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61화 (261/307)

# 261

& 전쟁 속에서 (8)

코포니 성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도착한 노브는 그곳의 영주부터 만나보았다.

노브 장군은 제대로 귀족 교육을 받은 지식층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의범절이란 게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중요한 역사 속 한 페이지에 들어와 있다. 단호함을 보이지 못해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노브 입장에서는 어찌 되었건 성 하나에 머리가 두 개 있는 상황은 피해야만 했다.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따로 놀면 그건 빨리 망하고 싶어서 죽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성주의 성대한 환영 행사를 받은 그는, 다음날이 되자마자 누명을 씌워서 성주와 그 가족을 목매달아 버렸다.

“이들은 글리터의 첩자였고 나를 독살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웃을만한 말이었지만, 성의 시민들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노브의 억지를 납득했다.

노브가 이끌고 온 병사들이 성과 성 밖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이들은 황제가 인정한 군대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시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본보기로 울분에 차 항의하는 성주의 기사들마저 죽여버린 노브는 계획을 짰다.

“지금 글리터의 군대는 어디까지 왔지?”

“미소스 지역에서 전투 치루기 직전입니다. 지원군을 보낼까요?”

그러자 노브가 고개를 저었다.

“수비대의 병력을 여기로 집합시킨다. 그리고 지금의 글리터에게는 승리가 필요해. 그들이 그 작은 승리로 말미암아 방심하기를 기도하자.”

그리고 노브는 코포니 성을 둘러보았다.

그가 내린 평은 짤막한 한 줄이었다.

“여긴 너무 좁군.”

코포니 성은 결코 좁은 성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어서 유지비만 해도 적자의 주범이었다.

그런데 그건 평소의 코포니 성일 때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남자들이 꽉꽉 들어찬 곳일 때는 미어터지기 직전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날아오는 화살이 성벽을 넘으면 피할 곳도 없었다.

“성 밖에 군대를 매복시키겠다.”

“단기간 안에 많은 병사를 숨긴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참호를 만들고 감쪽같이 위장하려고 해도 적지 않은 시일이 요구되는 문제입니다.”

주변에 산이 있다고 해도 대군이 감쪽같이 숨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노브는 그런 우려를 너무나도 쉽게 일축해 버렸다.

“달리라고 해.”

“….”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이때를 위해 병사들의 행패도 눈감아주었던 것이었다.

글리터의 수색병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아주 멀리까지 이동해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달려오라는 소리였다.

군장을 차고 그렇게 달려오자면 사람도 사람이지만 말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노브의 명령이니까 말이다.

측근들에게 지휘권을 나눠준 노브는 그렇게 대부분의 군대를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성안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코포니 성의 구조는 상당히 기형적이었다.

외벽은 큰 원 모양이었고 본성과 꽤 거리가 있었다.

외벽지역은 좁고 높은 게 아니라 아주 넓고 낮은 대신 견고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돌처럼 굳은 딱딱한 나무들이 골격을 이루며 잘 짜여 있던 것이다.

평소 여기는 거주구로도 쓰였다.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외벽에서 본성까지의 거리는 수백 미터나 되었다.

그 공간에는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거나, 시장이 서는 공터가 눈에 띄었다.

노브는 빈민가에 있는 사람들을 외벽 쪽으로 몰아냈다.

매우 서둘러야 했으므로 빈민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온화한 말 따위가 아니었다.

노브의 군대가 사용한 것은 발길질과 주먹다짐이었다.

그래도 칼과 창으로 찌르지 않은 게 어디인가 싶다.

“어차피 세금을 내는지도 모르는 가축들이다. 그들이 거기에서 제구실을 다 해줬으면 좋겠군.”

노브의 말을 들은 기사들은 빈민들에게 활이나 칼을 허락해 주었다.

빈민들이 그것을 가지고 노브의 기사들에게 적의를 보이기에는, 글리터의 군대가 이미 지척이었다.

노브는 높은 성루에 올라 코포니 성 주변을 가득 채운 글리터의 군대를 보았다.

코포니 성은 높은 언덕에 세워진 곳이었다.

그런 지리적 이점과 성루의 크기를 고려하면, 이렇게 글리터의 군대를 한눈에 파악하는 데도 무리가 없었다.

노브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폐부 깊숙이 활기가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역사 안에 들어와 있다. 후대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의 가치를 인정해줄 것이다. 나 노브가 조국인 드레퓨스를 위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서 노브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말에 깃든 여운을 즐겼다.

