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62화 (262/307)

# 262

& 전쟁 속에서 (9)

며칠이 지나도 셀린 쪽에서 소식이 없자 노브 장군은 그녀에 대한 것 자체를 망각해 버렸다.

어차피 기대도 안 하고 벌인 일이었다.

그냥 결사대 보고 엿 먹으라고 한 행동이니까 깊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그것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성루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노브가 외성 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그 끝에는 태양 결사대의 기사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지금 글리터 진영 쪽으로 말을 모는 중이었다.

동시에 진을 친 글리터 쪽에서도 기사 한 명이 앞쪽으로 말을 몰고 나왔다.

기사전을 치를 두 인물이 서로를 향해 말을 모는 것이다.

“저기 보이는 글리터의 기사. 저 기사가 탄 것 말이야. 설마 황소인가?”

“예.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노브의 물음에 옆에서 있던 기사가 대답했고, 성루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첫 대결은 너무나도 맥없이 끝나버렸다.

힐다의 강력한 공격에 결사대의 기사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이거야 원.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알맹이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노브가 새삼 짜증 난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나가서는 아군의 사기를 꺾는 결사대 놈들이 고와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두 번째까지는 희망을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졌지만 두 번째로 나간 기사도 글리터의 다른 기사와 맞붙어 힘없이 져버리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불붙는 접전조차도 없었다.

순간 두 개의 신형이 교차 되었다 싶더니, 결사대 놈은 너무 허무할 정도로 말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지독하게 일방적으로 지고 있다.

마치 이렇게 멀리에서 지켜보는 노브에게, 이제 네 차례니 엿을 먹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글리터에서는 당연히 함성이 터져 나왔고 반면 코포니 성 쪽은 쥐죽은 듯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노브는 더는 저 멍청이들의 향연을 보기가 싫어졌다.

“내려가시려는 겁니까? 아직 세 번째 결투가 남았는데요.”

몸을 돌린 노브의 뒤로 기사들이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노브는 그런 기사들의 모습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점잖게 대꾸했다.

“내 저럴 줄 알았어. 미천한 신분의 멍청이들이 기본기도 없이 뭘 하겠어? 이럴 시간에 성문이나 닫는 게 좋겠어. 세 번째도 지면 그 기세를 타고 저놈들이 달려올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 어두운 계단 쪽으로 사라지는 노브의 마지막 말은 통로를 울리며 끝났다.

*  *  *

“원래 저들의 임무수행 방식은 충성심을 골조로 한 자살 특공대가 아니냐 이 말이야. 그런데 저기서 저렇게 어릿광대 놀음이라니. 제대로 훈련받은 기사랑 싸워서 상대가 되겠어? 꼭 길고 짧은 것을 대봐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 있지. 아군 사기나 깎아 먹으면서 말이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사라진 노브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결사대의 특기인 자살 임무는 현재 충실히 수행 중이라는 것이다.

힐다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것은 질리언이었다.

그는 현재 말에 타고 있었는데, 승리에 취한 것이 아니라 좀 얼떨떨한 상황이었다.

분명 창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는데 적이 쓰러진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마법을 건 것처럼.

“하지만 마법일 리는 없지.”

그렇게 중얼거린 질리언은 말을 몰아 쓰러져 있는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위협적인 말발굽이 들리며 쓰러진 사내의 몸 주위를 밟는데도, 남자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위에서 봐도 만만치 않은 강심장과 분위기를 가진 기사였다.

적어도 아까 질리언이 휘두른 창 몇 번에 나가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질리언이 복잡한 빛이 섞여 있는 시선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을 때, 상대도 그런 질리언을 탐색하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굴타라, 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서 안데르 공동묘지로 가면 안내인이 상시 대기하고 있을 거다. 시간은 상관없다. 기다리는 사람이 바뀔지언정 항상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남자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걸 세 번 되풀이했다.

마치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구는데, 질리언은 그가 하는 말을 도중에 막아설 수가 없었다.

결국 남자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질리언은 물어볼 수가 있었다.

