸고 멀리까지 다녀왔잖아. 적어도 여기에서 네가, 네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누구냐를 떠나.”
세인은 손가락으로 정찰병의 뒤와 정찰병을 번갈아 가리켰다.
“저들과 너 자신에게 실례다. 그러니 말해 봐라. 네가 생각한 것을 말이다. 너는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했어. 나는 그런 네 판단을 끝까지 들어줄 용의가 있다.”
“너무 안전했습니다.”
세인의 눈과 마주친 병사는 눈을 질끈 감고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정찰을 나가면 하다못해 굶주린 짐승이라도 마주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흔적이 없어도 동물이 지나간 흔적이 남을 수도 있고, 그들의 족적은 아주 쉽게 발견됩니다. 그런데 꽤 멀리까지 나갔는데 너무 지나치게 평화로웠습니다.”
그러자 병사의 뒤에 서 있는 더이스가 ‘저렇게 말을 잘하는데 진작에 잘 좀 하지’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행크는 그런 더이스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말이다.
“저는 처음에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이유를 알아채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깨끗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예정된 거리를 답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상이 없었고 더는 안 되겠다, 돌아가야 되겠다, 싶었을 때 계곡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정찰병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홀로 서 있었다.
주변의 풍경은 끝내줬다.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했고 밑에는 바람이 어루만지는 초록색의 물결들이 가득하였다.
나뭇잎들이 소리를 내다가 멈췄을 때 정찰병은 위화감을 느꼈다.
침묵.
침묵하는 자연이 주는 기괴함 속에 정찰병은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압도적인 공포가 그를 찍어 눌렀다.
이 밑에 무엇이 있는 걸까?
나뭇잎으로 뒤덮인 그늘 그 아래에, 무엇이 있지?
그때 이성이 아닌 본능이 그 보고 도망가라고 말했다.
동시에 책임감이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봐야 한다고 속삭였다.
밑에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확인하는 게 맞았다.
그 이율배반 속에서 남자는 충분히 괴로워했다.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조용한 계곡은 웅크린 그 상태로, 아래쪽에서 계속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연에도 얼굴이 있었다면 아까와 달리 돌변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먹이를 노리는 표정.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벌레 우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 인간이 지나가지 않아도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 정도는 들릴 법한데 말입니다. 저는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몸을 돌렸습니다.”
“밑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세인의 말에 정찰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치감 때문이었다.
정찰병의 임무로는 은밀히 정찰해야 한다는 목적과, 끝까지 살아남아 자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이 두 개는 가끔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그가 아래로 내려갔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건 머리가 쭈뼛 섰을 때부터 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문제는 상관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정보를 가져오기 위해 실리를 취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고,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로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그건….”
그러나 남자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긴장감에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정찰병이었다.
“수고했다. 넌 네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어. 그러니 가서 푹 쉬어라.”
세인의 위로에 정찰병은 눈물이 왈칵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다 큰 남자가 주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했다.
생각해 보라.
그는 무단으로 허락된 범위보다 더 멀리까지 나갔다.
그리고 위험을 마음속으로 확신하면서도 계곡 아래를 확인하지 못하고 발을 돌렸다.
위험 직전에서 말이다.
물론 그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아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윗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않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으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세인이 벌떡 일어나며, 영양가 없는 소리라고 그를 반쯤 죽여놔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여전히 앉아 있는 세인이 생각하기에, 윗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랫사람 된 입장으로 이렇게 와서 보고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아까 보니 남자는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속을 털어놓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정찰병 입장에서는 자기 느낌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하고, 아무런 흔적도 못 찾았다고 말하면 된다.
어차피 정해진 수색 범위는 조사를 끝낸 판이었다.
그걸로 그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뭔가 책임감을 느끼고 멀리까지 나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죽음의 공포에 직면했다.
거기에서 등을 돌렸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세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는 자신의 치부까지 털어놓으면서 이 자리에 왔어. 소심함을 보인 남자가 여기까지 올 정도면, 그도 속으로는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야. 외면하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
정찰병이 사라지자 세인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시간은 세인에게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도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 나갔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 사람이 극기에 가까운 용기를 내서 생각을 전달했다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불확실하고 근거가 없다 해도.’
그는 생각 끝에 기사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럴 때 혼자 다 해결하려는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거기에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건 누구도 확실하게 답해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만 저희는 여러 개의 조를 보냈고, 저 병사처럼 혼자만 따로 보내는 경우는, 그가 그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소심해 보여도 자기 할 일은 해내는 사람이란 거지요. 저는 저 병사의 말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지만, 저자가 능력 있는 자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맥은 아주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그는 세인의 판단에 깊게 관여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다.
과연 거기에 드레퓨스의 복병이 있을까? 없을까?
그건 정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였다.
정찰병은 아주 먼 계곡에서 수상함을 느끼고 발길을 돌렸다.