검은 군대가 목전에서 칼을 들이밀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을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름을 남길 자로서, 영원한 불멸이 될 자의 당당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팔을 내린 노브는 천천히 층계를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비에 전념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아무리 대군이라도 지형적으로 우리가 유리하다. 답 없는 공격이 계속되면 놈들도 조금씩 지치고 긴장감이 느슨해질 것이다. 그때를 노려 멀리 숨겨둔 외부의 군대가 밤에 기습을 한다.”

“알겠습니다.”

“글리터의 군대가 급습을 당해서 우왕좌왕할 때, 그 틈을 노려 이쪽에서도 성문을 열고 일정 병력을 내보낸다. 그렇게 해서 상대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소란통에 고립된 부대가 보이면 기사를 다시 풀어 적극적으로 치겠다. 그 후에는 상황에 따라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물론 외벽에 대한 계획도 별도로 돌린다.”

모두가 동의하듯이 작게 손뼉을 치는 가운데, 유난히 딴청을 피우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보란 듯이 말이다.

그는 바로 태양 결사대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당연히 노브의 눈에 띄었다.

“자네는 무슨 다른 의견이라도 있는가?”

그 말은 그냥 의견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 정말로 의견을 내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사대의 기사단장은 생뚱맞은 말을 뱉어냈다.

“기사전을 하고 싶습니다.”

“뭐?”

“글리터와 기사전을 원합니다.”

이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소린가?

방금 최선을 다한 수비를 말했는데 말이다.

노브는 노골적으로 빤히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사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노브를 바라보았고 말이다.

결국 먼저 물러난 쪽은 노브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태양 결사대라면 노브도 좀 껄끄러웠다.

노브는 태양 결사대를 싫어했다.

충성심만으로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게 배알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노브가 봤을 때 그들은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게 아니라 왕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숭고하지 않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기사단장의 의견을 묵살하기도 어려웠다.

바이칼은 노브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괴물로 변했어도 상벌에 대한 약속은 지킬 존재였다.

그러니 노브가 죽게 되면, 그의 이름을 오벨리스크에 적어놓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결사대를 무시한 것이 바이칼의 귀에 들어갔다간 좋은 결말을 어그러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해서 노브가 보았을 때, 결사대는 재수 없는 놈들이지만 뒷배가 든든한 놈들이었다.

무시할 수 없다.

그게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과연 광신도 집단답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린 노브가 다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렸지만, 기사단장은 정작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로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 들으면 그만이었다.

현재로선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몇 명이나 나갈 건데?”

노브의 곱지 않은 말에 기사가 잠시 망설이더니 셋이라고 대답했다.

한 명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속셈이 뻔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의도를 파악 당해서는 그가 직접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었다.

“좋아 허락하지. 다만 결사대의 일반 병사들은 안 돼. 그들을 운용할 권리는 내 거야.”

“그거야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래. 내 마음대로 할 테니 당장 내 면전에서 꺼지게.”

군말 없이 나가는 기사의 등을 바라보며 노브가 중얼거렸다.

물론 주위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이렇게 되면 우리 쪽에서 글리터를 한번 찔러보는 것도 좋겠군. 그물이나 던져볼까?”

일원화된 체계를 만들기 위해 성주를 처형한 마당이다.

상명하복의 지휘 체계가 가장 중요한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기사전을 주장한 결사대가 괘씸했다.

저들이 나가서 패하기라도 하면 아군의 사기를 깎아 먹는 짓인데, 그건 당연히 노브에게 손해였다.

“명예를 위해서 내게 요구하는 게 있다면, 저들도 내게 뭔가를 해줘야지.”

노브는 결사대가 명예를 위해 기사전을 요구한다고 착각했다.

다른 기사들이 노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가와 물었다.

“어떤 방법을 원하십니까?”

그러자 노브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결사대에 여기사가 있지?”

그날 밤 결사대는 노브에게 무리한 요구를 전달받았다.

그걸 받아본 기사단장은 이게 거래라는 것을 알았다.

이 제안을 거절하면 임무 수행에 어떤 차질을 빚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노브 입장에서는 자신을 짜증 나게 했으니 이렇게 구는 것일 거다.

그렇다면 이쪽은 이쪽대로 응해야 할 사정이란 게 있었다.

‘노브 장군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양해를 구할 수는 없어. 이건 드레퓨스의 태양이 직접 내린 비밀 임무니까. 이럴 때는 저 꽉 막힌 장군이 너무 짜증 나는군.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의 눈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두컴컴한 곳에서 좁은 책상에 앉아 고민을 해보는 단장이었지만,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한 여기사를 호명했고 사정을 설명했다.