“뭐? 무슨 소리야? 방금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그러자 쓰러져 있는 결사대의 기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냈다.

“멍청한 놈. 네 주인에게 가서 알리라고. 태양 황제의 말씀이다. 만날 장소를 이야기해준 거야. 이 전언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죽는 거다.”

질리언은 ‘나는 아직 너를 죽이지 않았는데?’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기사는 독이 든 캡슐을 삼켰다.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질리언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대체 무슨….”

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기사가, 몇 번 휘두른 창에 땅으로 구르더니 메시지를 전하고 죽어 버렸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가를 떠나, 지금 죽어버린 기사도 평소 피땀을 흘리며 갈고닦은 실력이 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자살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분하지도 않은 걸까? 어떻게 저렇게 간단히 목숨을 끊어 버리지?’

짧은 시간이지만 질리언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머리를 돌린 질리언이 돌아가고, 다음은 월터의 차례가 되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인 월터지만, 이렇게 기사전에 나가 경험을 쌓게 할 정도로 유망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월터의 긴장감을 덜어주고, 어깨를 두들겨 줘야 할 질리언은 맥없이 월터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말을 몰고 나가는 월터는 심호흡을 연달아서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나 자신을 믿자.”

뒤에서는 글리터의 응원 소리가 현실보다 더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흥분해서 감각이 둔탁해졌다는 소리다.

이러다가 경험을 쌓기도 전에 죽을 판이었지만 월터는 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먼저 나와 월터를 기다린 남자는 하얀 피부를 가진 미남자였다.

아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손가락과 속눈썹이 매우 길었다.

그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며 홀로 서 있었다.

월터는 그 남자가 시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가 한눈판 사이에 기습하고 싶지 않았던 월터는 방패와 검을 쳐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결사대의 마지막 기사는 월터를 바라보지 않았다.

미련이 남는 듯 계속 시체를 바라보고 있자 참지 못한 월터가 한마디 던졌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초도 되지 않아 후회했다.

‘같은 편인데, 그리고 저렇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데 당연히 아는 사람이겠지. 이 멍청아.’

월터는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던진 말은 상대편에게 웃음을 불러왔다.

픽하고 웃은 남자는 그제야 월터를 올려다보면서 말을 했다.

“제 형입니다.”

월터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자꾸 상대편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에서 마음이 약해진다는 건, 곧 죽고 싶어 환장했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투기를 불러일으켜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그는 말에서 내려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참 유감입니다. 자, 이제 싸웁시다.”

하지만 정말 속 터지게도 하얀 얼굴의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월터가 듣기에 뜬구름 잡는 말을 했다.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날씨입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네요.”

“저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싸울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싸울 의무가 없죠. 당장 머릿수를 맞추느라 제가 지원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건 형 때문이었지 의무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먹고살기 위해 결사대에 지원했습니다. 제 주위에는 그런 동료가 대부분입니다. 그 덕분에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지만 여러 고통을 겪었죠. 충성심도 시험당하고 괴로운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 후로도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찌나 중간중간을 틈 없이 잘 잇는지, 맥을 끊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기는 각 진영의 자존심을 걸고 실력을 겨루는 자리지, 살아온 길을 고백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월터는 상대에게 그걸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이봐요.”

그때 남자가 보낸 눈빛이 월터의 말문을 콱 막히게 했다.

아주 정제되어 있고 유현한 눈빛이었다.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며 거세를 당했고, 혀를 잘릴뻔한 위기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동안 국가를 위해 공헌한 일들을 생각하면 드레퓨스에 빚은 다 갚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도망칠 생각도 품었었죠. 하지만 형은 아니더라고요. 그는 정말로 순수한 복종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뇌를 당한 것이죠.”

그리고 월터와 남자는 다시 죽어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먼 곳에서 응원하는 소리가 월터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봐요! 당신 사연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이러려고 여기에 나왔나? 지금 행동은 우리와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

그러자 남자가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번개처럼 검을 뽑았다.

쉬익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검은 벌침처럼 가늘고 뾰족한 검이었다.