그럼으로써 불안의 정체를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
그런데 그 증거를 찾으러 내려갔고, 정말로 거기에 적군이 숨어 있었다면 그는 당연히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최소한 의심의 여지마저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결정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더이스가 끼어들었다.
“계곡 밑에 놈들이 숨어있다고 가정하면, 정찰 나온 그를 발견하지 못한 걸까요?”
그 말을 행크가 받았다.
“그럴 수도 있지. 혼자서 은밀하게 움직이면 그게 동물인지 뭔지 헷갈리니까. 집단으로 움직이면 멀리에서 봐도 티가 나. 동물들과 인간들은 집단을 이룰 때 확연히 다르거든. 하지만 무리가 아닌 혼자라면, 파악하는 사람도 확신을 가지긴 힘들어. 거리가 꽤 벌어져 있다면 말이야.”
“발견했다 쳐도 그를 죽여 제거하면 이쪽에서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밑에 숨어 있는 쪽에서는 정찰병이 그대로 발길을 돌려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잖아. 계곡 밑으로 내려간다는 건 그 자체로 위험과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니까. 돌아간다 쳐도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거야.”
셋의 대화를 듣던 세인은 한 가지를 물었다.
“그가 그린 계곡이 있나?”
“여기 있습니다.”
맥이 주머니에서 얇은 짐승 가죽을 꺼냈다.
그리고 땅바닥에 펼쳐 보였다.
그걸 본 더이스와 행크는 앓는 듯한 작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옆에 비교 대상으로 작게 그려놓은 게 사람의 크기죠? 나무도.”
“그렇게 크기를 비교하자면 계곡이 엄청나게 큰데. 이건 너무 커. 이런 곳이라면 사람들이 얼마든지 들어가서 있을 수 있겠어.”
맥이 세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복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에는 증거가 아닌, 느낌뿐이었습니다. 그건 제대로 된 보고가 아닙니다. 그의 능력도 존중하고 그가 처했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한 개인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걸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래도 여기서 맥은, 정찰병인 그가 끄나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맥의 회의적인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볼 수도 있었다.
세인은 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아꼈다.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이상적인 것만 찾다가 멍청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을 지켜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휘관이 최대한 냉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 입각해 보자면 지금은 코포니 성을 향해 움직일 때가 아니다.
공격에 집중했을 때야말로 뒤가 가장 취약해진다.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이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사례였다.
맹수가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이 먹이를 습격하는 순간을 노릴 때가 빈번하게 있었다.
“복병이 정말로 있다면, 그들의 예상보다 빨리 성을 함락시키려 해도 분명 급습당한다. 그때 군대가 받는 타격은 상상 불가다. 더구나 정말 있다고 치고, 공격을 받지 않아도 문제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허구의 군대는 인식만으로도 내부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처럼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지. 우린 항상 긴장해야 해.”
세인의 말에 기사들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세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경계에 그만큼 인력이 소모된다. 우리는 몸집이 크니까, 그걸 유지하기 위해 평소 들이는 힘도 많이 요구되는 마당이다. 병사들의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어. 다들 알겠지만, 정면에서 찔러오는 칼은 아무것도 아니야. 항상 문제가 되는 건 뒤에서 들어오는 칼날이다.”
뒤에서 들어오는 칼날만큼 무서운 건 없었다.
하나의 군대가 높은 산을 넘어 기습을 가한다고 치면, 높은 산을 넘었을 테니까 당연히 그 군대는 지쳐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산 너머의 군대와 지친 그 군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지친 군대가 이기기 쉽다.
적의 의표를 찔렀고 방어하지 못한 부분을 노리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전쟁에서 병력의 많고 적음이 승패의 전부가 아닌 이유였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무방비일 때 공격하면 속수무책이었다.
행크가 자신의 의견을 내었다.
“정찰부대를 풀겠습니다. 그래서 확인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말 복병이 있다면 그들은 몰살될 거야.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려면, 정찰부대가 여기에서 거기를 왕복하는 시간 이상으로 시일이 흘러야 가능해. 그리고 정찰부대와 대면한 복병은, 당장 쳐들어오겠지. 우리가 부대를 기다리는 시간. 확인이 불가능한 시간.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믿는 그 시간 내에 올 거야.”
“그렇다면 부대를 제물로 바치면 최소한 놈들의 공격 시기를 추측하고 대비할 수 있군요. 그렇게라도 유도할 수 있다는 게 더 좋긴 합니다.”
“또는 부대를 전멸시킨 후, 놈들이 자리를 옮겨서 다른 곳으로 숨어 들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수가 많다면 그것도 힘들 거야. 많은 군대가 한꺼번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장소가 흔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말하던 세인이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세인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 어쨌든 지금의 나는 복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겠어. 최악을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니까.”
솔직히 세 명의 기사들은 세인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
그들 생각에 왕의 최후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예감이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와 이유였으면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명의 생각만 믿은 결과가 그들의 왕인 세인의 발을 묶고, 더 나아가 대군의 운명마저 조율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
여기 서 있는 세 명의 기사 중 한 명의 생각이 세인보다 낫고, 가끔은 훨씬 현명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 때 따라올 결과를, 여기 있는 기사 중 누구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다.