노브가 원한 것을 말한 것이다.

여기사는 기사단장의 설명을 들으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전을 통한 접촉은 드레퓨스의 황제가 원하는 것이다.

그걸 노브도 적당히 눈치채고 모른 척하면 좋으련만, 그는 미련한 위인이라 이렇게 되지도 않는 계획을 실행해 달라고 앙갚음하는 것이었다.

“해주겠나?”

기사 단장의 물음에 여기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여자는 그날 밤 노브의 기사들이 모인 숙소로 들어가 실컷 짓밟혔다.

한참이 지나 그녀는 결사대의 숙소로 간 것이 아니라 성을 빠져나왔다.

글리터의 진영까지 맨발로 걸어간 그녀는 그곳의 경비병에게 발각되었다.

“정지! 거기 누구냐?”

경비병의 눈에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발이 들어왔다.

창을 내린 경비병은 호각을 길게 불었다.

굵은 밧줄에 몸이 묶이고 끌려간 곳은 커다란 천막 안으로, 거기가 글리터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산발한 머리, 엉망이 된 몸. 그리고 발에 피를 흘리고 있는 여기사는 글리터의 기사들을 보며 참 묘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젠가 글리터의 기사들과 검을 나눌 것으로 상상하며 검술을 연마해왔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아무 의미 없는 기만책일 뿐이었다.

갈라진 입술을 열어 연극배우처럼 연기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갈고 닦아 왔던 검술은 다 무엇이었을까?

그런 마음과는 상반된 대사가 그녀를 배신하듯 흘러나왔다.

“저는 코포니 성에 사는 농노의 딸입니다.”

그리고 애써 일어나는 수치감을 외면한 채 모포를 들어 올리려 해 보였다.

그러다가 굵은 밧줄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기자, 기사 몇 명이 다가와 밧줄을 풀어 주었다.

커다란 막사 안에는 많은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습을 걱정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자유로워진 결사대의 여기사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모포를 거둬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성의 기사들은 저를 철저하게 능욕했습니다. 저는 분노에 눈이 멀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이쪽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취하시고 원하는 것을 얻어 가십시오.”

정말로 지금 하는 거짓말이 먹히리라고 기대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최소한 지금 거짓말을 하는 셀린은 아니었다.

노브가 결사대의 기사단장에게 한 요청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결사대의 기사 중 하나가 중요한 임무를 맡아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성에서 치욕을 당한 척하고 글리터로 가서는 그들에게 녹아들라고 말이다.

내부에서 첩보 활동을 해주길 바란다는 것인데,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히 써놓았다.

아마 말을 꺼낸 노브 장군도 이게 제대로 먹힐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기사전을 고집하는 결사대가 짜증 나서 행패를 부린 것에 불과했다.

물론 세상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 이러다가 뭔가 얻어걸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게 구실이 되었다.

한편, 글리터의 기사들은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셀린 앞에서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로서는 셀린이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검술로 발달한 육체를 몰라보겠는가?

그러면서도 기사들도 사람인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일었다.

꼭 농노의 딸이라고 해서 기구한 운명 속에 검술을 수련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단지 거짓말일까?

‘너무 뻔해 보이니까 오히려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구나 피투성이가 된 셀린의 발은, 그걸 보는 사람들에게 기묘한 설득력을 느끼게 했다.

결국 눈앞에 보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순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기사들의 시선이 셀린의 발과 얼굴을 바쁘게 오갔다.

그렇게 저마다 머리가 복잡해진 상황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셀린은 갑자기 글리터의 기사들이 놀라서 좌우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두웠던 뒤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창백한 얼굴을 하는 미남자였다.

그는 어지간히도 검은색을 좋아하는 듯했다.

온통 검은색의 옷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름이 뭐지?”

“셀린입니다.”

남자의 물음에 셀린이 대답했다.

“그래 셀린. 이 정도까지 하는 걸 보면 우리에게 특별히 원한이 있나? 싸우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기꺼이 지명해 주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 원한은 코포니 성의 기사들에게 있습니다.”

세인은 말없이 침묵을 유지하며 셀린을 바라보았다.

마치 뭔가를 읽어내고 파악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가 침묵을 유지할 때 누구도 감히 나서서 세인의 침묵을 깨뜨리지 못했다.

많은 기사가 서 있는 넓은 공간에는 불에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정적을 깨고 세인의 입술이 다시 열린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검을 잡을 수 있겠나? 셀린?”