그 검날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자 월터는 엉겁결에 그것을 막아냈다.

그러자 챙! 하는 소리가 나며 남자의 검날이 휘었다.

그 반동을 능숙하게 조절하며 몰아쳐 오는 남자였다.

아까의 부드러운 기세는 온데간데없었고 월터는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이 자! 실력이 엄청나잖아?’

이를 악문 월터가 검을 내질러 봤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내었다.

노브 장군 같은 사람들이 결사대 출신을 비웃긴 하지만 때론 태생적 한계를 떠나 실력을 쌓아 올린 강자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지금 월터와 대결을 벌이는 남자도 그중 하나였다.

월터의 방패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자 코포니 성 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그 환호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월터를 밀어붙였다.

그러다가 월터의 목에 검을 바싹 붙이는 데 성공한다.

이거야말로 정말 압도적인 실력 차였다.

어린애와 성인의 수준인 것이다.

“내가 졌…다.”

수치스럽고 괴롭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잖은가.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려는 월터 앞에서 남자가 속삭였다.

“지금 궁금한 건 하나입니다. 방금 우리가 겨룬 실력을 떠나 제가 괴물로 보입니까?”

이를 악문 월터는 어떤 말을 하려고 했을까?

그가 그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 전에 남자가 월터의 눈에서 미리 대답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웃어 보였다.

한번 웃기 시작하니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남자였다.

“당신을 죽여봤자 제 운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황제는 우리를 전사로서가 아니라 메신저로 써버렸고, 제 뒤의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혔습니다. 그리고 제 형은 시체가 되어서 쓰러져 있죠. 그래서 이러는 겁니다. 당신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이런 마당에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건 의미가 없어서 이러는 겁니다.”

“뭘 이런다는 거지?”

그때 검을 거둔 남자가 뒤로 물러나 멀어졌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월터에게 몸을 던졌다.

무기를 들고 위협적으로 말이다.

월터는 평소 훈련받은 대로 반사적인 찌르기를 했고, 그 공격을 막지 않고 그대로 가슴을 내주는 남자였다.

결국 월터의 검이 남자를 꿰뚫었을 때, 글리터 진영과 코포니 성 쪽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멀리에서 보았을 때 월터와 결사대의 남자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길 정도의 시간이었다.

누가 이긴 거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높아져 갈 때, 결사대의 남자가 힘없이 아래로 축 미끄러졌다.

그 결과에 따라 글리터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대쪽에 있는 코포니 성에서는, 패배라는 결말에 침묵을 맞이했고 말이다.

우두커니 혼자 서있는 월터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월터의 얼굴을 봤다면 혼란과 자괴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의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진격하라!”

그때 글리터 쪽의 목책이 열리며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기를 몰아 높아진 사기로 성을 공략하려는 것이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전진하는 병사들은 점점 월터와 가까워져 갔고, 이윽고 수많은 투구가 월터 곁을 스쳐 지나갔다.

기사 중에서는 월터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기사들의 손길에 월터의 몸이 맥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는 건 욕 먹기 좋은 행동이지만, 기사전에서 승리를 거둔 월터에게 다가와 나무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초점을 잃었던 월터의 눈이 땅바닥을 향하자, 그는 곧 이지를 회복했다.

월터는 쓰러진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질질 끌며 앞으로 가, 형의 시체 옆에 눕혀 주었다.

“미안합니다.”

그것 외에 월터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실력이 모자란 자는 살아남았고 승부에서 이긴 자는 오히려 시체로 남게 되었다.

월터 개인에게는 다행이었으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로 엿 같았다.

‘공평에 대한 생각은 집어치우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그러나 계속 엿 같은 기분을 간직하며 바보처럼 서 있기엔 주변 상황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월터! 이 바보 같은 놈아!’

자신을 꾸짖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스스로 정신을 차린 월터가 고개를 들자.

멀리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는 질리언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이를 악문 월터는 무기를 높이 들고 병사들에게 외쳤다.

드레퓨스를 무찌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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