큰 결정은 오로지 세인의 몫이었고 책임도 세인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의미 있게, 혹은 무의미하게 죽는다고 해도 그건 세인에 의해서야만 했다.
왜냐면 그는 글리터의 왕이니까.
그래서 세 명의 기사 중 맥이 대표로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간단한 요청에 따른 세인의 명령도 아주 간단했다.
“땅을 파라.”
* * *
결국 세인은 코포니 성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건 끊임없는 소모전이자 지구전이다.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병력 중 일부는 바닥에 땅을 팠다.
바깥에서 쉽게 볼 수 없게끔 은폐하여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작업은 작업대로 하면서, 코포니 성의 동태를 끊임없이 살폈다.
이렇게 조심을 한다고 하지만, 코포니 성은 지형적으로 글리터 군대의 주둔지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러니 땅을 파는 이유를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만약 눈치를 챘다면 필히 새를 날려 멀리 있는 복병에게 신호를 보내려 할 것이다.
실제로 전서구 몇 마리가 하늘 위를 날았고, 궁수의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
발에 묶인 전통에는 암호문이 쓰여 있었지만, 해석은 불가능했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다는 게, 조금이나마 복병에 대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게 복병이 존재한다는 이유, 즉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주진 못한다.
정황상의 의심이 조금 강해졌을 뿐이다.
세 명의 기사들은 계곡에 갔다 온 정찰병의 입단속을 시켰다.
그리고 괜히 확인되지 않은 정보 때문에 어수선해질까 봐 자신들도 말조심했다.
다른 기사들에게 그들의 우려를 말할 것인가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이고 눈앞의 성에 집중하기도 바쁜데 뒤통수가 근질근질하게 할 수는 없어. 그래도 훗날을 생각해 살짝 모호한 귀띔 정도는 해놓지.”
행크의 말에 더이스가 그게 더 신경 쓰이겠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행크에게 한 대 맞고서 한심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맥에게 물었다.
“정말 부대를 보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재확인은 하는 게 낫겠다 싶어요. 적들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정찰부대가 거기까지 갔다 오기만 하면 우리의 고민도 끝납니다.”
“이미 결정이 내려졌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는 게 의미가 없는 거 같아. 다만 한 병사의 일탈이 이런 경우도 빚어내는군.”
“그는 정말 너무 멀리 갔죠. 예. 말 그대로 너무 멀리 갔어요.”
그리고서 더이스는 자신이 방금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는 듯, 굉장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상황은, 예기치 못한 자신의 말에 자신이 감탄하는 상황인 것이었다.
그 표정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맥은, 불현듯 더이스가 왜 평소에 행크에게 처맞는지 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부남이 된 지 한참 지나서도 누군가에게 처맞는다면, 그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 * *
세인은 자신의 천막 앞에서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는 깍지를 낀 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 밑에서는 거꾸로 박힌 마검이 햇빛을 이리저리 반사했다.
세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지만, 그 눈빛 안에 흔들리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며칠 동안 계속 그러고 있는 것에 대해서 혀를 내두른 더이스는 세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모닥불에 주전자를 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전자 뚜껑 밑에서 물이 끓는 힘찬 소리가 났다.
그는 뜨거운 물을 컵에 조심스럽게 따른 후 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든 세인은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식으면 꼭 마셔야 합니다. 끼니도 계속 거르셨으니까요. 물이라도 마셔야 합니다. 아무리 강하시다고 해도, 이렇게 안 먹고 마시지 않는데 몸이 괜찮나 싶습니다. 솔직히 걱정이 돼요. 그런데 평소에는 그걸 말하기도 어렵네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시니까요.”
더이스의 당부 속에서 세인이 중얼거렸다.
“잔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마플이 보고 싶어.”
더이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는 참 좋은 사람이었죠.”
그러자 세인이 작게 짜증을 냈다.
“그게 아니라 잔소리 좀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그러자 더이스는 당황하며 컵의 물을 마셨다.
“아 네…넷, 앗! 뜨거! 앗 뜨거!”
식히지 않고 마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호들갑을 떤 더이스는 아까보다 몇 배로 무안함을 느끼며 그걸 상쇄하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정말 있다면 언제쯤 올까요?”
더이스는 자신이 물어봐 놓고도 실소가 나왔다.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세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세인이 대답을 했다.
“오늘 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오늘 밤이라고.”
세인은 옆에서 더이스가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하기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손님을 맞을 준비는 다 끝낸 상태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코포니 성 쪽의 공격부대에도 알릴까요?”
“지금 그래 봐야 의미가 없어. 알리려면 더 빨리 알렸어야지. 괜히 집중을 깨지 말고,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게 놔둬. 우린 이쪽에서 우리 일을 하면 되니까.”
세인이 깍지 낀 손의 아래에서.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마검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