“저는 농노의 딸이라서 검을 쓰는 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도 바라보지 않고 손을 들어 검지를 까닥였다.

검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직접 말로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갑옷도.”

던져진 검과 갑옷이 셀린의 발치에 떨어져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앞에서 셀린이 갈팡질팡할 때 세인이 그녀를 독촉했다.

“셀린. 그게 너의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나는 포로를 남기지 않겠다고 내 부하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므로 오늘 너는 죽는다. 그리고 네 선택에 따라 바꿀 수 있는 부분도 있다.”

“….”

“내 생각에 그건 조금 후에 죽는 너 자신의 모습이다. 네 인생의 끝에서, 벼랑 끝에서 몸을 날리기 전에 취할 네 모습을 선택해라.”

그 말이 셀린으로 하여금 갑옷을 주워 입게 했다.

그리고 검을 들 힘도 주었다.

이제 글리터의 기사들은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중앙에 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은 셀린과 세인뿐이었다.

셀린은 남자의 검집에서 고급스런 검이 뽑혀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보자 상대가 확실히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실력도 그러할 것이다.

그 증거로 남자가 내뿜고 있는 기세가 그녀의 살갗을 따끔거리게 했다.

검을 든 세인은 셀린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지 않은 속도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느리지도 않았다.

셀린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렇다 해도 방금 만신창이가 된 경험을 하고 온 몸이다.

평소대로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무리였다.

그걸 같은 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심지어 그녀 자신마저도 말이다.

그러나 육체와 최선은 무관하다.

의지가 최선의 유무를 결정할 뿐이다.

경쾌함과 거리가 먼 둔탁한 검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글리터의 기사들은 얼굴을 굳히고 한 여기사의 분투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몸짓은 검술을 담기 보다는 처절한 의지를 담았다.

그것은 죽기 직전의 인간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을 걸고 피워 올린 마지막 불꽃과도 같았다.

실력의 고하를 떠나, 극복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녀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기사의 자격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격도 없는 자일 것이다.

셀린은 결국 세인의 발에 채여 넘어졌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헐떡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셀린에게는 그게 바로 사신의 그림자였다.

세인은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얼굴로 셀린에게 말했다.

“네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리터의 주인이다. 이 검으로 수많은 몬스터를 베었으며, 역시나 수많은 강자를 죽였다. 너는 그런 나의 검에 죽는 여기사다. 네가 너를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나는 이 말을 꼭 네게 해주고 싶었다.”

셀린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힘겹게 말했다.

그게 바로 당당해지려 하는 모습이 되었고, 동시에 그녀의 유언이 되었다.

“저를 셀린이라고 밝힌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제 이름은 셀린입니다. 저는 오늘 짓밟힌 한 명의 여자가 아니라,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죽습니다.”

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셀린은 그 앞에서 눈을 감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심장에 세인의 마검이 파고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순간 검으로 죽음을 맞이하며, 두 눈을 감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사다웠다.

피를 머금은 마검이 다시 공기 속으로 노출되자, 검 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누군가의 눈물을 연상케 하는 그 핏자국은 천천히 천막 바깥으로 이어졌다.

그 도중에 맥과 세인의 눈이 마주쳤는데, 맥은 세인이 지나쳐 가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잘 묻어 주겠습니다.”

맥이 생각해도 셀린은 불행한 여자였다.

전쟁터에서라면 이유야 어떻든 실력을 겨루고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무기를 맞대고 최선을 다한 후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런 죽음이라면 기사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셀린이 찾아왔던 방식으로 죽음을 도모하는 것은, 지켜보는 사람에게 있어 충분히 안타까운 죽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맥은 죽어 있는 셀린에게로 다가가, 부릅뜬 그녀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런 맥을 뒤로하고 천막 밖으로 나온 세인은, 피를 털어내기 위해 검을 몇 차례 휘두르고 검집 안에 그것을 갈무리했다.

다음은 팔짱을 꼈다.

그가 있는 주둔지 밖으로 약간 높게 떠올라 있는 코포니 성이 보였다.

내부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코포니 성은 이렇게 아래쪽에서 보면 조금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빛을 내는 위대한 건축물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쟁 속에서는 누구라도,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었다.

또 그게 전쟁의 본질이란 것이다.

오늘 밤 비슷한 일도 글리터를 출발하기 전에 충분히 예견했었다.

분명 마음 찜찜한 일이 여러 개 벌어지리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게 조금이라도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짱을 낀 세인은 코포니 성을 탐탁지 않다는 듯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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